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다

2009.09.16 09:07

이영숙 조회 수:615 추천:200



  차에 흠집을 냈다.  크게.  오늘 교회에서 낮 예배마치고 이런저런 모임이 많아 다른 날보다 훨씬 늦게 나왔다.  나오는 길에 주차장에 있는 기둥에 앞쪽을 세게 긁어 앞 범퍼가 떨어져 버렸다.  기둥들이 많아서 평소에 늘 조심을 한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기둥을 의식하지 못 했나 모르겠다.  뒤만 보고 옆 기둥은 생각도 않고 후진하며 오른쪽으로 틀다 엄청나게 차를 긁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으려면 정신이 없어진다고 누군가 말하더니만.  차를 들여다보니 가슴이 싸~아 하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이때에 차마저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울적하기까지 하다.  저것 고치려면 몇 백 달러는 수월찮게 들어가겠지.  내일 카센터에 가봐야겠다.  내일이 레이버데이여서 문을 열기나 할까?  수요일이면 아이가 개학을 하는데 혹시 그때까지 고쳐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까지 된다.  

  딸에게 미안하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딸은 요즘 햄버거 하나 사먹는 것도 아끼고 있다. 그런데 내 실수로 차를 망가트려서 돈이 들게 되어서다.  남편에게도 역시 미안하다.  속상해하지는 않을까.  어떻게 말해야 하지?  달러가 올라 안 그래도 힘든데 한국에서 돈 보내느라 퍽 힘들어 하고 있을 것인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니 무슨 큰 죄를 지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나 된 듯 마음이 착잡하다.

  저녁 내 우울한 마음으로 뒤숭숭해 하는 내게 딸이 다가왔다.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았다가 울적해 하는 엄마가 염려 되는지 자주 빠끔히 문을 열고 내다보더니 급기야 밖으로 나왔다.  위로한답시고 옆에 앉아 조잘조잘 거리던 딸이 문득, “엄마 우리는 부자는 아니지만 참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아왔어요.”라고 말했다.  행복?  이 상황에 갑자기 웬 생뚱맞은 소린가.  입은 다문 채 다 풀어진 눈으로 멍청히 바라보는 내게 딸의 말은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생각해보세요.  세상에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차 앞 범퍼 부셔져서 바꿔야 하는 걸로 이렇게 마음아파 해야 한다는 건 우리가 그동안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해보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만약 큰일을 당한 후라면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닐 테니까요.”
  정말 그렇다.  돌이켜 보니 우리가 살아오면서 진짜 아프고 힘들었던 일을 만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너무 안일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지 않았나 싶다.  다른 이들이 당하는 아픔들을 이야기 들어보면 참 가슴 아플 때가 많은데.  그런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온 그 날들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차 앞 범퍼가 부셔진 정도가 아니라 교통사고로 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 뿐인가 그로 인해 건강을 잃은 사람,  더욱이 가족을 읽은 사람까지 있지 않는가.  

  여유롭지 못하다 하더라도 행복했다.  온 가족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남편은 착실한 가장이다.  딸은 착하여 모든 이들에게 칭찬받는 아이다.  넉넉지 못한 살림이기는 하지만 있는 만큼만 쓰고, 없으면 굶는다는 생각으로 살아서 남에게 꾸러간 적 없다.  ‘간이 떨어’질 만큼 놀란 일도 있어보지 않았다.  이정도의 가벼운 사고도 미국에 와서 십 년 만에 두 번째 당한 일인 것을.  한 오륙 년 전 내가 좌회전 하다 직진하는 차와 가볍게 부딪친 것, 그리고 오늘인데.  그 정도면 정말 행복한 나날을 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차 앞 범퍼 떨어져 나간 것 하나로 마음 아파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너무 행복하게 살았다는 증거라는 딸의 말이 가슴깊이 고맙다.


9/6/2009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1 나답다 이영숙 2009.12.30 875
80 잃어버린 시간들 이영숙 2009.12.17 735
79 연습을 한다 이영숙 2009.11.28 753
78 나무와 조각가 이영숙 2009.11.17 770
77 보톡스 보다 이영숙 2009.11.05 787
76 달팽이 이영숙 2011.08.20 498
75 모진 책임 이영숙 2011.08.17 541
74 망령되이 이영숙 2009.10.03 909
» 행복하다 이영숙 2009.09.16 615
72 나는 초겨울이 싫다 이영숙 2009.09.08 717
71 작아지는 아빠 이영숙 2009.09.02 668
70 교통 티켓 받은 날 이영숙 2009.08.21 621
69 “손님, 죽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이영숙 2009.09.21 807
68 다시 찾아야 할 것들 이영숙 2009.08.10 607
67 쓰레기통을 뒤진 날 아침 이영숙 2009.07.24 817
66 콜로라도 강변에 서서 이영숙 2009.07.20 567
65 딸의 첫 출근 이영숙 2009.07.08 653
64 나는 누구인가 이영숙 2009.06.25 721
63 평범에서 반란으로 이영숙 2009.06.09 607
62 이 등을 하다 이영숙 2009.06.04 648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6.19

오늘:
1
어제:
1
전체:
40,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