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를 보는 시각

2007.03.09 03:25

김동찬 조회 수:363 추천:65

  요즘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황진이의 시조 한 편을 감상한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외로운 사람에게 전기도 없던 시절의 겨울밤은 더욱 춥고 길었을 게다. 그래서 그 긴 밤을 잘라 두었다가 임이 오신 날에 펴겠다고 한다. 님 오신 날 밤은 짧고 아쉽기만 한데 그 때 동짓달에 잘라두었던 밤을 이불 아래에서 꺼내 길게 늘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서리서리’와 ‘굽이굽이’가 대조를 이루며 리듬감을 주어서 조선 아낙네의 님을 그리는 애틋한 정한이 굽이굽이 펼쳐진다.
  이처럼 시조에는 우리 선조들의 애환과 정서가 담겨있다. 요즘 노래방에서 애창곡 한, 두곡쯤은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는 것처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면 시조 한, 두 수쯤은 척 읊조릴 수 있어야 했다. 천년이 넘게 시조를 즐겨왔으니 ‘우리시’라고 하면 시조를 떠올려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주에서 미국의 시인들과 영시 창작 모임에 자주 참석하는 이성열 시인은 말한다. 한국에도 고유의 시가 있냐고 미국 시인들이 물었을 때 시조가 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고. 그런데 우리시, 시조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조에 대한 대접은 소홀하기 짝이 없다.  
  반면에 우리나라에서 백년에 불과한 역사를 갖고 있는 자유시는 대단한 영광을 누리고 있다. 1908년 11월 1일 <소년> 창간호에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실린 것을 기념하여 그 날이 한국에서 ‘시의 날’이 되었고, 올해는 자유시 백주년을 맞았다며 대대적인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나는 이 행사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시를 활성화시키는 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며 후원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시가 없다가 백 년 전 11월 1일 날 생긴 것이 아니지 않는가. 마치 자유시만이 우리나라의 시를 대표하고 있는 양 각광을 비추고 정작 우리시의 빛나는 명맥을 잇고 있는 시조에 대해서 홀대하는 것은 공평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아 보인다.
  일본의 예를 보자. 일본 단가(短歌)를 창작하는 인구가 이백만을 헤아린다. 백년 전통의 단가 전문지가 발행되고 있고, 미주 일본인 커뮤니티에도 수많은 단가 클럽이 존재하고 미주 일본인 신문에서도 한달에 한번씩 한 면을 전적으로 할애한다. 이제는 일본을 벗어나 유럽과 미국 내 교과서에도 단가가 실리고 단가를 연구, 창작하는 모임이 한국을 포함한 세계 도처에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단가의 역사가 1250여년이라고 자랑하고 있으며 실제로 매년 이를 기념하는 대대적인 축제를 여는데 왜 우리는 시조 천년은 제쳐두고 자유시 백년만을 기념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망언을 일삼는 일본 수상이나,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켜 책을 쓰는 교활한 일부 일본인을 나무라기 전에, 우리 자신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대해 그동안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나 돌아볼 일이다. 중앙일보 본국지가 매월 펼치는 시조백일장,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미주에서 오랫동안 시조 운동을 벌여온 시조작가들,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미주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 미주 중앙일보 문화 칼럼 <문화의 향기> 2007년 3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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