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 문인귀, 임혜신, 박정순, 유치환

2005.12.05 02:39

김동찬 조회 수:288 추천:32

*** 26

바릿밥 남 주시고 잡숫느니 찬 것이며
두둑히 다 입히고 겨울이라 엷은 옷을,
솜치마 좋다시더니 보공(補空)되고 말아라

                  정인보 (1893 - 1950) 「자모사(慈母思)」

위당 선생의 40수로 된 연시조 「자모사(慈母思)」중 12번째 시조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보았던 작품이다. 
어머니는 놋쇠 밥그릇에 담아 아랫목에 묻어논 밥은 아들 주시고 늘 찬 것만을 잡숫는다. 아들을 두둑히 따뜻하게 입히시느라 겨울에도 엷은 옷만 입으시던 어머니. 솜치마를 따뜻해서 좋다고 하시면서도 아끼시더니 결국 그나마도 관의 빈 자리를 채우는 보공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들의 자식사랑은 어쩜 이리 똑 같을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후회하는 자식들의 어리석음도 어쩜 이리 똑 같을까.  

*** 27

침침한 눈 
차라리 
안경을 벗고나니
당신은 더욱 
내게 
가까이 와 계시네요.

     문인귀 (1939 -  ) 「안경을 벗는다」전문

 무선 전화기가 고장이 났다. 무선 전화기 없이 며칠을 지냈는데 생각보다도 견딜만 했고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집도 무사하고 사업체도 잘 돌아갔다. 조금 지나고 나니까 아무 때나 나를 불러대는 전화 벨소리가 없어서 더편안해지기조차 했다. 무선 전화기의 경우처럼 내가 신문을 펼치고 컴퓨터를 켜는 것도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습관에 의해서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바람과 물소리만 들리는 바닷가나 깊은 산 속에 다만 며칠이라도 푹 쳐박혀 있고 싶을 때가 있다. 책이나 신문이 없는 곳이면 더욱 좋겠다. 읽을 것이 없으니 안경도 물론 필요 없을 게다. 그러면 당신의 모습이 내게 더 잘 보이고, 당신의 목소리 더욱 또렷이 들릴지도 모르겠다. 


*** 28

".... 장미꽃, 좀 주셔요.
저어....대이지도 한 다발, ......"라고, 말을 건네는
순간의 감미로움을 사려는 것일까
"참으로 아름다운 날이지요?"라고
입술이 꽃이름처럼 흔들리는
그런 짧은 착각을 사려는 것일까
아니면 낯선 남자의 불행과 내 무슨 
깊은 연관이라도 있어서일까
나는 오늘도 중년의 사내가 표정 없이 앉아 있는
길가에 문득 차를 세운다  

  임혜신 (1959 -  ) 「꽃」부분

쓸쓸한 그림이다. 아내가 달아나고 아들이 죽은, 중년의 사내가 꽃을 팔고 있다. 
이 낯선 남자의 불행과 내 무슨 깊은 연관이라도 있어서일까 하는 화자의 자문은 시인이 독자에게 묻는 질문일 수있다. 무표정한 얼굴로 꽃을 팔고 있는 중년의 사내는 낯이 익다. 고독한 현대인,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화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차를 세우고 꽃을 사겠다고 말을 건넨다.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다가온다. 쓸쓸하지 않은 그림이다.


*** 29

별이 내려앉는
겨울 가로수처럼
서성거리다
말없이 떠 날 수도 있겠구나
기차가 끊긴 정거장에서
긴 겨울밤을 견뎌
첫차를 기다리는 희망이여
기다림의 겨울 나무여

    박정순 (1960 -  ) 「겨울 나그네 2」부분

박정순 시인은 겨울이 긴 카나다에 살고 있다. 박시인이 겨울 풍경을 노래한 시가 유달리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늦은 시간 텅빈 대합실에서 서성이는 기인 그림자... 누구를 기다리기 위해 혹한의 추위에도 떠날 줄 모르는 것일까?  문득 기다림이 아름다웠다. 기다릴 줄 아는 이의 너그러움이 축복받은 사람 같았다."
박 시인이 스스로 자신의 시에 붙인 해설이다. 
하지만 긴 겨울밤을 견뎌 첫차를 기다리던 사람이여, 이제 겨울을 떠나 보내자. 이미 입춘도 지나고 봄바람이 불고 있지 않은가. 

*** 30

사랑하는 것은
사랑은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은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유치환 (1908 - 1967) 「행복」전문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 봄이다. 잠자던 땅도 기지개를 켜고, 무덤에도 새 풀이 돋는다. 나무들엔 따뜻한 피가 돌아 새 잎이 돋는다. 강남 갔던 제비도 돌아오고,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온다. 미움도, 어두웠던 마음도 다 버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하고 싶은 시간이다. 그래서 발렌타인 데이라는 사랑의 날도 봄의 입구에 자리잡고 있나 보다.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고 노래했던 청마 선생은 실제로 이영도 시인에게 사랑에 빠져 약 이십 년간 거의 매일 연서를 보냈다고 한다.
   사랑의 시를 한 편만 고른다면, 나는 이 「행복」이란 시를 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사랑에 빠진 모든 연인들이 사랑을 받아서가 아니라 사랑하였으므로 진정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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