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목월, 나희덕, 함민복, 김준철, 정수자

2006.05.16 02:41

김동찬 조회 수:343 추천:30

*** 111

송화(松花)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1916 - 1978) 「윤사월」 전문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사는 요즈음이다. 너무 많은 정보가 책에, 인터넷에, 메스컴에 쏟아져 나온다. 그러다보니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영원히 몰랐으면 더 좋았을 성싶은 일까지도 알게 된다. 
오늘은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가 되고 싶다. 그리고 송홧가루 냄새가 묻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맡기고 귀를 모으겠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가 운다. 

*** 112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새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 

       나희덕 (1966 -   ) 「부패의 힘」 전문

한국의 정치가들은 부패를 폭로하고 비난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소의 차이는 있을망정 부패하지 않은 정치가는 눈에 띠지 않는다. 남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의 부패한 모습을 들여다보는 거울을 하나씩 들고 다녔으면 좋겠다. 그래서 모두가 잘 발효된 음식, 잘 썩은 세상의 거름이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 113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1962 -   ) 「긍정적인 밥」 전문

시인도 경제활동의 주체라는 사실을 이 사회는 도대체 알고나 있는 걸까. 시인도 펜과 종이가 있어야하고, 컴퓨터가 필요하고,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걸 기억하는 일은 선비의 고귀함을 값싼 자본주의에 팔아넘기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도 함민복 시인의 시는 쌀이 되고, 국밥이 되고, 소금 한 됫박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미국에서 한국어로 글을 쓰는 시인들은 돈을 받기는커녕 돈을 내는 경우도 많다. 출판 비용을 필자들이 나눠야만 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 114

어디에도 문이 없기에
모두가 문이다

일상의 자물쇠를 달지 않은…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문이 된다

열리지 않기에
닫히지도 않는

벽은 허술한 자유다
 
  김준철 (1969 -   ) 「벽. 문」 전문

좁은 문이건, 넓은 문이건 하나밖에 없다면 사람들은 그 문을 통해 드나들 것이다. 그러나 만일 문이 없이 사방이 벽으로만 된 공간 속에 있다면 밖으로 나가기 위해 그 벽을 밀어보거나 넘거나 무너뜨릴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벽으로 갇혀있다고, 고립돼 있다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때, 세상의 벽은 모두가 문이 된다. 그래서 벽은 허술한 자유다.

*** 115

   시오리 달빛 끌고 워낭소리 두런두런 산 넘어 고개 넘어 오시는가, 오시는가

   아부지- 먼저 엉긴 생떼 같은 오라비 번쩍 안아 내리다가 손에 얼른 쥐어 주던 눈깔사탕 눈부셔서 순간 침이 가득 고여, 아부... 나 그만 얼어붙자 여동생 둘 덩달아 발묶여 돌아서니 운동장보다 넓은 마당 달빛만 출렁거려, 텅 빈 우리 손바닥엔 달빛만 가득 고여, 치마폭에 달빛 속에 눈물 묻은 눈깔사탕만 하릴없이 어룽거려, 이후에도 소 눈 같은 고것만 볼라치면

   벌겋게 목이 받치네
   아버지 나도! 나도!

        정수자 (1957 -   ) 「눈깔사탕」 전문 

   미국에 먼저 와 살고 있던 작은 누나가 캔디를 먹어보라고 꺼내주었다. 그리고 누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캔디가 된 연유를 얘기해주었다. 
   육이오 사변 후에 미군이 지나갈라치면 아이들이 달려가 헤이 껌 어쩌구 하면서 손을 내밀곤 했다. 숫기가 없었던 어린 누나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한 미군이 멀리 있는 누나를 불러 사탕 몇 개를 손에 쥐어주었다. 그 캔디는 그야말로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수십년이 지나서도 누나는 그 맛을 가진 캔디를 정확하게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시대를 잘 만나서 뱃가죽이 등에 붙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정말 맛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 혀와 배는 잘 모른다. 경험자들이 그것은 굶주림 후에 먹는 음식이라고 하는데 머리로만 수긍할 뿐이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박목월, 나희덕, 함민복, 김준철, 정수자 김동찬 2006.05.16 343
101 조오현, 문정희, 임보, 정일근, 김남조 김동찬 2006.05.16 328
100 홍채염 앓으며 새해를 맞다 김동찬 2006.03.23 491
99 구상, 이성복, 김소월, 이육사, 노천명 김동찬 2006.01.23 365
98 방정환, 최석봉, 도종환, 문무학, 오영근 김동찬 2006.01.23 372
97 이창수, 김재진, 고재종, 박현덕, 김영랑 김동찬 2006.01.23 436
96 김호길, 황인숙, 고시조, 김영수, 유안진 김동찬 2006.01.23 426
95 김광규, 최승호, 황동규, 이정록, 박화목 김동찬 2006.01.23 428
94 이장희, 박영희, 박시교, 정찬열, 이조년 김동찬 2005.12.21 324
93 신동엽, 권대웅, 이의, 강중훈, 이상 김동찬 2006.01.20 241
92 서정춘, 김금용, 박남철, 조운, 석상길 김동찬 2006.01.20 386
91 반병섭, 조옥동, 이정환, 김용택, 지인 김동찬 2006.05.16 306
90 김제현, 고시조, 나호열, 루미 김동찬 2006.01.20 465
89 정완영, 이수복, 이시영, 이선관, 한하운 김동찬 2005.12.21 342
88 정양, 백선영, 고현혜, 김희현, 김상헌 김동찬 2005.12.21 301
87 고형렬, 기영주, 윤준경, 최영미, 정지용 김동찬 2005.12.21 359
86 오규원, 이영도, 정지상, 장태숙, 이탄 김동찬 2005.12.21 252
85 김종길, 이생진, 최경희, 서정주, 한용운 김동찬 2005.12.21 374
84 높은 곳과 낮은 곳 김동찬 2005.12.16 349
83 정인보, 문인귀, 임혜신, 박정순, 유치환 김동찬 2005.12.05 288

회원:
1
새 글:
0
등록일:
2015.07.07

오늘:
2
어제:
2
전체:
36,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