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길, 이생진, 최경희, 서정주, 한용운

2005.12.21 04:36

김동찬 조회 수:374 추천:34

*** 36

여자대학은 크림빛 건물이었다.
구두창에 붙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알맞게 숨이 차는 언덕길 끝은
파릇한 보리밭....
어디서 연식 정구의 흰 공 퉁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기엔 아직 철이 일렀지만
언덕 위에선
신입생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김종길 (1926 -  ) 「춘니(春泥)」전문

봄춘, 진흙니. 봄 진흙이 구두창에 달라붙는다. 아마도 화자는 새 학기 강의를 처음으로 맡아 여자대학을 찾아가는 교수님일 것 같다. 구두가 땅에 달라붙어 발만 빠져나오는 날엔 진흙범벅이 된다. 신발과 옷을 덜 더럽히면서 보리밭을 낀 언덕길을 조심스레 오르느라 숨이 가쁘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데 연식정구공이 튀고 신입생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언덕은 알맞게 가파르고, 퉁기는 소리를 내는 공도 적당히 말랑말랑한 연식 정구공이다. 봄 진흙에서는 겨울의 언 땅이 녹아 보리를 파랗게 자라게 하는 희망이 느껴진다. 여자 대학을 찾아가는 봄날의 대학생으로 돌아가 본다. 기분 좋은 봄날이다.

*** 37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살자

    이생진 (1929 -  ) 「무명도(우도)」전문

이 시가 대학로에서 곧잘 불려지는 무명도란 노래의 원문이다. 이 시인은 머리 속에서 상상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섬을 찾아가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시를 쓴다. 우리나라의 섬 중에서 이생진 시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섬이 몇 개나 될까. <그리운 바다 성산포>, <그리운 섬 우도에 가면> 등의 시집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섬과 바다를 노래한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원로시인이지만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30여권의 시집과 족히 2000편이 넘는 시를 썼다. 인사동에서는 매달 박희진 시인과 함께 시낭송회를 연다. 섬처럼 우리에게 그리움을 주는 시인, 파도처럼 젊은 시인이다.
    
*** 38

구름이 내려와서 산몸을 돌아돌아
산마루에 풀어놓은 젖빛 촉촉한 체온
옷 벗고 사르르 들면
혼절해 쓰러지는 꽃

    최경희 (1932 -  ) 「구름과 꽃」전문

  이렇게 육감적인 시도 있을까. 단어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구름이 산의 몸을 돌다
젖빛의 촉촉한 체온을 산마루에 풀어놓는다. 마침내 옷을 벗고 꽃은 사르르 혼절하고 만다.
시의 역할 중에 하나는 세상의 이치를 밝히는 일이다. 그래서 삼라만상을 지배하고 있는
음양의 조화는 시인이 놓칠 수 없는 중요한 화두이자 시의 주제이기도 하다. 음양이 완전한
합일을 이루고 사람과 자연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순간은 그래서 아름답고 진지하다.
이 시는 사랑에 빠져있는 젊은 시인이 쓴 게 아니다. 미주에서 시조운동을 벌이고 있는
최경희 시인이 칠순 인생의 경륜과 미학을 담은 절창이다.


*** 39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시방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서정주 (1915 - 2000) 「선운사 동구(洞口)」전문

    너무 유명해서 새삼 설명이 필요 없는 작품이다. 사족을 달면 오히려 시가 주는 감흥을 확 줄어들게 만들 것 같다.
   지금쯤은 선운사를 에워싸고 있는 동백나무들이 꽃을 피어내고 있을까. 아님,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고 시들은 작년 것만 말라붙어 남아 있을까.
   이 시를 읽다보니, 만개한 새 꽃을 구경하는 사람들 속에 끼어있는 것보다 한물간 막걸릿집 여자가 불러주는 육자배기 가락과 그녀의 애환이 녹아있는 지난 이야기들을 시방 더 듣고 싶다. 그것도 목이 쉰 남도의 사투리로.

*** 40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1879 - 1944) 「님의 침묵」부분

   삼일절이 되면 한용운 선생이 떠오른다. 만해 한용운은 최남선의 독립선언문 초안을 수정했고, 독립선언문의 눈동자와 같은 공약삼장을 첨가했을 뿐만 아니라 태화관에서 대표연설 및 만세삼창을 제안하는 등 삼일운동을 주도했던 분이다.
   위 시와 같은 제목의 시집 <님의 침묵>에 담겨있는 90편의 시는 거의 모두가 님을 노래했다. 시인 자신은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얘기했다. 그러니 님은 떠나간 연인만을 의미하지 않고 종교적인 절대자 혹은 진리일 수 있다. 그가 옥고를 치르면서까지 몸바쳐 그리워했던 것이 조국의 광복이었음을 상기할 때 님이 조국을 의미한다고 말해도 물론 틀리지 않다.
   님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던 그의 예언은 적중해서 조국은 광복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안타깝게도 광복을 한 해 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건만 님은 떠나고, 다시 삼일절을 맞아 사랑의 노래만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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