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멈추는 곳-김춘식

2005.03.03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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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찬 시조 시집 <신문 읽어주는 예수> 해설


   기차가 멈추는 곳

                               김춘식
    
   누구나 숨길 수 없는 내면의 풍경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 풍경은 그가 살아온 기억과 미래의 운명이 하나의 상징으로 응축된 '충만한 현재'의 모습을 그에게 자각시킨다. 시인의 '시혼'이나 '시정신'에는 언제나 이런 '화두'로서의 '충만한 현재'의 모습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그가 살아갈 미래에 대한 예언적인 비전과 과거의 내력이 동시에 조우하는 지점에서 잠시 반짝이는 불꽃처럼 '근원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김동찬 시인의 경우 이런 '내면의 풍경'은 여러 편의 작품을 통해 상당히 빈번하게 노출되는 편이다. 특히 아래에 인용한 작품처럼 겨울의 벌판을 달려가는 기차의 열기와 차가운 쇳덩이의 질감, 그리고 뜨거운 기적 소리 뒤에 남는 눈발 아래의 한없는 적막감 등은 삶의 대립적인 두 차원을 인상 깊게 보여준다. 견인주의적인 인내와 고독, 안으로 삼킨 뜨거운 숨과 기적(汽笛), 온몸으로 울며 달려가는 벌판 등은 삶에 대한 열정과 가혹한 현실, 운명을 견디려는 강한 의지와 고독이 동시에 공존하는 하나의 장면을 연출한다. 모든 뜨거운 목소리가 눈으로 하얗게 덮이듯이 삶은 오직 사라져 버린 열정에 대한 적막 속의 추억과 고독으로만 남겨질 뿐이다.

왜 기차는 겨울 들판을 온몸으로 울고 갔을까
한낱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
눈썹 위 눈발 하나하나 시끄럽게 했을까

선명한 칼자국으로 오려내던 기적 소리
지나간 철길 위에 분분한 발자국을 끌고간 뒤
평행선 스쳐간 얼굴들 펑펑펑 눈이 내려

붙잡을 수 없었으리 천리 길을 달려와서
훗훗한 숨 몰아 쉬며 노을 속 사라진 기차
묻힌다, 뜨거운 목소리가 하얗게 덮인다

왜 기차는 겨울 들판을 얼어붙게 했을까
아직도 눈감으면 들려 오는 적막 속으로
혼자서 나만 혼자서 붉게 서게 했을까
-[기차가 남긴 겨울] 전문

한낱 쇠붙이에 지나지 않는 것의 '운명적인 모습'을 시인은 자신의 내면 속에 고스란히 담아 놓은 것이다. 천리 길을 달려가는 기차만큼 '인생'을 상징하는 적절한 대상이 또 있을 것인가. 열정으로 기차가 되어 멀리 달려가는 마음과 그 열정 뒤에 남겨질 이별과 고독, 적막, 그리움 등의 감정이 이 순간 '기차가 남겨 놓은 인생의 첫 번째 교훈이 된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무모한 열정과 뒤를 돌아보는 자의 고독한 시선이 어우러진 그런 착잡함이 김동찬 시인의 시적 정서에 깃들인 핵심적 요소임을 우리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내 기차는 달린다
베개에 귀를 대면
푸르른 기적소리
바람을 온 몸에 싣고 바다도 건너간다

언제나 덜컹대며 먼 곳으로 떠돌다가
이제는 간이역에서
쉬는 일이 많아졌다
이곳이 어디쯤인지 돌아보는 일도 잦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디로?
철로가 끊겨있다
부모님 세상 떠나니 모두 다시 아득하다
-[내 기차] 전문

