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그 영원히 살아있는 도시에서

2007.11.17 02:20

이용애 조회 수:692 추천:75

           로마 그 영원히 살아있는 도시에서
                                                  
                                                 이 용 애
    화창한 오월의 첫날 아침이다. 오늘은 이번 서유럽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로마를 관광 할 차례다.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서 숙소를 출발했다.
    일행 스물 일곱 명을 태운 버스가 20여분만에 로마 북서쪽에 위치한 지하 공동묘지‘카타쿰베’에 도착했다. 로마에는 이와 같은 '카타쿰베’가 여러 곳에 있으며 그 길이는 수백km.에 달한다고한다. 기원전에 서민들이 거처로 사용하던 이 지하 굴은 지층이 특이해서 손으로도 팔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흙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단 파 놓으면 단단하게 굳고 습기도 없어 들어갔을 때 전혀 습한 냄새가 없었다.  기원전 그 곳에 살던 서민들은 가족이 죽으면 살고 있는 거처의 벽을 서랍 모양으로 파내고 시신을 넣은 후 그 입구를 막아 놓았다.
    기원 후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받을 때 이 곳을 피난처로 삼았다. 내부의 굴이 미로와 같이 끝없이 이어져 있어, 로마 군병들이 찾으러 들어왔다가 횃불이 다 타고나면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죽었다고 한다. 지하 교회도 이 곳에서 이루어졌으며 기독교인들은 삼 백 년간을 박해가 있을 때마다 이 곳으로 숨어들곤 했다. 어쩌면 이 곳은 하나님이 기독교인을 위해 미리 예비 해 놓으신 곳이 아닐까?  이년 전 일본 여자 관광객 두 명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사망한 후론, 관광객이 돌아볼 길만 남기고 철망으로 곳곳을 막아 놓았다. 기원전에 판 굴이 어떻게 이토록 잘 보존되었는지!
    다음은 기원전 80년에 완성된 고대 로마의 대표적 유적지‘콜로쎄오’(콜로세움)로 향했다. 관중 오만 오천 명을 수용 할 수 있었던 원형 경기장이었으며 노예, 죄수, 범법자를 훈련시켜 검투를 벌리게 하고, 지는 쪽은 목숨을 잃는 잔인한 경기를 벌리던 곳이다. 경기장 지하에는 검투사의 기숙사, 훈련장 등이 있었다가 지진으로 복개했던 층이 허물어졌고 관중석도 거의 무너졌다. 이 경기장은 후에 기독교인을 박해 할 때 맹수를 가두어 놓고 그 곳에 잡혀 온 기독교인들을 몰아 넣었던 곳이다. 그들이 쫓기고 찢기다가 죽어 가는 것을 보며 관중석에서 열광했던 그들의 환성이 들리는 듯한‘콜로쎄오’! 그러나 로마제국의 영화와 상처를 간직한 그 곳엔 이제 잡초와 들고양이만이 눈에 띄일 뿐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 왔다. 삼 천년의 역사를 가진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도시라는 말을 이번 여행에서 실감하게 됐다. 이미 런던의 ‘대영 박물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하며 그들의 예술품과 세계 각처에서 모아들인 소장품을 보고 난 후이고,‘노틀담’사원같이 빼어난 건축물을 보며 감탄했었다. 또한 패션 중심지 밀라노, 유서 깊은 수상 도시 베네치아(베니스)와 르네상스의 꽃이라 불리는 피렌체(풀로렌스)를 들러 보고 그들의 찬란한 문화를 접하며 로마로 들어온 터였다. 그러나 로마는 그 어느 도시보다도 웅대하고 다양하며 위대한 문화 유적으로 가득한 도시로서 방문객을 감동시키고 있었다. 이 도시는 처음엔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자리를 잡았고, 기독교를 박해한 제국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후에 기독교의 중심지로서 서양의 어느 도시와도 비교될 수 없는 기독교 문화의 꽃을 피운 도시이다. ‘율리우스2세’나 ‘레오10세’같은  위대한 교황들은 로마의 르네상스를 이룩했으며 그후 바로크 시대에는 물론이고, 그 전후에 수많은 명장들에 의해 불후의 명작과 건축물이 탄생했다.  
    바로 얼마 전부터 시 당국은 이 도시를 공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관광버스를 시내에 들어오지 못하게 조치 해, 외곽 지역부터 전철을 이용해서 시내로 들어 와 걷거나 택시, 아니면 마차를 이용해야 한다. 전철로 시내로 들어온 우리는 먼저 베드로 대성당으로 향했다. 매 25년 희년에만 열리는 성당의 우측 문 앞에서 “여러분은 이문을 통과하므로 이제 천국행은 따 놓으신 겁니다”라는  즐거운 농담을 들으며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 신자가 된 후, 1506년 ‘브라만테’에 의해 시작된 공사는 ‘라파엘’을 거쳐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졌고, 1626년 바로크 양식의 귀재 ‘베르니니’가 정면을 재 건축하게 되며 120년만에 완성되었다. 성전의 길이는 210m 돔의 높이는 136m나 된다. 성당 안에 들어서자 그 크기의 웅장함과 그 대단한 높이에 우선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 하나의 조각품, 그림, 웅대한 원추 기둥, 무엇 하나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사람들이 왜 베드로 대성당을 보고 싶어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서명이 유일하게 새겨진 ‘피에타’(비탄)와 성 ‘베드로’의 청동 상에 특히 마음이 끌렸다. ‘메켈란젤로’가 젊었을 때 제작한, 돌아가신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비탄’, 이 작품 앞에 선 내 가슴으로 성모 마리아의 숭고한 고통이 아프게 밀려왔다. ‘미켈란젤로’가 ‘피에타’를 완성한 후 사람들에게 자기 작품임을 알리고 싶어서, 밤에 들어가 이름을 새겨 넣고 나오다가 밤하늘을 쳐다보니 하나님의 창조품들에선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이 심히 부끄러워진 그는 다시는 자기 작품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는 안내원의 설명이 여운을 남겼다.
