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읽어주는 예수

2003.12.09 05:06

김동찬 조회 수:632 추천:61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89
신문 읽어주는 예수

김동찬
















태학사











우리 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89
신문 읽어주는 예수


초판 인쇄 2003년 11월 18일 초판 발행 2003년 11월 20일 지은이 김동찬 펴낸이 지현구 펴낸곳 태학사 주소 서울시 서초구 서초2동 1357-42 전화 (02) 584-1740 (代) 팩스 (02) 584-1730 e-mail thaehak4@chollian.net http://www.thaehak4.com 등록 제22-1455호

ISBN 89-7626-878-4 04810 ISBN 89-7626-507-6 (세트)


ⓒ 김동찬, 2003
값 5,000 원

☞ 저자와의 협의하에 인지를 생략합니다.
☞ 파본은 구입한 곳이나 본사에서 바꾸어 드립니다.
차례
제1부

그것을 엑스(X)라 하자 11
그런 내가 무섭다 12
기차 14
손 16
조각 맞추기 17
새벽 잠 못 드는 서울 18
청계천 19
선물 20
조명 21
풀씨 22
태풍의 말 23
설사 24
할 일 26
해뜨는 집 27
벌새 28





제2부

빈 가지 위 바람 31
나-무 32
신문 읽어주는 예수 33
갈 데가 있을 텐데 35
교회당이 있는 풍경 36
어미 37
있을 때 잘 해 39
초롱꽃 40
축제 41
낮달을 보다가 43
뭐라고? 44
데스밸리(Death Valley) 45
약속 46
도레미 사진관 47



제3부

사랑니 51
차창에 붙어 있던 것 52
전봇대 53
꽃 54
컴퓨터로 쓰다 55
가을 산 56
호박 57
새, 야구장에서 58
들유채꽃 59
털 60


제4부

눈뜨는 방 63
내 기차 64
생각하는 새 65


고동 부는 사내 66
꿈·1 67
꿈·2 68
기차가 남긴 겨울 69
바람 70
손놓고 71
불혹(不惑) 72
나물 73
등대로 선다 74
유치찬란 75
문신 77


해설 기차가 멈추는 곳·김춘식 79
김동찬 연보 91
참고문헌 92


제1부
그것을 엑스(X)라 하자


모르고 있는 수 그것을 엑스라 하자.
또 다른 미지수 와이(Y)와 반비례하거나
제트(Z)의 몇 제곱으로 놓여 있는 세상.

사람들은 엑스를 찾아내고야 만다.
우주의 거리를 재고 복제 인간을 만든다.
건져낸 자연수 몇 개 물에 젖어 떨고 있다.

백제의 왕릉이 서울역 지하도에 뒹군다.
헐벗은 마네킹이 울며 울며 길을 가고
자꾸만 더 보여 달라고 조르는 사람들.

따스한 햇살과 바람, 달과 별, 시드는 꽃.
미지수 우리의 사랑 그것을 엑스라 하자.
이제는 엑스를 그만 엑스라 남겨 두자.

그런 내가 무섭다


다박골 지나 상여집
공동우물
제줏집 뒷간
바람불면 울음 우는 대숲 처녀 귀신
어릴 땐 사람보다도 그런 것이 무서웠다

웬만한 세상 일엔
놀라지 않는 우리
비행기가 그렇게……
빌딩이 순식간에……
그래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무섭다

너를 향해 번득이는
총구의 어둠만큼
문득 꿈틀대는
그 살의, 붉은 그늘
한순간



나를 떠미는
그런 내가 무섭다


기차


바나나는 길어
긴 것은 기차

미국 기차는 더 길어
어떨 땐 백 칸도 넘어
미국 건 다 길어
다리도, 나무도, 건물도, 사람까지

한참씩 길고 길어서 질리고 기죽게 해

언니는 좋겠네 언니는 좋겠네

아저씨 코가 커서 언니는 좋겠네
어릴 적 우리들은 뜻 모르는 노래를 불렀다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던 성수는
잘 사는 미국 매형 자랑이 많았지만
그 누나는 좋을까 아직도 좋을까
아저씨 코가 커서 아직도 좋을까


나처럼 성수 누나 질리지는 않았을까
나처럼 성수 누나 기가 죽어 지낼랑가

무심한 기차 지날 때 괜한 걱정 덜컹이네





손을 흔들었다,
어긋나지 않은 만남에.

아내가 공항 출구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온몸으로 웃음을 튕기며 애들이 따라 나왔다. 시계가 한시를 땡 하고 알릴 때처럼 얼마나 많은 톱니바퀴가 하나하나 맞물려 왔는가. 두랄루민 판때기에 앉아서 구름 위로 태평양을 건너오다니! 괌에서는 비행기 추락소식이 날아왔다. 살아서 다시 볼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손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손으로 땅이나 내려치고 있었다.

슬며시 손을 내렸다,
어긋난 만남에.