[기차가 남긴 겨울]의 풍경이 그가 살아갈 인생에 대한 숙명적인 자기 암시를 보여준다면 위에 인용한 [내 기차]는 앞으로만 길게 뻗어 있는 선로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가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먼 곳으로 떠돌다가 간이역에서 쉬는 일이 많아진 것처럼, 미래가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뒤를 돌아보는 자의 시선이 그로 하여금 삶을 성찰하는 지혜를 새롭게 터득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이곳이 어디쯤인지 돌아보는 일"을 할 때가 되었다는 막연한 허무와 아득함이 그에게 새로운 '운명'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별과 고독과 절망과 열정을, 뜨거운 증기와 차가운 쇳덩이를, 한 몸에 지닌 채 오직 시간을 헤쳐 달려가는 주저 없는 기차의 질주가 아니라 자꾸 뒤를 돌아보며 속도를 줄이는 "덜컹대는" 기차의 모습이 그의 현재를 상징한다. 차가운 쇳덩이 안에 뜨거운 증기를 품은 기차가 젊은 시절 얼어붙은 겨울 벌판을 헤쳐나갈 "굳건함과 열정"을 지닌 상징물로서 시인의 내면 속에 수용되었다면, 이제 기차는 "덜컹이며", 목표도 없이 선로를 따라 달리는 인생 혹은 숙명의 상징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동찬 시인은 시간의 질주와 그 뒤에 남겨진 상처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시간이 바람같이 빠르단 말 알고 있니. / 그래 바람은 시간처럼 빠르지. / 네 아픔 상처까지도 바람처럼 지나갈 거야."([태풍의 말] 중에서)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시간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 일회적이고 치명적인 기억까지도 시간의 검은 터널 속으로 흘러가 버리게 만드는 '망각의 질주'다.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질주가 시간의 속성인 것처럼 "냉정한 인내와 뜨거운 열정"을 한 몸에 품는 순간, 그 사람은 시간의 질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김동찬 시인의 내면적인 풍경은 이런 '차고 뜨거운' 질주의 기억과 '지금, 여기서' 과거를 응시하는 자의 촉촉한 시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너를 향해 번득이는 / 총구의 어둠만큼 / 문득 꿈틀대는 / 그 살의, 붉은 그늘 / 한순간 / 나를 떠미는 / 그런 내가 무섭다"([그런 내가 무섭다] 중에서)라고 고백하는 시인의 말은 실제로 맹목적인 질주를 '근대적인 삶'으로 받아들인 그의 과거에 대한 회의다. '인간'으로 표현된 맹목적인 증오와 이기심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근대적인 삶'의 상징인 '기차'의 질주와 그 문명의 최후에 선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동일시한다. "나를 떠미는 / 그런 내가 무섭다"라는 구절은 시인이 품은 스스로의 욕망에 대한 두려움과 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관하려는 차량 행렬에 끼어 로즈힐 묘지에 갔다

천천히 천천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다 길목 어느 묘지 옆에 앉아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접는 의자를 펴고 앉아 무덤 속에 있는 아내를 위하여 신문을 읽어주는 머리가 하얗게 센 라티노 할아버지, 세상엔 우스운 일도 많아 전쟁과 테러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아웅다웅하고 있어 근데 햇살이 참 좋지? 곧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거야 그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을 것 같다 그 때 내 차의 라디오에서는 17살 테너가수 임형주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베∼∼ 마∼∼ 리∼∼ 아∼∼ 느리지만 싱그러운 햇살이 되어 건너간 묘지 앞 꽃병엔 장미가 붉다 할아버지 눈가에 순간 환한 웃음이 빛나고 나는 그 자리를 지나쳤다 장례행렬을 따라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지만 방금 본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죽음과 삶의 그 희미한 경계를 보여주던 그는 누구였을까 예수였을까 꿈이었을까

오는 길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조용하였다
-[신문 읽어주는 예수] 전문

이 점에서 이번 시집에 실린 작품의 대부분은 인용한 시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명상과 성찰이 중요한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면, [갈 데가 있을 텐데], [있을 때 잘 해], [초롱꽃], [축제], [낮달을 보다가], [데스밸리], [약속], [도레미 사진관], [불혹], [유치찬란] 등의 작품은 모두 삶과 죽음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무덤 속에 있는 아내를 위하여 신문을 읽어주는 노인을 보면서, 그리고 죽은 자들이 묻히는 묘지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참 좋은 햇살'과 '맑은 목소리', '붉은 장미와 환한 웃음'이다. 삶과 죽음의 희미한 경계란 사실 '평화'와 '휴식'으로 연결되는 그 순간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각할 때만이 삶은 "전쟁과 테러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아웅다웅"하는 어리석음과 미망으로부터 비로소 깨어나게 된다. 죽음을 곁에 두고 있을 때, 역설적으로 '좋은 햇살'과 '맑은 목소리', '붉은 장미와 환한 웃음'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차창 밖 내다보며 혼잣말하던 아버지
저 차들이 모두 다 갈 데가 있을 텐데……
황급히 제 갈 곳 향해 사라져 가는 바람

