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말리는 여자

2002.12.21 14:14

이용우 조회 수:1659 추천:116

<하이에나> 라는 이름의 꽃다발 앞에서 성우는 걸음을 멈추었다. 몇줄 건너편에서 본 어린왕자와 코알라를 대하고 지었던 미소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름이 그래서 그런지 뭔가 서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꽃들과는 다르게 마구 헝클어지고 부스스 했다. 바짝 마른 꽃들이라 어차피 본래의 색이 바래고 형태도 오싹 쪼그라들었다지만 그 꽃 하이에나는 정도가 심했다. 자세히 보니 스무 송이쯤의 꽃대공이 절반도 넘게 모가지가 잘려나가고 없었다. 그것도 무슨 가위나 칼따위로 곱게 자른 모양이 아니다.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확 쥐어뜯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정도로 지독한 학대를 당한 모습이었다. 마치 지오그라픽 필림속의 숫사자에게 쫒기는 늙은 하이에나처럼 흉측하고 더러운 몰골이었다.
성우는 웅크렸던 어깨를 펴며 하이에나로부터 두어걸음 뒤로 물러섰다. 천천히 몸을 돌리며 그제서야 찬찬한 눈으로 리빙룸을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성우를 맞아들이던 헬렌이 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자리를 뜨고, 넓은 리빙룸에 혼자 남은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띄인 것이 바로 벽 하나를 가득 메운 그 꽃들이었다. 처음엔 그게 말린 꽃이란걸 알아보지 못해, 저게 뭔가 하고 눈살을 모았었다. 형걸이 몇번이나 꽃에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가 비로서 납득이 되었다.
마른 꽃다발은대략 열 대여섯 개쯤 되었다. 그 중 안개꽃에 둘러싸인 노란장미와 보라색의 댄드로비움만 화병에 꽂혀 있고, 나머지는 모두 벽에 걸려 있었다. 그렇게 벽에 걸린 꽃들은 어느 것은 바로 섰고, 어떤 것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바로 건 것과 거꾸로 매어단 것에도 무슨 이유가 있는걸까. 허긴 꽃의 형태를 망가뜨리지 않고 말리려면 어느 꽃이든 처음에는 거꾸로 달아놓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건조가 끝난 후에나 바로 걸던 꽃병에 꽂던 했을 터였다. 화병에 꽂힌 댄드로비움과 몇 가닥의 갈대, 꽃망울이 말라붙은 버들강아지 한 웅큼을 제외하고는 거의 안개꽃이거나 장미, 또는 그 두가지를 섞은 것이었다. 안개꽃이나 장미가 말리기에 수월했던가 아니면 사람들의 취향이 비슷하던가 그런 모양이었다.
꽃 이름이 동물이나 생물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였다. 그녀, 헬렌만 아는 것일테지만 <등대지기> <겨울, 산타바바라> 따위 낭만적인 이름도 있고, <생일 92>< 동창회 86> 같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있었다. 특별히 꼬리표를 붙인 것이 아니라, 그냥 꽃다발을 묶은 리본 자락이나 포장지 위에 매직펜으로 이름을 써넣었다. 어떤 것은 작고 예쁘게, 어느 이름은 정성을 다한 듯 그림같이 멋들어졌다.
그런데 하이에나, 그 것만은 찢어젖힌 포장지 위에 거친 필체로 목을 매고 있었다. 특히 마지막 글자 '나' 는 그것을 쓸때의 심사가 어떠했는지, ㅏ의 꼬리가 한쪽으로 획 꼬여 있었다.

