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의 詩學 - 정일근

2005.03.03 01:36

김동찬 조회 수:426 추천:11

■김동찬 시집 <봄날의 텃밭> 발문

마늘의 詩學

                       정일근(시인)


김동찬 형. 우리가 처음 인사를 나눈 곳은 광주로 기억합니다. 그 땐 광주여대에 있던 이지엽 교수가 소개를 했습니다. 작은 문학행사장이었고 우린 처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친구라고, 고등학교 때 문학공부를 같이했던 친구라고 소개했고, 동찬 형은 다음날 목포로 간다고 했습니다. 아니 무안 어디로 간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첫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때까진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은 흔한 만남이었습니다. 나는 고향에 다니러 나온 미국의 한인을 만났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사실 나는 반미감정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별다른 호감을 표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형에게서 ‘버터냄새’가 나지 않아 편했습니다. 말에 반쯤은 영어를 섞어 쓰고, 잊어버린 모국어를 찾는다고 끙끙거렸다면 싫은 소리 몇 마디는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는 넓고도 좁았습니다. 그 뒤 L.A.에 사는 동찬 형의 홈에 안부를 전했는데 중앙아시아 키르키즈 공화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나에게는 중학교 한 해 선배인 최갈렙 목사가 형의 홈에 남긴 안부를 읽고 메일을 보내 온 것입니다. 본명이 최근봉인 갈렙 목사의 메일을 받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갈렙 선배는 10년째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갈렙 목사와 나는 진해에서 중학생 시절부터 친형제처럼 붙어 다닌 사이입니다. 자주 만나던 사이인데 내가 진해를 떠나고부터 연락두절 상태가 되었습니다.
천산산맥이 지나는 키르키즈에서 온 소식에 의하면 동찬 형 홈에 남긴 내 메일주소를 알고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뜻밖에 두 분도 아주 친한 사이라고 했습니다. 두 분은 군대 시절 만난 전우며 그 인연으로 갈렙 선배가 동찬 형에게 지금의 부인을 소개시켜 주었다고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동찬 형의 처가가 내 고향인 진해이고, 부인을 만난 인연도 내가 친형처럼 따랐던 갈렙 목사의 소개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세계지도 위에 세 개의 점을 찍어보았습니다. 갈렙 목사는 키르키즈에, 동찬 형은 L.A.에, 나는 울산의 산골마을에 점을 찍어 참 거대한 인연의 삼각형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 삼각형이 그리는 인연에 사뭇 감동까지 했습니다.
김동찬 형. 이쯤 되면 우리는 보통 인연은 아니었습니다. 그 뒤에 동찬 형도 내 사는 우거를 다녀가고 갈렙 선배도 가족들과 함께 다녀갔습니다. 비록 서로 서로가 뿌리를 내리고 사는 곳이 아득히 먼 곳이지만 언제 그 세 꼭지점이 만나 하나의 점이 되는 날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김동찬 형. 나는 이번 시집 원고―그러고 보니 이 시집은 형의 첫 시집이 되는군요. 1997년과 1999년 시와 시조로 문단에 나와 시조집과 산문집은 냈지만 시집은 처음이네요―에서 민들레 연작시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10편의 민들레 연작시에는 미국으로 이민 가서 살고 있는 시인 김동찬의 인간적인 정체성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 정체성의 배경에는 언제나 ‘나’가 아닌 ‘가족’이 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밤일 다닐 때
아파트 계단에서 늦도록 기다리시던
어머니

