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과 낮은 곳

2005.12.16 11:09

김동찬 조회 수:349 추천:27

  러시아에 있는 엘부르즈(Elbrus) 산에 다녀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프로메테우스 신이 인간에게 불의 사용법을 알려준 벌로 정상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 먹히던 산이다. 그리스 시대에는 신들만이 드나들던 신비의 산이었지만 이제 유럽 최고봉이란 이름 때문에 세계의 등산객들로 그 문턱이 닳는다.
  산행 경험이 적고 고산에 올라본 적이 별로 없는 나에게 5,642미터의 정상은 내 발로 걸어 올라간 가장 높은 곳이었다. 중턱에 이르니 벌써 백두산 높이의 주변 산들이 발아래 내려다 보였고, 정상에서는 탁 트인 사방으로 펼쳐진 코카서스 산맥이 한눈에 들어왔다.
  왜 사람들이 그렇듯 높은 산 정상에 오르려 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산의 밑자락에서 흐르는 시냇물과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봉우리를 올려다보는 잔잔함이 여성적이라면, 정상에서 짙푸른 하늘 아래 웅장한 산봉우리들과 계곡이 끝없이 펼쳐지는 것을 내려다보는 장쾌함에는 남성적인 미학이 있다.
  등산을 마치고 우리 재미한인산악회 엘부르즈 원정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모스크바와 세인트 피터스버그 관광 일정을 가졌다. 모스크바 역에서 세인트 피터스버그로 가기 위한 야간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기차역 건물은 플랫폼을 보고 길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기차를 향해 걸어가고 기다릴 수 있도록 가운데에는 넓은 공간이 있고 그 양쪽으로 식당이  나 기념품 가게, 간단한 스낵이나 과일을 파는 조그만 상점으로 빼곡히 차 있어서 역이라기보다는 어떤 깨끗한 거리에 와 있는 느낌이 들었다.
  배낭을 한 군데 모아서 몇 사람이 지키고 각자 자유 시간을 가졌다. 대원들은 맥주를 사다 마시기도 하고, 역사를 구석구석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고,  밤열차를 타고가면서 먹을 만한 것을 사기도 했다.
  나는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상점에 들어갔다. 냉장고에는 오이소박이 담가먹기에 적당한 크기의 오이가 들어 있었다. 배는 고프지 않지만 시원하게 먹고 싶기도 하고 또 넉넉하게 사서 여행 중에 나눠먹으면 좋을 것 같아 보였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 점원에게 그 오이가 얼마냐고 영어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러시아 말로 마구 화를 내면서 나가라는 몸짓을 해보였다.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손짓 발짓으로 오이 정도는 쉽게 사먹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나는 갑자기 당황했다. 그러나 눈치로 알아채겠지 생각하고 다시 영어로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오이를 사고 싶다. “
  뜻밖에도 그녀는 다시 손으로 밖을 가리키며 나가라는 시늉을 하면서 소리를 쳤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쫓겨나오고 말았다. 팔기 싫으면 관두라지. 속으로 투덜거리며 러시아 사람들의 불친절함에 진저리를 쳤다. 그 여자뿐만 아니라 내가 본 러시아 사람들은 웃음이 없고 쌀쌀맞았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공산 혁명의 소용돌이를 거치다보니 그렇게 됐을 거라고, 내 일이 아니니 시간만 때우면 된다는 공산주의의 폐단이 아직도 몸에 배어있기 때문일 거라고 대원들끼리 말하기도 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란 노래가 있듯, 아무리 멋진 엘부르즈가 있고 아무리 아름다운 궁전을 가졌다 하더라도 사람의 미소와 따뜻한 마음씨에 비할 수 있을까. 나는 복수라도 하듯 쌀쌀맞은 러시아인들의 점수를 마음속으로 마구 깎아내렸다.
  그런데 그날 밤 야간열차 침대칸에 올라가 거울을 보고서야 그 종업원이 왜 화를 내며 나를 몰아냈는지 알 수 있었다. 문짝 안쪽에 붙어있는 거울 속의 내 행색은 완벽한 거지였다. 엘부르즈 등정 때 무공해 공기를 뚫고 내리꽂히던 햇살과 눈에 반사된 빛에 익어버린 내 얼굴은 군데군데 딱지가 졌고, 피부가 벗겨지고 있어서 너덜너덜하기까지 했다. 원래 쳐진 눈이 피곤으로 인해 더욱 게슴츠레 했고, 내 딴에는 멋있으라고 기른 구레나룻 수염까지 제멋대로 입 주위를 덮고 있었다. 달랑 빈 컵 하나를 손에 들고 있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거지였을 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저분한 노숙자들도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어느 날 어떤 어려운 환경에 처해 그런 모습으로 전락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될 완벽한 가능성과 외모를 갖추었음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높은 곳에 있다고 너무 거만하지 말 것이며 낮은 곳에 있다고 너무 절망하지 말라’는 다소 교과서적인 교훈마저 새롭게 다가왔다.  
  나는 날마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지내니까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보는 내 자신’과 ‘남이 보는 내’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다가 겉차림 때문에 거지 취급을 받았었지만 나는 거지가 아니므로, 그것은 웃어넘길 수 있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 속 사람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욕심과 독선에 빠져든 추한 모습으로 내 이웃들에게 불쾌감을 일으키는 일은 없었는지 문득 불안한 생각이 든다.
  이번 엘부르즈 등정 여행 중에 나는 내 생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갔으며 또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 보았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고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눈을 이고 있는 고산들과 구름을 내려다보는 희열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가게에서 쫓겨나기까지 하며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서서 내 자신과 이웃에 대해 생각해보는 경험 또한 유익하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 <에세이21> 200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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