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순이 언니

2009.07.24 07:21

이영숙 조회 수:478

공지영[-g-alstjstkfkd-j-]
  '봉순이 언니'는 화자인'나'의 어린 시절 집안의 '식모'로 있던 사람으로 많은 어려움과 아픔 속에서 '나'와 그 가족들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며 지내왔다.  그 봉순이 언니는 19살에 건달인 '세탁소 총각'을 만나 집을 나가 살다 많은 고생만 하고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어느 시골의 나이 많은 홀아비를 만나 결혼해서 재미나게 살아갔다.  그 홀아비의 죽음으로 아이만 하나 가지고 혼자가 되어 힘들어 한다.  세월이 흐르며 각각 아버지가 다른 4명의 자녀를 두고도 '개장수'와 눈이 맞아 떠나갔다는 소문을 '나'가 어른이 된 후에 듣게 된다.

  화자인 '나'가 처음으로 이사한 '아랫동네'에서 아이들과 놀고 싶었다.  집에 있는 언니, 오빠들의 몫인 케이크까지 다 내어주고도 밤이 늦어서 깜깜해질 때까지 오직 술래만 했다.  외로움과 울고 싶은 눈물을 참고 오기로 끝까지 버틴 대목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다.  나도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이 있었으니까.  오랫동안 술래만 해서 너무 속상했다.  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나중에 아무도 몰래 화장실에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집안에서의 외로움을 견디는 것보다 차라리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외로운 것이 더 났다고 생각한'나'.
  '나는 그래도 아직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곯려먹고 나면 이제 그치겠지' 의도적으로 아이들이 골탕을 먹이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이를 악 물고 참고 참으며 끝까지 견디어나간 부분이 나도 모르게 이를 악 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쩌면 그러한 희망은 어릴 때뿐 아니라 성인이 된 이 시점에서도 생각하여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이 아픔도, 이 슬픔도 조금만 더 지나면 끝이 나겠지.  이렇게나 나를 힘들게 하는 저도 조금만 더 곯려먹고 나면 끝이 나겠지.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없는 깜깜한 거리를 혼자서 술래를 하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킨,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었던'나'.  어쩌면 나의 모습과 닮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어두워져 주위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 술래를 하고 있는 '나'.  낮에 아이들과 놀 때와 다른, 어두움에 갇혀서 주위를 살펴보며 '같은 장소도 다른 시간이면 이토록 다를 수 있을까' 하는 느낌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가끔 같은 장소에서도 다른 시간대에서의 느낌을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었다.  같은 집인데도 부부가 싸우고 나면 다른 느낌이 드는 집안 분위기.  늘 같은 교회에서도 문제가 생기고 나면 느끼는 이질감 때문에 성도들이 교회를 옮겨가는 것.  함께 웃고 떠드는 이웃들 사이에서도 작은 문제로 인해 다른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상처받는 일 등.  똑같은 공간도 시간대에 따라 달리 느끼는 작가의 그 섬세함이 많이 공감이 갔다.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은 아픔 뒤에 오는, 뭔가 쥘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게다.  어쩌면 영 끝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으니까.  그 희망마저 없다면 어찌 살 가치가 있겠는가.  희망은 끈질긴 것이라고, 가슴의 눈물도 참고, 이를 악물고도 견뎌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 '나'는 바로 나이며 우리가 아닐까.  '때로 희망은 귀찮은 것이고, 수첩에 약속시간을 적듯이 구체적인 것이고,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듯이 구차하기까지 하다.'는 저자의 말에 긍정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봉순이 언니가 집을 나가고 대신하여 들어온 식모인 미경언니의 마음 아픈 모습.  집안의 많고 많은 좋은 것을 두고 아이들 옷만을, 그리고 쓰던 머리 방울을 훔쳐서 가지고 간 미경.  가서 집에 있는 동생들 입힌 그 마음 또한 가슴 저리게 하는 일이 아닌가.  가진 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가난한 자의 소중한 것들.  아무리 하찮아보여도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다 중요하고 귀중한 것이기에'결국 산다는 일에는 사소한 게 없다'라고 말하는 저자의 마음을 함께 느껴보기도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더 공감하는 이유는 그 어려웠던 삶의 모습들이 지나온 우리 60년대 사람들의 삶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고난이 오기 전에 아직 기도는 시작되지 않는다.' 고.  아픔이 기도를 하게 하는 것이라니.  좀 더 편안할 때도 기도할 줄 아는 그러한 사람이 되면 안 될까?  그러나 '절망이나 허망한 사람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에는 동의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절망 속에 있어도, 극도의 허망한 삶이 그를 에워싸도 자신이 책임져야하는 것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한다.  ‘책임’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꼭 지고가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 가를 아는 것'이라는 빌려온 말에도 가슴이 여며졌다.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때때로 상대의 아픔을 읽지도 못하고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일들이 얼마나 왕왕 있는 일인가.  진정한 사랑은 어떻게 사랑하는지 아는 것.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사랑을 하니 문제는 생긴다.
  결국 편안해지고 나면 아픔은 묻어버리고 싶은 마음.  '나'는 어릴 때 엄마처럼, 언니처럼, 보호자로써 함께 했던 언니.  아니 엄마가 없어도 괜찮았지만 '봉순이 언니'가 없으면 불안하고 안절부절 못했던 지난날들이었음에도 '봉순이 언니'의 너무 초라해진 모습에 고개 돌리고 만다.  자신의 성공 뒤에 만난 그 만남을 끝내 눈감고 돌아서야 했던가.  '아직도 버리지 않은 희망. 희망이라니, 끔직하게......'  '나'는 '봉순이 언니'의 초라해지고 더러워진 그 희망의 눈길을 매정하게 외면하였다.  그래, 그게 인간이고 삶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나고 너다.  세상이다.  슬프고 아프지만.

12/28/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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