집도 사고 좀 안정되었을 때
술 처먹고 늦게 들어오면
늘 문열어주시던
아버지

오늘도
현관 문 앞에
가만히
내려와 계시네
― 「민들레 9」 전문

형의 홈페이지에 소개되는 약력을 보면 1985년 미국으로 이민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형의 미국 이민 20년을 보여 주는 풍경화가 이 시 한 편에 그려져 있습니다.
이 풍경화 속에는 먼 이국땅에서도 이 땅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가진 향기와 색깔을 잃지 않는 민들레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 민들레는 분명 외래종 노란 민들레가 아닌 토종 흰민들레일 것입니다. 토종이라 하지만 외래종의 득세로 한국에서도 보기 힘들어진 흰민들레입니다. 또 이 풍경화 속에는 처음 이민 가서 밤일 다니던 젊은 초상이 있고, 살만해서 “술 처먹”는 사내의 모습도 보입니다. 자신과 싸워야 하는 이민생활, 형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던 약은 흰민들레였습니다.
여기서 내가 흰민들레라고 강조하는 것은 흰민들레와 노란 민들레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민들레를 Mongolian dandelion이라 합니다. 그런데 흰민들레는 Korean dandelion이라 합니다.
토종인 흰민들레는 외래종인 노란 민들레보다 약성이 뛰어납니다. 또한 노란 민들레는 쉽게 수정을 하는데 흰민들레는 오직 흰민들레에 의해서만 수정이 가능합니다. 수정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노란 민들레 꽃씨가 날아와도 단호히 거절하곤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일편단심 민들레’라 하는 것입니다.
같은 땅에 뿌리내리고 살다보면 사람이나 들꽃도 같아지나 봅니다. 흰민들레에게는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흰색의 꽃이 피고 절개를 목숨처럼 지키는 특성이 있어 나는 흰민들레를 좋아합니다.
나는 형이 그리는 풍경화 속에 노란 민들레가 만발한 이역땅에 따뜻하게 뿌리내린 두 송이의 흰민들레를 봅니다. 밤일 나간 아들과 술에 취해 돌아오는 아들의 귀가를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렇습니다.
형의 산문집 『심심한 당신』(고요아침刊)에서 만났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새 학기가 되면 모든 교과서를 헌 달력 종이로 겉표지를 싸주시던 아버지와 맛있는 깨비국을 끓여 주시던 어머니를. 이제는 그 두 분 다 이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형의 현관문 앞에는 흰민들레가 피어 있습니다. 그것도 ‘가만히’ 말입니다.

돌아가지 않겠다
돌아갈 수 없으니까

바람 부는 대로 실려 가겠다
거스를 수 없으니까

발길 닿는 곳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꽃을 피우겠다
시베리아 툰드라 단단한 얼음 위나
화와이 사탕수수밭 뙤약볕 아래

혹은,
로스엔젤레스의 공동묘지
로즈힐(Rose Hill)이라도 찾아가
그곳의 흙이 되겠다

우리 형처럼,
우리 엄마처럼
― 「민들레 4」 전문

여기 또 한 편의 민들레 시편에서 이를 악문 형의 초상화가 보입니다. 이민을 온 이상 그곳에서 뼈를 묻겠다는 생의 배수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겠다/ 돌아갈 수 없으니까”라며 이를 악무는 것입니다.
지난 2002년이 한국의 미국 이민 10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1902년 12월 22일 인천 제물포에서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이듬해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한 100여 명의 한국인이 최초의 공식 이민자였습니다.
그 100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는 200만 명의 재미한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형도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이 있는데 형은 “발길 닿는 곳에/ 뿌리를 내리”겠다고 합니다.
물론 그 배경에는 로스엔젤레스 공동묘지인 로즈힐(Rose Hill)에 뼈를 묻은 형과 어머니가 있습니다. 또한 형은 운명론자입니다. “바람 부는 대로 실려 가겠다/ 거스를 수 없으니까”라며 그 운명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은 가족이민과 운명론에 따라 체념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꽃을 피우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곳이 “시베리아 툰드라 단단한 얼음 위”일지라도 “하와이 사탕수수밭 뙤약볕 아래”라 할지라도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은 미국에 튼튼한 뿌리를 내린 ‘흰민들레’입니다.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재미한국인입니다. 그런 결과는 뼈를 묻겠다는 배수진으로 이를 악문 세월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김동찬 형. 시로 보자면 형은 긍정적인 시인에 가깝습니다. 웃음이 묻어나는 몇 편의 시를 소개합니다.
가을 햇살에 실어
귀가 따갑게 보내 주시는 하늘의 메시지를
그놈의 절집 기둥들은 천년이 넘도록
듣는 듯 마는 듯 해찰하며
배째라 배 내밀고 웃고 있는 중이었다
― 「부석사 무량수전」 끝부분

잠을 잘 때도
독립문표 속옷이 다 보이도록
두 손을 번쩍 치켜 올리고
대한독립만세!
하는 자세로
쿨쿨 잠을 자곤 합니다.
― 「대한독립만세」 끝부분

아버지보다 먼저 떠난 세 형님들이 하하하하 웃는 소리 뒤뜰에 가득합니다. 아버지가 만나고 생각하고 들여다보던 것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 「봄날의 텃밭」 부분