조각 맞추기


천 조각 자투리 맞추는 데 일주일 걸렸다
이렇게 온전한 하나였던 풍경 그림
나무, 집 우뚝 일어나 따뜻한 햇살 맞고 있다

어느 짝에도 맞지 않아 보이던
색깔도 모양도 꼭 한 자리 남아 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작은 조각의 천 근 무게

반세기 흐트러진 만 조각 찢어진 가슴들도
더 늦어 잃어버리기 전에 제 자리로 돌려놔야지
북으로 먼저 가는 소 떼 눈시울이 젖어 있다

가장자리 쉬운 곳부터 시작하는 것이 요령
천천히 하나 둘씩 어깨 낮춰 바라보면
언젠가 딱 들어맞으리 백두대간 단풍 물들리


새벽 잠 못 드는 서울


12층 문정동 아파트
새벽에 잠이 깼다
눈에 불켜고
달리는 차량들
또 가로등
모두 다 어디로 가는 걸까
어둠이 차가웁다

당신이 밤을 가르며 뛰어가는 숨소리
꽃이 피고 어딘가 아침이 있으리라
가늘고 서늘한 비가 잠의 허리를 찌른다
아침이 저녁이 되고, 또 겨울이 봄이 되는 걸
모르고 달리는 저 망각의 행렬 끝으로
혼자서 잠 못 드는 서울
나는 섬이 되어 젖는다

청계천


청계천 고가도로가 철거되기 전에
퇴행성 관절염에 쑤시고 낡은 다리
서울의 아랫도리를 들여다보고 오리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며
어둠에 묻어 잠겨오는
퀴퀴한 바람도
차창을 열어제치고 깊숙이 마셔두리라

삐까뻔쩍한 서울이
어디서 왔냐 묻거든
청계천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증언하리니
때로는 우울한 기억도 미치도록 그리워서

선물


성산포 '해뜨는 집' 강중훈 시인은
바다랑
일출봉이랑
다 가져가라 한다

吾照里,
쨍한 바람만
가방 가득 채워 왔다.


조명


내 친구의 딸이 연극을 한단다
가장 중요한 역을 맡았다고 자랑이다
아무도 그 아이 없이는
빛날 수 없는 조명 담당

내가 꽃처럼 피어나 웃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비추고 있는 걸 잊고 살았다
밤에도 나를 향한 빛을
보내고 있는 저 별들


풀씨


반바지 차림으로 들길을 걷다보면
종아리를 간지르는 풀잎들이 반긴다
살아서 만나게될 줄
정말로 몰랐다 한다

신발에 붙어온 악착스런 풀씨 한 개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억세게 살아왔구나
고맙다
거친 손 꽉 쥐며
울먹이던 영준이

태풍의 말


나는 지나가는 중이야.
내 앞을 막지 말라구.
나무도 넘어뜨리고 집들을 부수지.
온실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건
못된 자존심 때문이야.

시간이 바람같이 빠르단 말 알고 있니.
그래 바람은 시간처럼 빠르지.
네 아픔 상처까지도 바람처럼 지나갈 거야.

설사


배를 앓고 싶다
창자가 끊어지게
끙끙 소리내며 온 몸이 뒤틀리게
사르르 아프지 말고 한꺼번에 모아서

딱총 쏘듯 하지 않고
자동으로 걸어 놓고
탄피야 튀든 말든 드르륵 갈겨대고 싶다
더러운 내 속의 것들
썩을 대로 썩은 것들

앞뒤도 안 맞고
위아래도 몰라보고
된소리 상소리
생각 없이 나오는 대로
남 생각 할 겨를 없는
급하디 급한 볼 일


그래서 나도 나라도 속 시원해진다면
창자 속 확 까뒤집어 투명해질 수 있다면
거룩한 입으로 말고
똥구멍으로 시 한 편 쓰고 싶다

할 일


할 일이 없을 때는 나무그늘에 누워 있곤 했다
그러면 나뭇잎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바람은 천천히 내 몸에 들어왔다 나갔다

요즘엔 할 일이 없으면 컴퓨터를 켠다
메일도 확인하고
떠도는 소문에 귀를 연다
할 일이 없을 때가 없다
한가로운 바람이 없다


해뜨는 집


성산리 일출봉 앞 '해뜨는 집' 사무실에서
해가 뜨면 모닝콜을 주기로 했지만
안개와 구름에 가려 해는 뜨지 않았다.

돌아오는 날까지 해는 뜨지 않았지만
버젓이 대낮이 되었다가 해는 지곤 했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해 뜨지 않는 날 없었다.

해가 떴어도 안 떴다고 말하고
별이 가득해도 별을 보지 못하는가
스스로 앞을 가리고 문 잠그는 내 말, 내 눈


벌새


현관 앞 벤자민 가는 가지 위에
몸뚱아리만 쏘옥 들어갈 둥지를 지었다

한없이 넓은 지구에 엄지만한

집 하나


제2부


빈 가지 위 바람


빈 자리는 무언가로 다시 채워진다
푸르던 여름날들 떠나보낸 가지 위에
어느새 내려와 앉아 바람들 쉬고 있다.

이천 년이 온다면 삼천 년도 오겠지
무거운 오늘도 내일엔 가벼울까
내 이름 지운 자리에 어떤 열매 불러 앉힐까


나-무


소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오동나무……
촉촉하게, 푸르게 살아 있는 동안은
나-무라 불리우지 않는다.
무슨무슨 나무일뿐이다.