   ‘성 베드로’ 광장은 균형 잡힌 240m 폭의 광대한 타원형이며 ‘베르니니’가 세운, 네 줄로 도열된 244개의 도리아 식 웅장한 원주는 그 위에 140분의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조각이 서 있었다. 전면 양옆의 거대한 분수가 있고, 중앙엔 1586년에 세운 ‘오벨리스크’ 탑이 있다. 탑 위에는 예수님 십자가의 일부가 보전되어 있다고 한다. 까마득히 높은 탑 위를 올려다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생각나 숙연한 마음이 되었다. 밖에서 본 성 베드로 광장 또한 잘 짜여진 웅대한 모습이었으며, 특히 양쪽으로 늘어선 네 줄의 원주 회랑은 대 성당을 소중하게 감싸는 듯 인상적이었다.  
    전 일정을 걷기엔 힘에 벅차, 여기서부터는 여섯 대의 마차에 분승해서 옛 귀족이라도 된 기분으로,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시내 곳곳을 돌며 관람했다. 마부는 골목이 바뀔 때마다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한다. 그의 이태리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 건축물들의 웅장함,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었다. 명소를 지날 때마다 마차에서 내려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돌아본 중 가장 관심이 끌린 곳은 ‘판테온’이다. ‘미켈란젤로’가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는 ‘판테온’! 기원전 120년에 모든 신들의 신전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기원 2세기에 재건되었다.
   ‘판테온’은 고대 로마 건축물 중 가장 훌륭한 걸작으로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었으며, 609년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 되었다고 한다. 지름 43.30m의 돔을 6m 두께의 원통형 벽이 바쳐 주는 이 신전이, 기원전에 세워졌다는 말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또한 철근을 하나도 쓰지 않은 돔이 지진에도 끄덕 없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돔 위로는 직경 9m 의 천장이  뚫어져 있어 이 곳으로 빛이 들어온다.
    현지 한국인 안내원은 훌륭한 건축물과 예술 작품을 소개 할 때마다, “이 건축물이 세워졌던 때는 우리 나라는 어느 왕 때이고, 그 당시엔 어떤 당파 싸움으로 나라가 어지러웠던 때”라고 부연을 붙여 설명을 하곤 했다. 지질이 못난 우리 조상에 대한, 그 젊은이의 날카로운 질책이 낮으막한 소리로 가슴을 찌른다. 조상을 잘 둔덕에 허리를 펴고 사는 이태리인들, ‘베네치아’의 곤돌라를 노 젓는 체격 좋은 젊은이, 그 곁에서 이태리 민요와 가곡을 유창하게 부르던 은퇴한 성악가의 여유 있는 미소, 로마 거리를 관광객을 태우고 유유자적 마차를 모는 마부들, 그들은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안고 살까?  아니면 날만 새면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조용한 분위기를 잃었다고 조상을 원망할까?
우리 나라 불교 문화에 대해서 긍지를 가지고 있던 내가 아는 불교 신도는, 로마를 다녀온 후 우리의 전통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무너져, 우리 나라가 외국인에게 보여줄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개탄을 했다고 한다. 그 친지의 말과 젊은 안내원이 부연하던 말이, 왜 자꾸 내 귓전에서 맴도는 것일까?
     로마는 기독교인들의 박해받은 지우지 못할 흔적을 한편에 간직한 도시이다. 또한 기독교로 인해 화려하게 꽃피었던 도시가 그대로 잘 보존된, 기독교의 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로마는 아니 이태리는,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하신 곳이 아니었을까?  빼어난 예술의 명장을 하나 둘이 아니고 수도 없이 많이 그 시기에 나게 하셨고, 그들을 뒷받침 할 양식 있고 재력 있는 수많은 후원자들과 군주들, 교황들도  함께 했으므로 그 같은 찬란한 문화가 이루어 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방대한 유적지를 우리 속담을 빌린다면‘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 식으로 훑어보았으니 정말 ‘로마’를 돌아본 것이 아닌 꿈속에서 다녀 본 느낌이다. 그래도 로마를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고, 잠시나마 그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한다. 우리가 갔을 때가 그 곳 노동절 휴일이어서 열리지 않은 ‘바티칸 시국’과  박물관을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그 곳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다시 오고 싶은 마음이다. 그 때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차근차근 돌아보고 싶다.
     아쉬움은 희망 사항으로 소중히 접어들고 이튿날 아침 ’다빈치’공항으로 향했다.

                          

                      <글마루>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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