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최승호, 황동규, 이정록, 박화목

2006.01.23 00:06

김동찬 조회 수:428 추천:62

*** 76

4·19가 나던 해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김 뿜으며/열띤 토론을 벌였다/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겨울밤 하늘로 올라가/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회비를 만 원씩 걷고/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부끄럽지 않은가/부끄럽지 않은가/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1941 -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문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보려고 피를 흘렸던 4.19 세대는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는 기성세대가 되었다. 짐짓 옛 사랑을 잊어버린 것처럼 돌아서는 그들의 뒷모습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보인다. 내 마음까지 닿는 긴 그림자, 쓸쓸하지만 한편 아름답다.

*** 77

축복해 주십시오. 구더기에서 벗어났습니다. 날개라는 선물도 받았구요. 그런 내가 다시금 왜 구린내 나는 데 달라붙어 사는지 나도 모르겠네요. 

날개를 접은 
파리 한 마리 
말라가는 변꼭대기에 앉아 
변 더듬던 앞발로 
뒤통수를 긁적인다. 

   최승호 (1954 - ) 「파리」전문 

  이 시를 읽으며 여러 정치가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만 그렇게 탓할 일은아니다. 그들에게 날개를 선물로 준 건 우리가 아니었던가. 그들이 다시금 구린내나는 곳에만 머물지 않도록 향기로운 환경을 제공했어야 하지 않은가. 
  길거리로 나가 목청을 높이고 남에게 잘못을 묻기 전에 조용히 촛불을 켜고 내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고 싶다. 변 더듬던 앞발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 78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1938 - ) 「즐거운 편지」전문 

몇 년 전, <편지>라는 영화에 이 시가 등장함으로써 황동규 시인의 시집이 갑자기 베스트 셀러가 된 적이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이 죽기 전 편지를 써놓아 사랑하는 아내에게 매일 배달되게 만드는 슬픈 영화였다.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이 무엇인지를 영화는 잘 해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소함이란 내일이면 그리움으로만 만날 수 있는 오늘의 모든 순간들이 아닐까. 

*** 79

돌부처는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이정록 (1964 -   ) 「더딘 사랑」전문

   달과 사랑하기란 참 답답한 노릇이겠다.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라니 언제 손은 잡을 것이며 어느 세월에 입술은 훔칠 수 있을까. 그러나 달은 그나마 괜찮은 편이다. 돌부처가 윙크했을 때는 돌부처 자신이나 세상이 모래가 될만큼 세월이 흐른 후에나 가능하다니 말이다.  
   그러나 돌부처가 눈 깜짝할 시간도 못 되는 그런 짧은 생애를 살다가는 그대여 만난 지 몇 시간 만에 서로를 확인하는 인스턴트 사랑만 하다 간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그러니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 걸리는 그런 더딘 사랑을 배울 일이다.

*** 80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 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박화목 (1923 -    ) 「보리밭」전문 
 
신문에 보리밭길 관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 눈에 띠었다. 
고향에는 앝으막한 야산으로 이어지는 밭들이 있었고 봄이면 보리가 파랗게 돋아났다. 그 보리가 자라면 채 익기도 전에 모가지를 따다가 구워먹던 생각이 난다. 문둥이들이 어린아이를 보리밭에서 잡아먹는다고 하는 슬픈 얘기도 알고보면 문둥이들이 숨어서 보리를 구워먹곤 하던 것이 와전되었으리라. 보리만 바람에 스산하게 넘실거리는 그 한갓진 보리밭 사이에 숨어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배고픔도, 사랑도, 추억도 다 품에 안고 저무는 저녁처럼 사라져가는 보리밭. 돌아보면 저녁놀 빈하늘만 눈에 차는 보리밭에 마음은 신문의 관광객이 되어 걷다 멈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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