초록색 파란 것, 말랑말랑 촉촉한 것
꿈꾸고 꽃피고 무성하던 젊은 날
다 떠나 보내고 나서
나-무가 되는 나무.

나무는 죽어서 비로소 나-무가 된다.
집이 되고, 책상이 되고, 목발이 되는 나-무.
둥기둥 거문고 맑은 노래가 되는 나-무.

신문 읽어주는 예수


하관하려는 차량 행렬에 끼어 로즈힐 묘지에 갔다

천천히 천천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 길목 어느 묘지 옆에 앉아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접는 의자를 펴고 앉아 무덤 속에 있는 아내를 위하여 신문을 읽어주는 머리가 하얗게 센 라티노 할아버지, 세상엔 우스운 일도 많아 전쟁과 테러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아웅다웅하고 있어 근데 햇살이 참 좋지? 곧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거야 그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 같다 그 때 내 차의 라디오에서는 17살 테너가수 임형주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베∼∼ 마∼∼ 리∼∼ 아∼∼ 느리지만 싱그러운 햇살이 되어 건너간 묘지 앞 꽃병엔 장미가 붉다 할아버지 눈가에 순간 환한 웃음이 빛나고 나는 그 자리를 지나쳤다 장례행렬을 따라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지만 방금 본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죽음과 삶의 그 희미한 경계를 보여주던 그는 누구였을까 예수였을까 꿈이었을까



오는 길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조용하였다


갈 데가 있을 텐데


차창 밖 내다보며 혼잣말하던 아버지
저 차들이 모두 다 갈 데가 있을 텐데……
황급히 제 갈 곳 향해 사라져 가는 바람

노을보다 빨리 달려 어둠으로 빠져드는
저 하늘이, 저 길이, 저 집들이, 저 차들이,
모두 다 갈 데가 있을 텐데……
아버지 가신 그 곳.


교회당이 있는 풍경


이파리 떨군 나무가 생각에 잠겨 있다
바람도 발자국을 조심스레 딛는 오후
햇빛이 하얗게 빛나
낯선 길도 쉬 찾겠네

한 때는 싱싱했던 꽃들도 힘을 잃고
어깨를 기대며 애써 웃음 짓고 있다.
로즈힐 교회당 위로 덜컹
하늘 문이 열린다.


어미


1
친구가 일식집 수족관을 잘못 관리해
새우들이 다 죽고
한 마리만 남았다.
수천의 새끼를 까고서야
마지막으로 죽었다.


2
경기도 안산 한 횟집의 수족관에
까치 상어가 60마리 새끼를 낳았다
장경자 식당주인은 바다로 보내주었다.


3
팔순의 어머니가 불구인 딸을 돌본다
어렸을 적 허리를 다친 환갑이 다 된 여식
절대로 눈 못 감지라우


야랑 같이 가야지라

있을 때 잘 해


이제는 없는 사람들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있을 때 잘 해'란 노래도 나왔겠지. 우리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을 겪으며 노래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저렇게 내 마음을 대신해준 시가 있었던가. 우영이와 수연이 어린 남매를 두고 떠난 동원이 형, 홍콩에서 돌아오지 않은 동선이 형, 급성간염으로 별이 된 동기 형, 가버린 사람들아, 나에게 잘해줄 시간을 더 갖지 않고, 내가 잘할 시간을 주지 않고 떠난 사람들아. 또 내가 가는 걸 아직 보지 못한, 그래서 언젠가 가슴 아플 사람들아.

있을 때, 있을 때 잘 해.
먼지 같은 사랑아

초롱꽃


초롱을 앞세우고 오시는 이 누구인가
내 마음 구석구석 초롱불 안 닿은 곳 없네
저승도 밝히려는지
땅으로 지는 저 붉은 빛


축제


죽은 친구를 땅에 묻고 이차로 모인 자리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고 잔을 돌린다
한 혼령 서성거리다 아무도 몰래 일어선다

힘차던 목소리
악수하던 따뜻한 손
아직도 우리 등을 탁 치며 놀래킬 것 같은데
눈앞에 웃고있는 건
오늘 여기 때묻은 삶

망자가 걸어갈
멀고 팍팍한 길을 위해
들이킨 한잔의 술이 목구멍을 내려가는 순간
우리는 잊어버린다
빈자리
메꿔진다

언젠가 내가 떠나도 비워질 그 자리


친구들은 모여서 말간 바람 불러모을까
하늘과 땅의 경계를
웃음소리로
지워버릴까.


낮달을 보다가


저 달 너머에 내세가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자식을 두고 떠나간 그 많은 어머니들 중
한 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건너왔을 테니까

뭐라고?


사업이 망했다고?
누군가가 세상 떴다고?

울지마
눈을 씻고 봐
지지 않는 꽃이 없잖아

너만이
겪는 일 아냐

바람이
분다고?


