김한순, 김준태, 함형수, 정한모, 이태극

2006.05.16 02:51

김동찬 조회 수:302 추천:38

*** 126

당신이 그리워질 때
컴퓨터 전원을 켜지요
윈도우 화면이 떠 오르고
그대의 홈페이지가 보이지요
어제의 일정도 보이고
그제의 일정도
내일의 일정도 알지요
오른손으로 그대의 얼굴을 클릭하면
웃는 모습 슬픈 모습 고통스러운 모습까지
다 보이지요
그대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얼굴까지
내 화면에 보이지요
그대는 내 화면 속에 있지요

컴퓨터를 끄지요
그대는 검은 화면으로 사라지지요
그대는 그 안에 있지요

       김한순 (1959 -  ) 「당신은 그 안에 있어요」 전문 

   ‘문학의 즐거움’이란 문학 사이트의 운영자 아니랄까봐서 시에서까지 컴퓨터다. 김한순 시인은 남들이 그 중요성을 인식 못하고 있을 때 문학사이트를 활성화시키느라 무진 애를 썼다. 
   사이버가 가상의 세계라서 리얼리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 말아야겠다. 한 십년 들여다보면 컴퓨터 속에 사랑도 보이고 인생의 희노애락도 찾을 수 있나 보다. 사실 문학도, 시도, 인생도 다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아니었던가.

*** 127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世上事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都市에서 십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김준태 (1948 -  ) 「참깨를 털면서」 전문

   화자는 솨아솨아 쏟아지는 참깨를 털면서 세상사에 흔히 맛보기 어려운 쾌감을 느낀다. 우리의 몸속에 농경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농부에게는 자신의 땀을 흘린 수확물을 추수하는 것만큼 신명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세상의 일도 이처럼 풍성하게 쏟아지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는 희망에 더욱 신이 나 참깨를 털던 화자는 할머니에게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된다는 꾸중을 듣는다. 잘 나갈 때일수록 주위와 자신을 돌아보라는 옛 어른들의 교훈도 슬쩍 곁들여져 있는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나고 신이 난다. 

*** 127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함형수 (1914 - 1946)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전문


‘청년 화가 L을 위하여’란 부제가 붙은 걸 보니 화자는 고호처럼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다 생을 마친 요절한 화가일 수도 있겠다. 사회의 인습과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영혼을 불사른 사람의 무덤가에는 차가운 비석 대신에 해바라기, 보리밭, 노고지리가 어울릴 것 같다. ‘해바라기 비명’이 아니고 ‘해바라기의 비명’이라고 쓴 일본식 어투만 뺀다면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가 쓴 시라고 얘기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성 싶다. 태양같이 태양같이 했다는 그의 사랑이 눈부시다.

*** 129

아가는 밤마다 길을 떠난다. 
하늘하늘 밤의 어둠을 흔들면서 
수면(睡眠)의 강(江)을 건너 
빛 뿌리는 기억의 들판을, 
출렁이는 내일의 바다를 날으다가 
깜깜한 절벽, 
헤어날 수 없는 미로(迷路)에 부딪히곤 
까무라쳐 돌아온다. 

한 장 검은 표지를 열고 들어서면 
아비규환하는 화약(火藥) 냄새 소용돌이. 
전쟁은 언제나 거기서 그냥 타고 
연자색 안개의 베일 속 
파란 공포의 강물은 발길을 끊어 버리고 
사랑은 날아가는 파랑새 
해후(邂逅)는 언제나 엇갈리는 초조(焦燥) 
그리움은 꿈에서도 잡히지 않는다. 

꿈길에서 지금 막 돌아와 
꿈의 이슬에 촉촉히 젖은 나래를 
내 팔 안에서 기진맥진 접는 
아가야 ! 
오늘은 어느 사나운 골짜기에서 
공포의 독수리를 만나 
소스라쳐 돌아왔느냐.

    정한모 (1923 - 1991) 「나비의 여행」 전문

아가는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꿈을 꾸다 절벽과 전쟁, 독수리 등을 만나고 소스라쳐 돌아온다. 일제로부터 갓 벗어난 아가였던 우리 조국은 전쟁의 참화를 겪은 지 반백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다. 
그래서 전쟁은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 
그러나 대화와 눈물 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전쟁이 있었던가. 전쟁에 휘말려 목숨과 가족을 희생시킨 분들 덕택에 자유와 생존을 누릴 수 있었던, 전후세대인 내가 너무 간단하게 전쟁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 130

어허 저거, 물이 끓는다. 구름이 마구 탄다.
둥둥 원구가 검붉은 불덩이다.
수평선 한 지점 위로 머문 듯이 접어든다.

큰 바퀴 피로 물들며 반 남아 잠기었다.
먼 뒷섬들이 다시 환히 열리더니,
아차차, 채운만 남고 정녕 없어졌구나.

구름 빛도 가라앉고 섬들도 그림진다.
끓던 물도 검푸르게 숨더니만
어디서 살진 반달이 함을 따라 웃는고.

       이태극 (1913 - 2003) 「낙조」 전문

    “어허 저거, 물이 끓는다. 구름이 마구 탄다.”는 절창이 들어있는 이 시조는 내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이론정립과 시조운동을 통해 한국현대시조의 기둥을 일으켜 세운 이태극 시인의 작품이다.
   나는 교지 원고 청탁을 위해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실로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채로 이 시인을 찾아뵌 적이 있다. 선생께서는 원고료도 드리지 못하는 고등학교 1학년 애송이 문학소년을 온화하고 친절하게 맞아주고 얼마 후에 장문의 원고도 보내주셨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나 작년에 선생의 부음을 듣고서야, 그간에 찾아뵙지도 못하고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7.07

오늘:
2
어제:
2
전체:
36,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