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 스트릿

2008.12.06 15:13

이용우 조회 수:1949 추천:122

도넛 가게의 문이 열리며 먼저 준태형의 목발이 삐죽 나온다. 이어 성한 왼쪽 다리가 나오고 휘청하며 튕겨오르는 몸체를 따라 마비된 오른쪽 다리가 끌려나왔다. 그런 준태형의 뒤를 언제나처럼 빈 파이프를 귀입술에 문 흑인영감 죠지가 슬렁슬렁 붙어 서 있다. 인도로 내려선 준태형은 흘러내린 바지춤을 한차례 추스려올리고는 ‘헤븐스트릿’ 싸인이 걸린 신호등 기둥에 어깨를 기댄다. 주머니가 여러개 달린 야전점퍼가 어깨를 기댄쪽으로 쏠리며 축처져 내린다. 목발을 짚은 오른쪽 점퍼의 밑주머니엔 무엇이 들었는지 언제나 배가 불룩하다. 초여름의 캘리포니아 햇살이 제법 따가울탠데 준태형은 두터운 야전점퍼를 벗을 생각이 없나보았다. 준태형은 아주 먼곳이나 되는 듯 길 하나 건너 인 마켓쪽을 향해 멍한 시선을 건네온다.  
오늘은 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왔을까. 준호는 보도블럭을 파고들기라도 할 듯 견고히 버티고 선 형의 목발을 건너다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머리를 박박 밀고 몸에 문신을 새긴 사람만 보면 나이와 인종을 가리지 않고 미친 듯 목발을 휘둘러대는 준태형의 광기가 눈 앞을 스쳐갔다. 슬몃 시선을 돌려 보니 스킨헤드는 와인 한 병을 집어든체 잡지 진열대 앞에 서서 머슬러를 뒤적거리고 있다. 양팔뚝을 타고오른 두 마리 용이 어깨에 걸친 탱크탑의 솔기에 잠깐 숨었다가 등뼈가 툭 불거진 뒷목에서 만나 혀를 날름댄다. 박박 민 뒤통수 한복판에도 ‘jx' 라는 뜻모를 이니셜이 선명하게 타투 되어 있다. 근육이 툭툭 불거진 팔뚝에 컬러풀하게 꿈틀대는 용문신과 반들반들 밀어버린 검은 두상은 난폭하고 위압적인 모습을 흉기처럼 드러내고 있다. 이 동네로 이사를 온 건지 10여일전부터 하루 두 세차례씩 나타나서 어슬렁거리다 가곤 한다. 남미계나 흑인들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고는 예외없이 맥주를 마시는데 스킨헤드는 별나게도 올때마다 와인병을 들고 나선다.    
스킨헤드야, 제발 나가라. 준태형이 들어오기전에. 플리즈, 플리즈... 준호는 애타는 가슴으로 그렇게 빌었다. 캐시박스에 앉아 있는 브라이언도 준호의 마음을 읽었는지 입술을 꽉 닫은체 스킨헤드에게 던진 시선에 날을 세우고 있었다. 마누엘은 창고에라도 갔는지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녹색 신호를 받은 준태형이 목발을 앞세워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오기 시작 했다. 몸체를 따라 끌려오는 오른쪽 다리의 뒤틀림으로해서 매 걸음 마다 목발을 집지 않은 왼쪽 어깨를 과도하게 내밀어야하는 동작때문에 준태형의 보행 속도는 몸의 움직임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느리다. 횡단보도의 양쪽 방향에 멈추어선 차량들은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준태형의 보행을 지켜보기라도 하듯 질서정연하게 늘어 서 있다. 죠지영감은 준태형을 보좌라도 하는 양 늘어선 차들을 향해 힐끔힐끔 경고의 눈길을 던지며 흑인 특유의 건들 걸음으로 따라왔다.
익스큐스 미.
뭐야? 돌아보는 스킨헤드의 부리부리한 눈길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직접 맞닥뜨린 스킨헤드의 시선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다. 번들거리는 검은 피부 안에서
허옇게 빛을 뿜는 안광은 정면에서 겨누어지는 총구처럼 커다랗게 원심을 키우고 있었다.
캔아이 헬프유?
내가 뭘좀 도와드릴까요, 하고 준호는 짐짓 따스한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스킨헤드는 준호의 말에 풀석 헛웃음을 터뜨렸다. 친절이 지나치군. 귀찮게 굴지마. 그런 표정이었다. 노 땡큐, 그르렁거리는 쉰목소리를 알아듣지도 못하게 내뱉은 스킨헤드는 내던지듯 와인 값을 지불하곤 휑하니 나가버렸다. 준호는 가쁜숨을 후우 내쉬었다. 모양이 사납긴했지만 준태형이 들어오기 전에 스킨헤드를 마켓으로부터 내보낸 것은 어쨌든 잘한 일이었다. 스킨헤드가 사라진 문으로 하교 시간을 맞은 대여섯명의 하이스쿨 학생들이 우루루 밀려 들어왔다. 준태형과 죠지영감도 횡단보도를 건너던 모습대로 가게 문을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내든 준태형은 캐시박스를 돌아 쪽방으로 들어 간다. 준태형은 한시간, 길면 두시간쯤 그 쪽방에서 맥주거품과 죠지영감을 상대로 이 사우스엘에이의 냄새를 흠향한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짚어 한인타운 외곽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 간다. 준태형은 그 썰렁한 아파트에서 목발에 의지 한체 마켓을 닫고 돌아오는 동생을 위해 저녁 밥을 짓는다.    