데스밸리(Death Valley)


한 번도 다녀온 적 없는 죽음의 계곡으로 내려간다

I Can't Stop Loving You 꿈에서까지 멈추지 않는 사랑 노래를 들으며 해저 백 미터, 하얗게 뒤덮인 소금 바다, 백만 년을 남아 무엇을 짜게 하겠다고 소금이 되었을까 올라간 적만 있었던 나는 내려간다 바다를 말려 소금이 되게 한 햇살은 내 몸의 수분을 조금씩 뺏아 간다 내가 가지려 했던 것들, 무언가가 되려 했던 마음도 마르고 사랑도 마른다 입술에 맴도는 사랑을 멈출 수 없어 노래도 하얗게 소금이 되어 날린다 모래알처럼 까실하다

살아서 죽는 꿈을 꾸었다
바다의 뼈가 먼지 되어 나는 꿈

약속


광화문 비제바노 제화점 있던 자리에서
100년 후 첫눈 올 때 시린 발로 만나자,
얼굴이 없을지 몰라 교복 입고 명찰 달고

바람부는 분분함으로 우리 혼령끼리 만나
눈보라 날리면서 낄낄낄 웃어보자
아픔도 눈물도 없이
구름인 듯
눈꽃인 듯


도레미 사진관


도레미 사진관이라고 인쇄된 봉투 안에
아버지 이민올 때 준비해온 증명사진
몇 십 장 찍어왔는지 십여 장이 남았다

농담도 잘하고 씩씩하던 아버지
낯선 땅,
남의 나라에서 남아돌던 의욕인 양
아버지 깊은 눈빛이 아직도 살아있다

아버지 근무하던 공의진료소 옆집
도레미 사진관에서 사진 찍던 순간이
서랍 속 어둠을 제치고 찰칵 찰칵 떠오른다

제3부


사랑니


가시내들 눈꼬리에 웃음만 얹어 줘도
그 눈빛 끌어안고 며칠을 흐뭇하던
그 시절 살며시 들어와 떠날 생각 않는다.

가을엔 나무들이 빨갛게 몸살 앓는다.
가슴 한켠 따뜻하던 묻혀진 기억들도
찬바람 휭하니 불어 욱신욱신 일어난다.

차창에 붙어 있던 것


차창에 무엇인가가 붙어 있다가 팔랑 떨어져 나갔다.
종이 쪼가리였나. 마른 이파리였던가. 날개가 있었어. 잘 생각해보니 나비 같기도 해. 아냐, 조그만 새였어. 하늘로 파닥이며 날아 올라갔잖아. 올라가서 확인해 보고 싶어. 하지만 벌써 보이지 않는 걸. 사라져버린 거야. 사라졌어. 내 생애에서는 다시 볼 수 없게 된 거라구. 그래, 맞아. 그건 나비나 새 따위를 잡으러 산으로 들로 날아다니던 내 어린 날이었어.
스무 살 나를 좋아하던 고 계집애. 웃음소리였어.

전봇대


혼자라고 생각되니?
전봇대를 쳐다 봐.
끝가는 줄 모르고 나란히 서있잖아.
모두들 유선전화기 귀에 대고 소근대고 있지.

견디기 힘드니?
전봇대를 자세히 봐.
한 걸음도 못 가고 따로따로 서 있지.
웅웅웅 이를 악물고 울음을 참고 있잖아.





꽃집에서 은퇴한 이에게 수국을 선물했더니
꽃과 함께 평생 살았어도 볼 때마다 새롭단다

사람도 그럼 좋겠다

눈짓 몸짓
새로 뜨는



컴퓨터로 쓰다


며칠을 잠 못 이뤄 편지를 보내놓고
답장을 기다리며 애태우는 일도 없다
타닥탁 쓰기도 쉽지만 삭제는 더 빠르다

붓으로 천천히 글씨를 쓰듯이
한 글자 한 글자 자판을 두들겨 본다
ㅅ ㅏ ㄹ ㅏ ㅇ ㅎ ㅐ
머-뭇거리다
흔적 없이 사라진다

가을 산


앤젤리노 산,
단풍나무만 단풍들지 않았다
나무도 잡초들도 울긋불긋 비명이다
이제 더 참을 수 없어
막판의 저 뜨거운 정사

가을 산의 목소리 내 얼굴에 닿았을까
다녀온 지 며칠만에 옻이 올라 후끈하다
열꽃이 불을 지피고
일주일을 울었다


호박


나무의 진이 굳어
호박이 되었다

나무의 뼈
나무의 사리
나무의 사랑
나무의 시

겉에선 알 수조차 없는
단단한
눈물

새, 야구장에서


입구에서 받은 흰 수건을 들고 일어섰다.
오만 개의 작은 물결이 큰 파도를 만들어
우우우 밀어닥치는 거친 숨결 푸른 해일.

작은 바람이 큰 바람을 만들고
큰 바람은 작은 바람을 틈새없이 쓸고 갔다.
이렇게 휩쓸리는 거야.
찬호 잘한다.
쥑인다, 쥑여.

그 때 문득 쳐다본 하늘에 날개를 얹고
감히 범하지 못할 아득한 하늘 길로
유유히 큰 새 한 마리 떠가고 있었다.