[야, 우리 마누라가 그러는데, 그 헬렌이라는 여자만 꽉잡으면 넌 홀라이프 인슈런스 든거나 마찬가지래. 네 평생은 아스팔트가 좍 깔린다더라. 어때, 한번 대들어 볼끼여?]
형걸이 헬렌에 대해 설명할 때의 첫 마디가 그랬다. 그리고 한 주일후, 형걸의 세탁소가 위치한 멜로즈가의 샤핑몰 커피샵에서 성우는 처음으로 헬렌을 소개 받았다. 첫 인상이 화려했다. 자신감의 표출인지 빈틈이 없으면서도 활달 했다. 가끔 찌르듯 쏘아오는 시선이 너무 날카롭다는 느낌 외에는 특별히 모나는 점도 없었다. 그날 커피 한잔씩을 마시고 헤어져 세탁소로 돌아온 형걸은 듣는 사람도 없는데 목소리 톤을팍 죽이더니 비밀처럼 말했다.
[아무 것도 필요 없어. 꽃 하나만 신경쓰면 된다더라. 그러면 네 앞날은 그야말로 꽃밭 위의 피크닠이다.]
[꽃?]
[그래, 훌라워. 마누라가 그러는데 집안이 온통 꽃으로 도배를 했다더라. 이상하게 볼것도 없어. 여자 나이 서른 일곱은 사춘기가 따따불아니냐. 거기다 헬렌은 패션디자이너잖아, 섬세하고 정중 해야 돼. 너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라고 마누라가 신신 당부 하더라. 그녀가 우리 교회 성가대 지휘자라는 것도 명심하고. 그리고 꽃 알지? 이거 말이야, 이거. 돈훠겟 훌라워, 오케이?]
형걸은 바구니에서 꽃무늬 팬티 하나를 집어 흔들며 끽끽 웃었다. 그렇게 형걸 내외의 적극적인 지원과 훈수를 받으며 시쟉한 헬렌과의 만남이 6개월을 넘어 섰다. 그리고 오늘, 성우는 드디어 헐리웃 언덕위에 있는 그녀의 집에 초대를 받은 것이다.
-헬렌이 널 자기 집으로 초대하면 그 날부터 공식 심사에 착수하겠다, 그런 소린거야. 형걸은 헬렌을 언급하는 끝이면 언제나 후렴처럼 그렇게 말했었다. 그 날이 온 것이다. 형걸의 감언처럼 성공한 여자에 빌붙어 살겠다는 구차한 야욕에서가 아니라, 제발 장가좀 가라는 누이의 성화를 잠재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성사의 선택권은 오직 헬렌에게 만 있는양 이래라, 저래라 하는 형걸의 잔소리에 배알이 뒤틀리기도 했지만 성우는 그 때마다 찌그린 매부의 얼굴을 떠올리며 꾹꾹 참았던 것이다.

어디로부턴가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위층으로 올라간 헬렌은 종내 내려 올줄을 몰랐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이 방 저 방을 옮겨 다니는 발자국 소리와 서랍같은 것을 여닫는 분주한 음향이 그녀가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할 뿐이었다.
벽으로부터 시선을 거둔 성우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자신의 꽃다발을 내려다 보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꽃송이가 굵고 탐스럽다 뿐, 별수없이 안개꽃에 둘러싸인 여느 장미에 불과했다. 화원에서 그것을 찾아 들때만 해도 퍽 괜찮다 싶었는데, 헬렌의 꽃무덤에 들어오니 금시라도 고들고들 말라버릴 것처럼 빛이 죽어 보였다. 더구나 그것이 거꾸로 매달려 바짝 말랐을 때의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니 벽에 걸린 어느 꽃보다도 초라할 것 만같았다. 혹 일이 잘못되어 <들개>나 <늑대>라는 이름표를 달고 확 쥐어뜯기는 신세라도 된다면...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들자 성우는 자신도 모르게 으스스 어깨가 떨려왔다.
나는 무엇일까? 동물일까 생물일까. 아니면 어느 바다나 산자락으로 명명 되는 건 아닐까. 아, 아니다. 어쩌면 세탁소나 다리미 따위로 이름 붙을지도 모른다. 성우는 팔장을 껴붙이며 후, 하고 모두었던 호흡을 내벹았다. 다시금 벽위의 마른 꽃들을 일별 했다. 생각을 그렇게 해서 그런지 마른 꽃다발 하나하나가 전부 모양 다른 도깨비 만 같아 보였다.
오늘부터 시작된다는 정식 심사라는 건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 내가 과연 저들과 구별되어 형걸의 말처럼 꽃밭 위의 피크닠을 즐길 수 있을까. 저 차거운 벽에 말라비틀어진 추억으로 걸리지 않고, 빛나는 승리를 쟁취하여 홀라이프 인슈런스를 향유할 수 있을까.
성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하이에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귀여운 코알라와 어린왕자까지 떠나갔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평없이 적응하는 코알라, 지구로부터 십억년 떨어진 별에까지 바오밥 나무를 심는 어린왕자, 여기는 그들까지도 떠나간 박토다. 생명 있는 것은 물론, 무생물조차도 바짝 말라버리는 땅이다.
가자, 매부의 찌그린 얼굴과 누이의 성화를 견디며라도 풀 한 포기 아니, 개미 한 마리라도 살수 있는 땅을 찾아 보리라. 성우는 이미 시들어 가고 있는 자신의 꽃다발을 결연히 집어들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머, 성우씨! 어디가세요?]
출입구를 향해 막 돌아 선 그의 등 뒤로 헬렌의 높은 음성이 가쁘게 달려왔다. 그가 돌아 보니 셀룰라폰을 손에 든 헬렌이 계단 중간쯤에 놀란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 그런 그녀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는 시선을 성우의 손에 들려 진 꽃다발에 못박고 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세우며 어깨를 폈다.
[개미 나라로 갑니다. 잡목 우거진 숲속, 목 잘린 하이에나가 쉬는 땅, 개으름뱅이 코알라가 낮잠 자는 나무 밑을 찾아 갑니다.]
바이, 마치 그렇게 말 하듯, 성우는 헬렌을 향해 꽃다발 쥔 오른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ㅡ 끝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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