노을보다 빨리 달려 어둠으로 빠져드는
저 하늘이, 저 길이, 저 집들이, 저 차들이,
모두 다 갈 데가 있을 텐데……
아버지 가신 그 곳.
-[갈 데가 있을 텐데] 전문

'갈 데'로 표현된 그곳은 '삶의 최종적인 완성'인 죽음을 암시한다. 결국은 가야할 그곳을 의식함으로써 삶은 비로소 마지막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 노을이, 바람이, 차들이, 길이, 집들이, 하늘이 최후의 종착점을 발견하는 그 순간,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스스로의 의미를 얻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혼잣말'을 통해 시인이 배운 것은 이렇듯 '죽음'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마지막 '완성'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평범하지만 깊은 진리다.
실제로 "소나무, 단풍나무, 참나무, 오동나무…… / 촉촉하게, 푸르게 살아 있는 동안은 / 나-무라 불리우지 않는다. / 무슨무슨 나무일뿐이다. // (…중략…) // 나무는 죽어서 비로소 나-무가 된다. / 집이 되고, 책상이 되고, 목발이 되는 나-무. / 둥기둥 거문고 맑은 노래가 되는 나-무."([나-무] 중에서)라고 노래하는 시인의 통찰에는 '죽음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존재성'을 완성하는 사물과 모든 존재에 대한 자각이 잘 담겨 있다. 죽음을 친숙하게 곁에 두고자 하는 그의 태도는 '살아 있음'의 충만한 의미가 결국 '죽음'이라는 마지막 종착점을 선택하거나 만드는 일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자각의 결과이다.

이제는 없는 사람들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있을 때 잘 해'란 노래도 나왔겠지. 우리들 만나고 헤어지는 일들을 겪으며 노래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저렇게 내 마음을 대신해준 시가 있었던가. 우영이와 수연이 어린 남매를 두고 떠난 동원이 형, 홍콩에서 돌아오지 않은 동선이 형, 급성간염으로 별이 된 동기 형, 가버린 사람들아, 나에게 잘해줄 시간을 더 갖지 않고, 내가 잘할 시간을 주지 않고 떠난 사람들아. 또 내가 가는 걸 아직 보지 못한, 그래서 언젠가 가슴 아플 사람들아.

있을 때, 있을 때 잘 해.
먼지 같은 사랑아
-[있을 때 잘 해] 전문

김동찬 시인의 작품에 유난히 죽음을 응시하는 시선이 자주 드러나는 것은 인용한 작품에 나타나는 것처럼 어느 정도는 시인의 가족사에 대한 사적 기억의 결과다. "이제는 없는 사람들", '서로 잘해 줄 시간'을 넉넉히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 때문에 더욱 가슴이 아픈 시인에게 '삶'은 늘 아쉬움이고 결핍이고 아픔이었다.
그런 아쉬움과 결핍과 아픔을 견디는 방법이 뜨거운 질주와 시간의 망각을 받아들이는 삶의 여정이었다면, 이제는 그런 망각의 저편으로 밀어 넣으려고 했던 아픔과 상처와 고통이 오히려 그리워지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살아간다"는 또는 지금 "살아 있다"는 모든 의미를 증언해줄 유일한 증거는 과거로 밀려간 그 아픔과 상처 속에 오히려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나간 노래는 언제나 유치하다"고 시작되는 [유치찬란]이라는 작품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도 다 필요 없다 다만 그러나 다만 어딘가에 낙원이 있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던 그 눈부신 저녁시간 속 한번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이라는 '영원한 결핍'의 토로와 과거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기억은 그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를 비춰주는 유일한 신비이고 '아우라(후광)'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약간씩은 변태가 아닐까
부드럽고 은밀한 연인의 속살에
절대로 시들지 않는 꽃
그려 넣고 싶어하는

금강산 바위에 집채만한 글자나
우리들 가슴 한켠 새겨 넣은 詩句도
지구의 속살에 심은 사과나무쯤 아닐까
-[문신] 전문

기억에 대한,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덧없는 시간 속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의미의 근원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은, 그래서 무엇인가 어떤 의미를 세상에 남겨 놓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연인의 속살에 문신을 새겨 넣는 것처럼, 지구의 속살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고 싶은 그런 열망, 그것이 덧없는 시간 여행자인 인간이 자신의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가장 원초적인 '열망'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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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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