내가 지금 부서져 물방울이 되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제 갈 길만 가는 그대
목청껏 하얀 손수건 흔들고 불러 보아도.

들유채꽃


들유채꽃 피기 시작한 이른 봄 산길을 걷다

아직 채 무성해지지 않은 잎은 잘 안보이고 노란 유채꽃만 날아다니는 것 같다.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 꽃들 사이로 나는 헤엄쳐 다니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된다. 지느러미를 한번씩 흔들 때마다 번져가는 꽃 파문. 그렇게 부끄러워 눈을 가렸나. 단발머리 출렁이며 연애기 잔등 뛰어가던 노란 노오란…… 봄이란 그런 건가. 꽃도 사람도 바람도 집도

세상에 가라앉은 기억들이 모두 일어나 둥둥 떠다니는가.





박남철 시집을 읽다 눈에 띈 긴 털 하나
모른 채 하기도, 책을 놓기도 싫었다
독서를 마칠 때까지 입에 물고 있기로 했다

소중하지 않은 것도 물고 있을 때가 있다
너의 입에 나의 입에 잠시 그렇게 머물러서
서로를 어쩌지 못한 채
시간이 가고
한 생이 가고……

제4부



눈뜨는 방


거미도 없는데 거미줄 쳐져 있어
바람도 없는데 바람에 움직인다
갑자기 번쩍 귀 여는 초침의 들숨 날숨

한 조각 햇살도 꺼질까 실눈 뜨면
거미가 보인다 바람이 보인다
햇빛을 풀무질하는 먼지들이 춤춘다

살아서 숨을 쉬고 끊임없이 얘기하는
한 세상 눈앞에 두고 모르고 지났구나
도대체 내가 아는 것 있기나 하는 걸까

구석에 팽개쳐 둔, 없지만 있는 것들
마음 속 고운 빛깔 잔잔한 물결까지
혼자서 빈방에 앉아 눈을 뜨는 거울 속

내 기차


내가 자는 동안에도 내 기차는 달린다
베개에 귀를 대면
푸르른 기적소리
바람을 온 몸에 싣고 바다도 건너간다

언제나 덜컹대며 먼 곳으로 떠돌다가
이제는 간이역에서
쉬는 일이 많아졌다
이곳이 어디쯤인지 돌아보는 일도 잦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디로?
철로가 끊겨있다
부모님 세상 떠나니 모두 다시 아득하다

생각하는 새


단풍나무 가지 사이
종일 오는 겨울비
날갯짓 한 번 없이
새 한 마리 흠뻑 젖는다
천리 밖
남은 먼 길도
지금은 남의 일이다

세상의 자잘함에
얽매인 아랫것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도도히 생각에 잠긴다
우주도
숨을 죽인다
나도 그냥
젖는 오후

고동 부는 사내


열기가 남아있는
와이키키 해변에서
웃통을 벗어제치고
고동을 부는 사내
밤바다 귀 열어놓고
발돋움해 듣는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낯선 섬,
바다에 오면
남몰래 소리 지르고픈
사연 하나씩 있을 거다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부우부우 대신 운다.

꿈·1


서류와 현금이 가득한 가방을
지하철에 남겨두고 잠에서 깨어났다
……
꿈에서 잃어버린 걸 아직도 아까워하다니


꿈·2


쫓기고
불안하고
사방이 막혔을 때

다리는 풀리고 마지막이라고 생각들 때

두 눈을
번쩍!
떠 보라

깨는 수도 있으니.

기차가 남긴 겨울


왜 기차는 겨울 들판을 온몸으로 울고 갔을까
한낱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
눈썹 위 눈발 하나하나 시끄럽게 했을까

선명한 칼자국으로 오려내던 기적 소리
지나간 철길 위에 분분한 발자국을 끌고간 뒤
평행선 스쳐간 얼굴들 펑펑펑 눈이 내려

붙잡을 수 없었으리 천리 길을 달려와서
훗훗한 숨 몰아 쉬며 노을 속 사라진 기차
묻힌다, 뜨거운 목소리가 하얗게 덮인다

왜 기차는 겨울 들판을 얼어붙게 했을까
아직도 눈감으면 들려 오는 적막 속으로
혼자서 나만 혼자서 붉게 서게 했을까

바람


바람이 우르르 우르르 집을 흔들고
모든 것이 뽑혀 나갈까봐 걱정하다 맞은 아침

방안의 돈나무 이파리
밤새 참았다가
툭!
떨어진다


손놓고


가끔은 모든 걸 놓고
뒤뜰에 앉아 있으면

잠자리 한 마리 마른풀 위에 머무는 동안에도

바람이 지구를 밀고
저녁으로 가는 게 보인다


불혹(不惑)


강물이 길을 내고 한 시절을 간다.
그 길을 따라 걷는 아이는 어른이 되고
몸 불려 큰 물길로 오는 강
제 발자국 지운다


나물


뿌리까지 뽑아내고 다듬고 데쳐지고
꼭 짜서 갖은 양념 버무려 상에 올려도
아직은 초록초록하다
마흔 여섯 살
살아있다.

