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틀레야 향기

2007.10.16 09:46

이용애 조회 수:667 추천:72

                 캐틀레야(Cattleya) 향기
                                             이 용 애
    오늘 아침 출근하고나서부터 은은한 향기가 내 곁에서 감돈다. 주위를 둘러봐도 그럴 만한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 아침에 맡은 캐틀레야 향기가 코끝에 묻어 온 것일까? 아니, 내 상상 속으로 따라온 향기일까? 은은한 꽃향기가 가까이 있으니 아침 내 상쾌하고 들 뜬 기분이다.
    며칠 전, 뜻하지 않게 우리 집에 작은 즐거움이 찾아 왔다. 오랫동안 잎만 무성한 채 꽃을 피울 줄 모르던 양란이, 그 우아하고 향기로운 꽃을 드디어 터뜨린 것이다.
    막, 새벽 산책에서 돌아오는 내눈에 활짝 핀 두 송이의 꽃이 들어왔다. 나는 처음 꽃을 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었구나! 하고 탄성을 연발했다. 그 꽃은 마치 아기 천사가 날개를 펴고, 막 날아오르려는 것 같은 청순한 모습으로 보였다.
    칠 년 여전 아들아이가 하와이 여행길에, 엄지손가락 만한 양란 싹 하나를 가져왔다. 화분에 심어 방안 남쪽 창가에 있는 양란 옆에 놓고 똑같이 물주고 거름을 줬다. 줄기는 없이 뿌리에서 벌브가 나와 가늘고 긴 잎이 한 뼘이 넘게 자랐다. 그런데 이삼년이 지나도 꽃이 피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물과 거름을 부지런히 주면서 내 의무는 다 한양, 꽃 안 핀다고 불평만 했다. 나중엔 기다리다 지쳐 꽃을 포기하다시피 관심이 점점 엷어져 갔다.
    그렇게 이삼년이 더 지나고 재작년 봄, 동네 화원에 다른 일로 갔다가 잎 모양이 우리 것과 비슷한 양란에 예쁜 꽃이 핀 것을 발견했다. 주인에게 내 사정을 얘기했더니 햇빛을 더 쪼여 줘 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좀더 햇빛을 받을 수 있도록 자리를 옮기고, 빛 가리개도 더 열어 놓았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도, 혹시나 하고 들여다보는 나를 번 번히 실망만 시켰다.
    일 주일 전쯤 일 이었다. 방안의 화초를 정리하면서, 늘 자리만 차지하고 꽃 필 줄 모르는 그 화분을 드디어 치우기로 하고 들고 나가는데, 잎이 무성한 한쪽 끝에, 갸름한 연녹색 봉오리 한 개가 솟아 있지 않은가!    '이게 웬 일이지? 하마터면 버릴 번했잖아!  나는 반가움과 미안한 마음으로 얼른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는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지날 적마다 들여다보았다. 만일 며칠 전에 치웠더라면 봉오리가 생기지 않았을 테니, 틀림없이 버렸을 게다. 얼마나 다행한 때맞춤인가!
    그로부터 사흘만에 한 개의 봉오리에서 두 송이의 아름다운 꽃이 터져 나왔다. 조그만 하얀 꽃잎 셋을 밭침으로 깔고, 갓난아기 손바닥만한 하얀 꽃잎 둘이 가장 이에 분홍색을 살짝 띄우고 위로 펴졌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아래쪽 꽃잎은, 위 부분 반은 흰색이고 안에 씨방이 노르스름하게 자리를 잡았다. 아래 부분 반은 아주 진한 분홍색으로 흰색과 대조를 이뤄, 마음을 끌어들이는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양란으론 집에서 피는 홸레놉시스(Phalaenopsis)만 보아 온 내 눈엔, 참 황홀해 보였다.
    처음엔 몰랐는데 방안에 향기가 은은하게 돌았다. 가까이 에서 맡아보니 그 꽃에서 나는 향기였다.   '아니 양란에도 향기가 있나?  신기했다. 양란 꽃이 예쁘고 오래 펴 있어서 좋아하면서도, 향기가 없는 것이 늘 아쉬웠다. 그런데 캐틀레야는 아름다움에 향까지 갖췄으니 금상 첨화라는 말이 꼭 어울릴 것 같다.
    꽃이 핀 후에야 이름이 캐틀레야인 것을 알아냈다. 캐틀레야 중에 어떤 품종은 양란 중에서 드물게 향이 있다고 한다. 햇빛을 많이 받아야 하고 봄부터 초가을까지, 밖에 두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몇 년 동안을 다른 양란과 똑같이 충분하지 못한 햇빛 아래 방안에만 가두어 두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무지하고 미련한 주인을 만나 힘들게 허송세월 한 캐틀레야가 참 가엾다. 그리고 좀더  제대로 돌봐 주지 못한 게, 시간이 없어서라는 이유만 내세우기에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새로 핀 조그만 캐틀레야 꽃을 보며, 나는 요즘 나의 지난 일들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아이들을 키울 때, 각기 다른 개성의 아이들을 똑같은 틀에 맞춰 키우려 하지나 않았는지, 그로 인해 맞지 않는 햇빛과 물, 거름으로 아이들이 힘들지나 않았는지! 돌이킬 수 없는 뉘우침이 클 뿐이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각 나무에 맞는 물과 햇빛, 걸음에 마음을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 <글마루 >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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