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엽, 한혜영, 기형도, 이상국, 천양희

2005.09.11 06:15

김동찬 조회 수:529 추천:22

*** 21

경북 안동 와룡면 오천군자리 탁청정 아래 
근시재 그 아래 침락정요 
동서로 마주 세운 그 문 말이예요 
맵시가 작고 귀여운 그 문 말이예요 
누구든 몸 궁그리고 
허리 굽혀 지나가는 그 문 말이예요 

전남 담양 소쇄원의 소쇄소쇄 부는 바람요 
지나가다 꼭 한 번은 곁눈질하는 
광풍제월각 앞 낮은 담이요 
누구나가 허리께 차는 그 낮은 담 말이예요 
밝은 그림자들 옹기종기 꽃씨 뿌리고 있는 
그 순딩이 흙담 말이예요 

나직하게 불러도 
얼른 달려와 왜? 왜에? 고개 쳐들어 줄 것 같은 그런 
친구 말이예요 

     이지엽 (1958 - ) 「그 작고 낮은 세상 - 가벼워짐에 대하여·7 」전문

  이지엽 시인에 대해 말하자면 개인적인 친분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는 내 고등학교 동기동창, 문예반. 교외 학생모임 친구거든요. 그뿐만이 아니예요. 고등학교 2학년 말에는그 친구와 함께 문예반실에서 등사기로 밀어 시집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하지만 2인 습작시집을 만든 적도 있어요.  
  이 시인은 내가 나직하게 불러도 얼른 달려와 소쇄원의 순딩이 흙담 너머로 소쇄소쇄 부는 바람처럼 고개를 내밀 거예요. 그는 작고도 낮은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정겨움을 잘 아는 시인이거든요. 언제나 왜? 왜에? 고개 쳐들어 줄 것 같은 그런 친구 말이예요.

*** 22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 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죄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냥 상처다 이 겨울의 어둠 아니 한줄기 빛을 참고, 그래 빛이야말로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상처가 되었나 눈부신. 찬란한. 아름다운 따위의 형용사와 눈이 맞아 저지른 빛의 횡포, 가지마다 넘치는 축복인양 위선의 잎새 덕지덕지 달아주며 오늘의 상처를 마련 했었다 누구라도 헛발 자주 내딛고 나뒹굴던 시절, 쌈지돈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 
어딘가에 한 뭉치 퓨즈가 분명 있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의 끈을 잇고 명치끝을 꾸욱 누르면 혼곤한 잠의 머리 절레절레 흔들며 숲은 그날처럼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새들은 이 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한혜영 (1954 -  ) 「퓨즈가 나간 숲」전문

 한혜영 시인이 만들어내는 은유는 생경해서 그 낯선 이미지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곤 한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강렬한 인상을 독자에게 남긴다.
그녀의 시집 제목이기도 한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에서는, 이민자의 고단한 삶이 첩첩이 밀려오는 태평양의 파도를 다리는 일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위 시에서 퓨즈가 나간 숲이란 찬란한 시간이 지나고 상처만 남은 마음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있는 퓨즈를 찾아 연결하면 숲은 다시 일어나고 빛나게 될 것이다. 
한 시인의 은유와 익숙해질 때쯤이면 그녀의 시들이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 지 알게 된다. 우리들 상처입은 가슴 한구석에도 언젠가 홀연히 우리를 깨우고 일어서게 하는 퓨즈가 있다는 것이다. 그 퓨즈는 바로 훗훗한 그리움이란다. 

*** 23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1960 - 1989) 「엄마걱정」전문

이 시는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는 모든 어른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어릴적 나의 아내는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먼저 일어나 살짝 일하러 나가버린 엄마의 빈 자리가 너무나 커서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 때마다 장모님의 무릎 사이에 다리를 끼어넣고 아침에 엄마가 일어날 때 함께 일어나야지 하고 매번 실패하고 마는 결심을 했었다고 추억한다.
어릴 때 뿐이랴. 그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엄마를 그리워한다. 단지 이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그 엄마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그 때와 다르긴 하지만...  

*** 24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이상국 (1946 - ) 「국수가 먹고 싶다」전문

  이 시를 읽으니 미국 장을 5년간 떠돌던 생각이 난다. 그리고 파장 때마다 일던 먼지바람도 떠오른다. 
파장무렵은 흥청거리는 잔치가 끝나고 화려한 무대가 막을 내리는 시간이다. 잊고 있었던 마음의 상처도 아리고 눈물자국 때문에 감추었던 속도 환히 들여다 보인다. 그래서 국수라도 한그릇 먹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허전함을 누구나 갖게 된다. 
 어둠이 허기같은 저녁, 울고싶은 사람들과 함께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멸칫국물에 양념간장 대충 치고 신김치와 함께 말아 후루룩. 

*** 25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 걸

      천양희 (1942 - ) 「단추를 채우면서」전문

  이 시는 첫단추를 잘못 끼면 모든 단추가 잘못 끼어진다는 낡은 격언을 상기시킨다. 산다는 건 단추의 구멍찾기처럼 쉬어보이나 자칫 잘못 첫단추를 채우고 나면 남은 인생이 엉망이 된다. 단추를 채우는 사소한 일상이 인생이 걸린 문제로 우리 앞에 다가선다.
  천양희 시인은 이처럼 누구나 다 아는 말이나 이야기, 그래서 시에서는 죽은 은유라고 거들떠보지 않는 것들을 시 속으로 곧잘 가져온다. 낡고 진부한 단어들, 너무나 흔한 이름들,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는 물건들이 그녀가 조금 닦고 손질해서 시 속에 올려 놓으면 금방 생기를 얻어 살아 움직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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