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지는 아빠

2009.09.02 05:31

이영숙 조회 수:668 추천:164



  남편은 키가 작다.  남들이 말하기를 나는 키가 크단다.  처녀 때부터 가끔 굽이 높은 구두 신는 것을 즐겨했다.  키가 작은 사람이 굽 높은 구두를 신는 것은 차라리 보기에 좋지 않고, 키 큰 사람이 높은 굽의 구두가 더 어울린다는 글을 어디서 읽고 난 후부터다.  
  남편은 나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내가 화장을 하던 하지 않던 간섭하지 않는다.  함께 회출 할 일이 있을 때 화장을 하지 않아도 “예쁜데 뭐”라 한다.  화장을 요란하게 해도 “좋아”라 하고.  화려한 옷을 입어도 “잘 어울려”라고 하고, 귀차니즘이 발동해서 대충 입고 나가도 “당신은 어떤 것도 어울리니 괜찮아”라 한다.  어떤 남편들은 머리를 잘랐다고 잔소리도 하고, 파마를 했다고 싫다고도 한다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남편은 그렇지 않다.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내가 하도록 맡겨두고 그저 다 좋단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외출할 때라던가, 어떤 모임에 갈 때 굽 높은 구두를 신는 것은 아주 싫어한다.  결혼 후부터 굽 높은 구두는 거의 버리고 굽이 낮은 구두로 모두 바꾸었다.  남편이 싫다는데 고집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  
  
  딸아이가 이 학년 때 우리가 미국에 왔다.  처음 미국에 와서 함께 지낸 부부가 있다.  우리와 딱 일주일 차이로 미국에 도착한 부부들이다.  몇 달간 함께 지내며 낮선 미국을 같이 헤쳐 나가고 알아 가는데 서로가 도움을 주고받으며 위로하고 격려하며 지낸 가족이다.  그 남편 집사님은 키가 큰 분이다.  한번은 딸아이가 그 남편집사님을 보고 “우리 아빠도 집사님만큼 커요.”라고 했다.  
  “네 아빠가 집사님만큼 큰지 어떤지 어떻게 아니?”라는 물음에 딸은 “집사님이 우리 엄마보다 크죠?  우리 아빠가 우리 엄마보다 크죠?  그러니 우리 아빠가 집사님만큼 크지요.”라 했다.  어른들이 함께 웃었다.  난 딸의 뒤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눈으로 말했고.  이 학년짜리 어린 딸에게 아빠는 언제나 큰 사람으로 보였다.  
  그 이 년쯤 후.  삼 학년을 마치는 여름방학에 여느 때처럼 아빠가 왔다.  한 달을 함께 지낸 후 아빠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 딸의 얼굴이 근심의 빛으로 가득했다.  어린것의 얼굴에 있는 수심이 어디로부터인지 몹시 궁금해 하는 나에게 딸이 그 가득한 근심을 비밀리에 털어놓았다.
  “엄마, 아빠가 자꾸 작아지고 있어요(Mom, Dad is getting shorter).”  
  딸의 눈에 늘 크게만 보이던 아빠가 딸이 자라고, 그럼으로 남들과 비교하게 되자 아빠가 작다는 것을 느꼈나보다.  그게 딸에게는 아빠가 작아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큰 금심이었을까.  
  “아니야, 아빠는 원래 작은 키였어.”라고 딸에게 사실을 자세히 이야기 했다.  믿어지지 않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딸에게 “네가 아빠를 크게 느낀 것뿐이었어.”라고 위로 했다.  말할 때 그 가득히 근심어린 모습이란.  지금도 가끔 이야기를 하고 딸과 함께 웃곤 한다.  

  실제 우리는 아빠들이 자꾸 작아지는 사회를 살고 있다.  어느 연구에 의하면 어린 초등학교 저학년들에게 ‘행복한 가족’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게 했다.  많은 아이들이 아빠를 제외한 엄마와 형제들만 그렸단다.  그나마 아빠를 그린 아이들의 아빠의 모습은 식구들 중 가장 작게 표현되었다고 한다.  어떤 아이는 온 가족을 앞장에 그리고 아빠를 뒷장에 그렸다지 아마.  요즘 가정에서 자꾸 작아지는 아빠들.  하루를 주로 엄마와 함께 보내는 아이들은 아빠의 모습이 그들의 뇌리에 잘 인식되지 않나보았다.  
  그런 아빠들은 특히 요즘 같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자꾸만 더 작아지고 있다.  아빠들의 목소리도 작아지고.  힘도 줄어들고.  가정에서 아빠의 자리가 갈수록 작아지는 현실이 참 마음 아프다.

  점점 작아져가는 아빠들을 좀 크게 만드는 엄마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엄마의 지혜가 가정에서 작아지는 아빠들을 크게 만들 수 있을 것이기에.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1 나답다 이영숙 2009.12.30 875
80 잃어버린 시간들 이영숙 2009.12.17 735
79 연습을 한다 이영숙 2009.11.28 753
78 나무와 조각가 이영숙 2009.11.17 770
77 보톡스 보다 이영숙 2009.11.05 787
76 달팽이 이영숙 2011.08.20 498
75 모진 책임 이영숙 2011.08.17 541
74 망령되이 이영숙 2009.10.03 909
73 행복하다 이영숙 2009.09.16 615
72 나는 초겨울이 싫다 이영숙 2009.09.08 717
» 작아지는 아빠 이영숙 2009.09.02 668
70 교통 티켓 받은 날 이영숙 2009.08.21 621
69 “손님,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이영숙 2009.09.21 807
68 다시 찾아야 할 것들 이영숙 2009.08.10 607
67 쓰레기통을 뒤진 날 아침 이영숙 2009.07.24 817
66 콜로라도 강변에 서서 이영숙 2009.07.20 567
65 딸의 첫 출근 이영숙 2009.07.08 653
64 나는 누구인가 이영숙 2009.06.25 721
63 평범에서 반란으로 이영숙 2009.06.09 607
62 이 등을 하다 이영숙 2009.06.04 648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1
어제:
1
전체:
40,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