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 이영도, 정지상, 장태숙, 이탄

2005.12.21 04:35

김동찬 조회 수:252 추천:23

*** 31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보일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같은 여자, 슬픔같은 여자, 병신같은 여자, 시집(詩集)같은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같은 슬픈 여자.  

               오규원 (1941 -  ) 「한 잎의 여자」전문 

  시는 설명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로 끝났으면 이 시는 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푸레 나무 한 잎 같은 여자를 사랑했기 때문에 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물푸레 나무는 이 시가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푸레 나무는 물을 푸르게 하는 나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실제로 이 나무의 껍질을 물에 담그면 물이 파랗게 되고, 껍질을 태운 재는 물에 풀어 염료로 쓰였다.  
  물푸레 나무 한 잎이 보인다. 쬐그맣고 뒷면에는 하얀 솜털이 나 있다. 그 나무가 우리 가슴을 맑고 푸른 색깔로 물들이고 있다.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녀의 슬픔까지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 32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 쓸었나

보리 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 
보네.

   이영도 (1916 - 1976) 「보리고개」부분 

이영도 시인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고 사랑을 고백한 유치환 시인의 상대 여성이었다는 사실로 일반인에게 유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스캔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작품외적인 일들에 더 관심을 갖게 만들어 작품에 대한 평가를 소홀하게 하곤 한다. 이영도 시인은 누구의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긴 문인으로 더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세상에 가장 가슴아픈 일 중의 하나는 배곯는 아이를 보는 일이다. 겨울에 비해 해가 부쩍 길어진 것조차 허기를 더해주는 봄날, 감꽃만 주워먹던 아이가 비어있는 줄 알면서도 몰래 솥을 열어본다. 간결한 내용이지지만 백 마디 말보다 더 많은 걸 들려준다.    시조의 정수를 본다.

*** 33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갠 언덕 위 풀빛 푸른데 
님 보내는 남포에는 구슬픈 노래 흐르고
대동강 물이야 언제 마르리 
해마다 이별의 눈물 보태는 것을)

     정지상 ( ? - 1135 ) 「送人」전문

19일은 대동강물이 풀린다는 우수(雨水)다. 강물을 식수로 마시고 생활용수로 쓰던 옛 사람들에게 대동강의 해빙은 내가 수도관 터지는 소리를 듣던 어느 봄날 아침의 반가움보다도 훨씬 더 큰 감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런데 정지상이라는 고려시대 시인은 대동강물이 녹아 흐르는 게 반갑지 않다. 대동강이 님을 싣고 떠나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별의 슬픔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이 보태져 대동강은 마르지 않을 거란다. 강둑에 빛나는 푸른 봄과 대조되어, 님을 떠나보내는 옛사람의 순정이 더욱 애잔하다.  

*** 34
저만치로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밀쳐집니다
"그럼 얼른 끊어야겠네? 많이 따세요. 그리고 아프지 마시구요."
노을 속을 홀로 가는 기차
철로가 언제 끊길지 모르는 기차
조심스레 산모롱이 넘어갑니다
"그래 그래, 너도 건강해라."
전화기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태평양이 닫힙니다.

   장태숙 (1956 -  ) 「어머니는 화투를 치신다」부분

이 시는 특이한 구조를 갖고 있다. 연극의 대본처럼 대화와 지문으로 이어진다. "여보세요?"라고 한국의 어머니가 전화를 받는 대사로 시작한 이 시는 미국에 사는 딸과의 전화 통화가 끝날 때까지의 짧은 시간을 그려냈다. 
늘 혼자서 병치레를 하시는 어머니의 곁에 있어드리지 못한 딸로서는 모처럼 친구 분들과 화투를 치며 즐거운 시간을 갖고 계신 것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노을에 언덕을 넘는 오래된 기차 같이 위태로워 보이는 어머니가 눈에 아른거린다.
평범해 보이는 전화대화 장면을 통해 홀로 사시는 친정 어머니에 대한 멀리 시집간 딸의 마음을 잘 담아냈다. 결혼한 여성 독자는 이 시를 읽다가 한번씩은 눈물을 찍어냈을 것 같다.

*** 35
이따금 마음 속에서 본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앉지 않는 한 마리의 새, 보였다 보였다 하는 새.
그 새는 이미 나뭇잎이 되어 있는 것일까.
그 새는 이미 나뭇가지일까.
그 새는 나의 언어(言語)를 모이로
아침 해를 맞으며 산다.
옮겨 앉지 않는 새가
고독의 문(門)에서 나를 보고 있다.

      이탄 (1940 -  ) 「옮겨 앉지 않는 새」부분  

시인의 마음 속에는 옮겨 앉지 않는 새가 한 마리 있다. 놀지도 않고, 짝짓기도 안 하고, 먹지도 않는다. 오직 시인이 주는 언어만을 먹고 아침해의 햇살만 맞으며 산다. 그 새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깨끗한 영혼을 갖기 위해서 고독의 문에 앉아 자기 자신과 힘들게 싸우고 있다.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는 새가 움직이지 않으면 특별한 일로 눈길을 끈다. 하지만 사람이 이 가지 저 가지로 날아다니면 그것도 별나 보인다. 이렇게 정신적인 순결을 지향하는 시를 읽으면서, 한국의 총선을 앞두고 이 당 저 당 옮겨다니는 철새들을 떠올리는 걸 보면 나는 아직 시인되기에는 잡념이 너무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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