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렬, 기영주, 윤준경, 최영미, 정지용

2005.12.21 04:38

김동찬 조회 수:359 추천:36

*** 41

길을 가다가 비를 만났다
남의 집 처마 밑에 들어가서
비를 피하고 내리는 비를 내다본다
떠나가는 사람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빗방울이 발등에 떨어지고
한번씩 휘익 치고 지나가는 찬바람에
빗방울 가루가 가슴에 후드득 뿌린다
새삼 저는 누군가를 찾아가는
사람이 되어가는가 어인 일로
기다리듯 기웃기웃 저쪽을 내다본다
문 닫힌 가게 하나가 간신히 보이고
미루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자동차도 지나가지 않고 비만 지나간다
비는 이내 그칠 것 같지 않고
방안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나는 얼마만의 나그네인가

    고형렬 (1954 - ) 「비 치는 남도(南道)」전문  

몇 해 전 일이다. 친구인 이지엽 시인과 광주에서 명확한 목적지 없이 길을 나섰다가 명옥헌 배롱나무, 땅끝마을, 완도까지 돌아온 적이 있었다. 운전하고 가는 차창에, 한갓진 길에, 바다에 마구 떨어지는 비를 보면서 「비 치는 남도(南道)」이 시를 떠올렸다.
우연히 비를 만나 남의 집 처마 밑에 서있는 외로운 나그네는 바로 내 모습이었다. 누군가를 찾아가고 싶고,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차창 밖을 기웃거린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집들의 문은 닫혀있고 비만 후드득 내 가슴을 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낯선 세상의 처마 밑에 잠시 머물다 가는, 정처 없는 나그네일지도 모른다. 나는 얼마만의 나그네인가.  

*** 42

비온 뒤 거리는 빛나고
하늘은 푸른데
나는 깡통이나 걷어차고 있다

사랑이 제일이라는데
정의는 이루어져야 하는데
왜 이리도 미움이 많은가
나는 깡통이나 걷어차고 있다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해야 한다고
박해와 학살을 주저하지 않는 이상주의자들
지금도 깃발아래 모여 있는데
나는 깡통이나 걷어차고 있다

비온 뒤 거리는 빛으로 가득하고
하늘은 푸르디푸른데
뒹굴던 깡통이 벌떡 일어나 나를 걷어찬다

     기영주 (1939 -  ) 「깡통이 나를 걷어찬다」전문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명목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람을 죽였던가. 아니, 죽이고 있는가. 인류 최대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깃발 아래 모여 박해와 학살을 하고 있는 이상주의자들을 향해 화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깡통을 걷어차는 일밖에 없다. 그러나 깡통을 차는 일이란 세상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단지 미움을 버리지 못하는 또 하나의 무력한 이상주의자인 자신을 발견할 뿐이다. 깡통이 벌떡 일어나 화자를 걷어차면서 이런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다.
기영주 시인의 시는 늘 독자를 고민하고 반성하게 만든다. 벌떡 일어나 우리를 차는 깡통이다.

*** 43

"자리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언뜻 앉으라는 뜻으로 오해 마시길
공중탕에서 "자리 있어요"는 자리 없다는 뜻
(중략)
자리는 많아도 자리는 없다
어디까지 밀려날 것인가?
아직은 순하고 우둔한 나의 의자
"다 왔어요" 할 날이 머지 않다

      윤준경 (1945 -  ) 「자리 있어요」부분

공중목욕탕의 자리로부터 시작한 자리 얘기는 강의실, 현금지급기 앞의 긴 줄, 주차장, 카페, 산속의 돌의자 등으로 이어진다. 자리는 많다. 그러나 모두 남의 위한 자리다. 내가 앉을 자리, 내가 발뻗고 누울 자리, 내 일자리는 없다. 컴퓨터가, 젊음이, 동작 빠르고 덩치 큰 차들이 그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지금 현재 앉아있는 자리도 목적지에 다다른 교통수단의 자리처럼 "다 왔어요" 하는 날엔 가차없이 내려야 한다.
"자리 있어요"라고 하면 혹시라도 앉으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자리는 있지만 남의 자리라고 깨우쳐주는 그 말이 벽이 되어 선다. 우리의 발이 공중에 뜨고, 몸은 휘청거린다. 현대인의 소외와 불안감의 뿌리를 본 느낌이다.

*** 44

아침상 오른 굴비 한 마리
발르다 나는 보았네
마침내 드러난 육신의 비밀
파헤쳐진 오장육부, 산산이 부서진 살점들
진실이란 이런 것인가
한꺼풀 벗기면 뼈와 살로만 수습돼
그날 밤 음부처럼 무섭도록 단순해지는 사연
죽은 살 찢으며 나는 알았네
상처도 산 자만이 걸치는 옷
더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약속

       최영미 (1961 -  ) 「마지막 섹스의 추억」부분

금기시하던 성에 관한 단어를 최영미 시인이 시에 자주 사용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때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이제 성은 더 이상 감춰져 있지 않아서, 추억하는 게 아니라 섹스를 하고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 시인의 시는 솔직한 섹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섹스 이야기를 통해 무섭도록 단순한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섹스도, 사랑도, 아픔도 살아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고 살아있기 때문에 추억할 수 있다고 한다. 섹스가 지난 후에 죽은 생선을 보는 그 허무하고 낯선 느낌을 시로 쓴 사람은 최영미가 유일할 것이다.

*** 45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정지용 (1902 - ? ) 「춘설(春雪)」부분

  봄 꽃이 피어나는 봄날을 머리 속에 그리며 인천공항에 내렸더니 눈이 퍼붓고 있었다. 100년만에 내린 3월 큰 눈이었다고 한다. 20년 가까이 눈없는 겨울을 엘에이에서 보내고 있는 나에게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다.
   정지용 시인에게도 같은 느낌이었을까. 봄날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여니, 마주 보이는 먼산에 봄눈이 하얗게 덮혀 있다. 예상치 못했던 눈은 갑자기 찾아온 반가운 친구 같기도 하고, 정신을 번쩍 나게 하는 샘물같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신선한 충격'이라는 진부한 표현밖에 할줄 모르는데, 정지용 시인은 "먼 산이 이마에 차라"라는 명구를 찾아냈다. 이마에 선뜻! 다가오는 듯한 먼 산, 춘설...  이렇게 마주보이는 세상에 대한 감탄이 서정시의 출발이고 우리의 삶을 늘 새롭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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