등대로 선다


잠들지 않는 바다 제 몸 던져 달려들고
칼바람 날을 세워 뼛속까지 쑤셔대도
끝끝내 꺼지지 않는 불씨 하나 안고 선다

어둠을 응시하면 그 속에도 길이 있다
외로움 살라 뿌린 금 빛 조각 밟고서
먼 발치 지나는 당신
나를 향해 오지 말라
제발


유치찬란


지나간 노래는 언제나 유치하다

도곡동 고층 아파트 밑을 지나다 오랜만에 듣는 노래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네…… 초등학교 때 여섯 살 아래 사촌동생은 한참 유행하던 노래를 엉덩이 씰룩거리며 남진을 흉내내면서 잘도 불렀지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지만 유행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아들의 노래를 손뼉치며 따라 부르던 외삼촌은 몇 년 전부터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고 그 자리 희벙글 웃으시던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는 세상을 뜨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겠다고?
엉덩이 씰룩거리며 반복되는 저 리듬
타워 팰리스 멋쟁이 높은 빌딩 유리창에 쨍그렁 깨어지는 햇살, 유치가 찬란하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도 다 필요 없다 다만 그러나 다만 어딘가에 낙원이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던 그 눈부신 저녁시간 속 한번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삼촌의 웃음소리였나.
귀 끝을 간지르는 바람.

문신


누구나 약간씩은 변태가 아닐까
부드럽고 은밀한 연인의 속살에
절대로 시들지 않는 꽃
그려 넣고 싶어하는

금강산 바위에 집채만한 글자나
우리들 가슴 한켠 새겨 넣은 詩句도
지구의 속살에 심은 사과나무쯤 아닐까



기차가 멈추는 곳
김춘식
문학평론가




누구나 숨길 수 없는 내면의 풍경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 풍경은 그가 살아온 기억과 미래의 운명이 하나의 상징으로 응축된 '충만한 현재'의 모습을 그에게 자각시킨다. 시인의 '시혼'이나 '시정신'에는 언제나 이런 '화두'로서의 '충만한 현재'의 모습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가 살아갈 미래에 대한 예언적인 비전과 과거의 내력이 동시에 조우하는 지점에서 잠시 반짝이는 불꽃처럼 '근원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동찬 시인의 경우 이런 '내면의 풍경'은 여러 편의 작품을 통해 상당히 빈번하게 노출되는 편이다. 특히 아래에 인용한 작품처럼 겨울의 벌판을 달려가는 기차의 열기와 차가운 쇳덩이의 질감, 그리고 뜨거운 기적 소리 뒤에 남는 눈발 아래의 한없는 적막감 등은 삶의 대립적인 두 차원을 인상 깊게 보여준다. 견인주의적인 인내와 고독, 안으로 삼킨 뜨거운 숨과 기적(汽笛), 온몸으로 울며 달려가는 벌판 등은 삶에 대한 열정과 가혹한 현실, 운명을 견디려는 강한 의지와 고독이 동시에 공존하는 하나의 장면을 연출한다. 모든 뜨거운 목소리가 눈으로 하얗게 덮이듯이 삶은 오직 사라져 버린 열정에 대한 적막 속의 추억과 고독으로만 남겨질 뿐이다.

왜 기차는 겨울 들판을 온몸으로 울고 갔을까
한낱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
눈썹 위 눈발 하나하나 시끄럽게 했을까

선명한 칼자국으로 오려내던 기적 소리
지나간 철길 위에 분분한 발자국을 끌고간 뒤
평행선 스쳐간 얼굴들 펑펑펑 눈이 내려

붙잡을 수 없었으리 천리 길을 달려와서
훗훗한 숨 몰아 쉬며 노을 속 사라진 기차
묻힌다, 뜨거운 목소리가 하얗게 덮인다

왜 기차는 겨울 들판을 얼어붙게 했을까
아직도 눈감으면 들려 오는 적막 속으로
혼자서 나만 혼자서 붉게 서게 했을까
-[기차가 남긴 겨울] 전문

한낱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 것의 '운명적인 모습'을 시인은 자신의 내면 속에 고스란히 담아 놓은 것이다. 천리 길을 달려가는 기차만큼 '인생'을 상징하는 적절한 대상이 또 있을 것인가. 열정으로 기차가 되어 멀리 달려가는 마음과 그 열정 뒤에 남겨질 이별과 고독, 적막, 그리움 등의 감정이 이 순간 '기차가 남겨 놓은 인생의 첫 번째 교훈이 된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무모한 열정과 뒤를 돌아보는 자의 고독한 시선이 어우러진 그런 착잡함이 김동찬 시인의 시적 정서에 깃들인 핵심적 요소임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내 기차는 달린다
베개에 귀를 대면
푸르른 기적소리
바람을 온 몸에 싣고 바다도 건너간다

언제나 덜컹대며 먼 곳으로 떠돌다가
이제는 간이역에서
쉬는 일이 많아졌다
이곳이 어디쯤인지 돌아보는 일도 잦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디로?
철로가 끊겨있다
부모님 세상 떠나니 모두 다시 아득하다
-[내 기차] 전문