― 「시인은 시로 말한다」 전문
실직한 친구와 부석사를 찾아가며 “그래 살다보면 부석(浮石) 같은/ 희망의 틈새가 있을 거야”며 시인은 절망에도 반드시 희망의 틈새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의 모습을 “배째라 하며/ 배 내밀고 웃고”있다고 합니다.
「대한독립만세」에서 시인은 유관순 누나가 “옥 속에 갇혔어도 만세 부르던” 모습처럼 만세를 부르는 모습으로 자는 아내의 잠버릇을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눈이 반짝 빛나며, 아내 속옷의 독립문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봄날의 텃밭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전에 받아 놓은 쑥갓, 상치, 아욱 씨를 뿌리며 시인은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텃밭에 뿌린 생명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아버지, 제가 비로소 아버지가 될 것 같습니다”라고 시인도 미소로 답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의 전문은 “시”라는 한 음절뿐입니다. 제목을 보고 무슨 말을 할까 싶어 귀를 열다가 “시”라는 한 마디에는 읽는 이들이 모두 웃고 말 것입니다.
김동찬 형. 이런 웃음들이 형의 오랜 이민생활의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물론 형의 시편에는 눈물도 있고 분노도 있고 서러움도 있습니다. 생이 나무라면 바람에 흔들리는 않는 나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형은 그런 바람이 사람을 꽃으로 만든다고, 지천명의 나이에 가까워져 이 아름다운 시편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봄눈을 녹이던 하얀 바람이 흰 수선화 향기를 날라줄 수 있을까.
저 여름나무의 이파리들이 팔랑팔랑 초록을 뿌릴 수 있었을까.

벌 나비도 길을 잃었을 테고
저 나무도 열매 맺지 못했을 거야.

꽃이 꽃일 수 있었을까
나무가 나무일 수 있었을까.
저 물가에 반짝이는 햇살들, 있었을까
무지개가 있었을까 있었을까.

아 만일 바람이 없다면
오십을 바라보는 내 가슴에도
흔들리는 물결이 없다면
내 향기를 너에게 전할 수 없다면
나는 꽃일 수 있었을까
나무일 수 있었을까

사람일 수 있었을까.
― 「바람이 없다면」 전문

김동찬 형. 시인은 시로 말한다고 형이 말했습니다. 형의 첫 시집에 담기는 시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는 일은 이제 이 시집을 만나는 독자들의 몫으로 돌리겠습니다.
나는 형의 시를 ‘마늘의 시학’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거대한 땅덩어리를 가진 아메리카에 모국어를 가지고 시를 쓰는 일은 마늘, 그것도 눈물을 흘리며 생마늘을 먹는 일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기름진 버터냄새 속에 스스로 독한 마늘 냄새를 풍기는 일일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풍겨내던
내 고향 친구 녀석의
마늘 냄새가
문득, 잃어버린 내 향기인가 싶은
아메리카의 저녁 한 때
도대체 무엇이 나를 끌고 다니며
이토록 지치게 만드는지
알고 싶어서
꼭 알고 싶어서
마늘 한 쪽을
눈물을 흘리면서 먹어 치웠다.
― 「마늘」 끝부분

‘코리언은 마늘 냄새가 지독해요’라고 말하는 아메리카에서 마늘 냄새는 형의 근원이며 또한 “지우개로 박박 문질러” 지우고 싶은 문신―코리언 바코드일 수 있습니다. 형은 그 마늘 냄새를 “잃어버린 내 향기인” 것을 알기에 “아메리카의 저녁 한 때” 눈물을 흘리며 마늘 한쪽을 먹고 있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자세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자신의 향기와 색깔로 말하는 것입니다. 형이 이 시집의 제목을 『봄날의 텃밭』으로 정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시민권자가 아니라 내 아버지의 아들이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형이 더욱 마늘 냄새나는 시와 만나길 부탁합니다. 한국과 미국 사이를 오가는 노매드(Nomad)가 아니라 자신이 사는 땅에 튼튼한 뿌리를 내린 ‘흰민들레’가 되길 바랍니다. 먼 이국에서 모국어로 시를 쓰는 사람은 모국어의 영토를 넓히는 개척자입니다. 그렇기에 형의 첫 시집은 형에게 가장 소중한 선물입니다.
아마 형의 부인도 만나면 아는 얼굴일 것입니다. 진해는 작은 도시였으니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다 알 수 있습니다. 형의 가족과 갈렙 선배의 가족과 우리 가족이 다 함께 만나는 날을 기대해봅니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 형은 인도와 히말라야를 여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히말라야 사람들의 인사말을 전합니다. 나모 나마스뚜. 내 안의 신이 당신에게 인사를 합니다.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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