[기차가 남긴 겨울]의 풍경이 그가 살아갈 인생에 대한 숙명적인 자기 암시를 보여준다면 위에 인용한 [내 기차]는 앞으로만 길게 뻗어 있는 선로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가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먼 곳으로 떠돌다가 간이역에서 쉬는 일이 많아진 것처럼,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뒤를 돌아보는 자의 시선이 그로 하여금 삶을 성찰하는 지혜를 새롭게 터득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곳이 어디쯤인지 돌아보는 일"을 할 때가 되었다는 막연한 허무와 아득함이 그에게 새로운 '운명'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별과 고독과 절망과 열정을, 뜨거운 증기와 차가운 쇳덩이를, 한 몸에 지닌 채 오직 시간을 헤쳐 달려가는 주저 없는 기차의 질주가 아니라 자꾸 뒤를 돌아보며 속도를 줄이는 "덜컹대는" 기차의 모습이 그의 현재를 상징한다. 차가운 쇳덩이 안에 뜨거운 증기를 품은 기차가 젊은 시절 얼어붙은 겨울 벌판을 헤쳐나갈 "굳건함과 열정"을 지닌 상징물로서 시인의 내면 속에 수용되었다면, 이제 기차는 "덜컹이며", 목표도 없이 선로를 따라 달리는 인생 혹은 숙명의 상징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동찬 시인은 시간의 질주와 그 뒤에 남겨진 상처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시간이 바람같이 빠르단 말 알고 있니. / 그래 바람은 시간처럼 빠르지. / 네 아픔 상처까지도 바람처럼 지나갈 거야."([태풍의 말] 중에서)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시간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 일회적이고 치명적인 기억까지도 시간의 검은 터널 속으로 흘러가 버리게 만드는 '망각의 질주'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질주가 시간의 속성인 것처럼 "냉정한 인내와 뜨거운 열정"을 한 몸에 품는 순간, 그 사람은 시간의 질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김동찬 시인의 내면적인 풍경은 이런 '차고 뜨거운' 질주의 기억과 '지금, 여기서' 과거를 응시하는 자의 촉촉한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너를 향해 번득이는 / 총구의 어둠만큼 / 문득 꿈틀대는 / 그 살의, 붉은 그늘 / 한순간 / 나를 떠미는 / 그런 내가 무섭다"([그런 내가 무섭다] 중에서)라고 고백하는 시인의 말은 실제로 맹목적인 질주를 '근대적인 삶'으로 받아들인 그의 과거에 대한 회의다. '인간'으로 표현된 맹목적인 증오와 이기심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근대적인 삶'의 상징인 '기차'의 질주와 그 문명의 최후에 선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동일시한다. "나를 떠미는 / 그런 내가 무섭다"라는 구절은 시인이 품은 스스로의 욕망에 대한 두려움과 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관하려는 차량 행렬에 끼어 로즈힐 묘지에 갔다

천천히 천천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 길목 어느 묘지 옆에 앉아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접는 의자를 펴고 앉아 무덤 속에 있는 아내를 위하여 신문을 읽어주는 머리가 하얗게 센 라티노 할아버지, 세상엔 우스운 일도 많아 전쟁과 테러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아웅다웅하고 있어 근데 햇살이 참 좋지? 곧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거야 그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 같다 그 때 내 차의 라디오에서는 17살 테너가수 임형주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베∼∼ 마∼∼ 리∼∼ 아∼∼ 느리지만 싱그러운 햇살이 되어 건너간 묘지 앞 꽃병엔 장미가 붉다 할아버지 눈가에 순간 환한 웃음이 빛나고 나는 그 자리를 지나쳤다 장례행렬을 따라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지만 방금 본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죽음과 삶의 그 희미한 경계를 보여주던 그는 누구였을까 예수였을까 꿈이었을까

오는 길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조용하였다
-[신문 읽어주는 예수] 전문

이 점에서 이번 시집에 실린 작품의 대부분은 인용한 시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명상과 성찰이 중요한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갈 데가 있을 텐데], [있을 때 잘 해], [초롱꽃], [축제], [낮달을 보다가], [데스밸리], [약속], [도레미 사진관], [불혹], [유치찬란] 등의 작품은 모두 삶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무덤 속에 있는 아내를 위하여 신문을 읽어주는 노인을 보면서, 그리고 죽은 자들이 묻히는 묘지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참 좋은 햇살'과 '맑은 목소리', '붉은 장미와 환한 웃음'이다. 삶과 죽음의 희미한 경계란 사실 '평화'와 '휴식'으로 연결되는 그 순간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각할 때만이 삶은 "전쟁과 테러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아웅다웅"하는 어리석음과 미망으로부터 비로소 깨어나게 된다. 죽음을 곁에 두고 있을 때, 역설적으로 '좋은 햇살'과 '맑은 목소리', '붉은 장미와 환한 웃음'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차창 밖 내다보며 혼잣말하던 아버지
저 차들이 모두 다 갈 데가 있을 텐데……
황급히 제 갈 곳 향해 사라져 가는 바람

노을보다 빨리 달려 어둠으로 빠져드는
저 하늘이, 저 길이, 저 집들이, 저 차들이,
모두 다 갈 데가 있을 텐데……
아버지 가신 그 곳.
-[갈 데가 있을 텐데] 전문

'갈 데'로 표현된 그곳은 '삶의 최종적인 완성'인 죽음을 암시한다. 결국은 가야할 그곳을 의식함으로써 삶은 비로소 마지막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 노을이, 바람이, 차들이, 길이, 집들이, 하늘이 최후의 종착점을 발견하는 그 순간,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스스로의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혼잣말'을 통해 시인이 배운 것은 이렇듯 '죽음'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마지막 '완성'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평범하지만 깊은 진리다.
실제로 "소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오동나무…… / 촉촉하게, 푸르게 살아 있는 동안은 / 나-무라 불리우지 않는다. / 무슨무슨 나무일뿐이다. // (…중략…) // 나무는 죽어서 비로소 나-무가 된다. / 집이 되고, 책상이 되고, 목발이 되는 나-무. / 둥기둥 거문고 맑은 노래가 되는 나-무."([나-무] 중에서)라고 노래하는 시인의 통찰에는 '죽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존재성'을 완성하는 사물과 모든 존재에 대한 자각이 잘 담겨 있다. 죽음을 친숙하게 곁에 두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살아 있음'의 충만한 의미가 결국 '죽음'이라는 마지막 종착점을 선택하거나 만드는 일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자각의 결과이다.

이제는 없는 사람들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있을 때 잘 해'란 노래도 나왔겠지. 우리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을 겪으며 노래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저렇게 내 마음을 대신해준 시가 있었던가. 우영이와 수연이 어린 남매를 두고 떠난 동원이 형, 홍콩에서 돌아오지 않은 동선이 형, 급성간염으로 별이 된 동기 형, 가버린 사람들아, 나에게 잘해줄 시간을 더 갖지 않고, 내가 잘할 시간을 주지 않고 떠난 사람들아. 또 내가 가는 걸 아직 보지 못한, 그래서 언젠가 가슴 아플 사람들아.

있을 때, 있을 때 잘 해.
먼지 같은 사랑아
-[있을 때 잘 해] 전문

김동찬 시인의 작품에 유난히 죽음을 응시하는 시선이 자주 드러나는 것은 인용한 작품에 나타나는 것처럼 어느 정도는 시인의 가족사에 대한 사적 기억의 결과다. "이제는 없는 사람들", '서로 잘해 줄 시간'을 넉넉히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픈 시인에게 '삶'은 늘 아쉬움이고 결핍이고 아픔이었다.
그런 아쉬움과 결핍과 아픔을 견디는 방법이 뜨거운 질주와 시간의 망각을 받아들이는 삶의 여정이었다면, 이제는 그런 망각의 저편으로 밀어 넣으려고 했던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살아간다"는 또는 지금 "살아 있다"는 모든 의미를 증언해줄 유일한 증거는 과거로 밀려간 그 아픔과 상처 속에 오히려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간 노래는 언제나 유치하다"고 시작되는 [유치찬란]이라는 작품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도 다 필요 없다 다만 그러나 다만 어딘가에 낙원이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던 그 눈부신 저녁시간 속 한번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이라는 '영원한 결핍'의 토로와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기억은 그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비춰주는 유일한 신비이고 '아우라(후광)'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약간씩은 변태가 아닐까
부드럽고 은밀한 연인의 속살에
절대로 시들지 않는 꽃
그려 넣고 싶어하는

금강산 바위에 집채만한 글자나
우리들 가슴 한켠 새겨 넣은 詩句도
지구의 속살에 심은 사과나무쯤 아닐까
-[문신] 전문

기억에 대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덧없는 시간 속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의미의 근원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은, 그래서 무엇인가 어떤 의미를 세상에 남겨 놓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연인의 속살에 문신을 새겨 넣는 것처럼, 지구의 속살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고 싶은 그런 열망, 그것이 덧없는 시간 여행자인 인간이 자신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가장 원초적인 '열망' 아니겠는가.
김동찬 연보
1958년 전남 목포시 상락동 출생.
1976년 경동고교 재학중 친구 이지엽과 2인 습작시집 {제목 없는 전설}을 등사기로 만듦.
1982년 국민대 <북악문학상> 수필부문 수상.
1983년 국민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1983∼1985년 주택은행 전산실 프로그래머.
1984년 황지연과 결혼.
1984년 딸 수산 출생.
1985년 미국으로 이민.
1988년 아들 우진 출생.
1993년 미주 한국일보 문예공모 시부문 입상.
1997년 {한글문학} 시 추천.
1999년 계간 {열린시조} 신인상.
2002년 산문집 {LA에서 온 편지 심심한 당신에게}(서울, 고요아침) 출간.
현재 미주 한국문인협회원.
<글마루>, <우리시> 동인.
계간 {열린시학} 편집인.
Semore, Inc. 공동대표.
미 California주 Fullerton시 거주.
참고문헌
원구식, [현대시가 다시 찾은 시인], {현대시}, 2002. 7.
정한용, [이달의 작품-죽음의 형식들], {현대시학}, 200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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