까브론, 삔치 마드레!
퍽큐, 싼아버비치, 겟아웃 히얼!
화장실 옆의 냉동창고 속으로부터 핏대를 세운 욕지거리가 쏟아져 나왔다. 브라이언과 마누엘이 또 싸움을 벌리는 모양이었다. 오전 9시에 일을 시작하는 브라이언과 오후 2시부터 작업에 들어가는 마누엘이 같이 있는 시간은 고작 2시간에 불과하다. 그 짧은 만남에 걸핏하면 부딪쳐서 악을 쓰기 일쑤였다. 시비의 발단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웃음이 날정도로 유치한 것들로 해서 누가 먼저랄 것도없이 욕설을 주고 받는다. 캐시레지스터를 맡고 있는 브라이언이 스탁 정리를 하는 마누엘을 의식적으로 깔보는 것이 그 둘의 저변에 고인 앙금이었다. 케시박스 안에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나와 박스보이인 너와는 격이 다르다 하는 것이 브라이언의 오만이었다. 그러나 더 밑바닥으로 내려가면 흑인과 히스패닉이라는 인종의 두터운 벽이 문제의 핵으로 자리잡고 있다. 웃어운 것은 둘이 말싸움을 시작하면 서로 상대방의 언어로 욕을 하는 것이었다. 히스패닉인 마누엘은 영어로, 흑인인 브라이언은 스패니쉬로 욕을 한다. 다른 말은 모두 영어로 하면서 욕지거리 만은 그렇게 상대의 언어로 한다. 아마도 저편의 언어로 욕하는 것이 상대방을 약올리는데 더욱 효과적이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준호는 둘의 싸움에 언제나 방관적이다. 처음엔 말리기도 하고 중제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싸움을 길어지게 한다는 것을 안 이후부터 느닷없는 욕지거리가 터져도 덤덤한 얼굴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둘의 싸움은 브라이언이 냉동창고를 박차고 나오거나 반대로 마누엘이 케시박스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밖으로 나가는 것으로 끝이난다. 둘의 싸움은 손님의 유무와 준호의 기분까지도 고려한 적절성을 유지하는 데도 소홀하지 않다.
뭔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내는 소음이 우지끈, 하고 들렸다. 뒤이어 박스가 찌그러지는, 발길에 걷어차인 무엇들이 너머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다급하고 잡다하게 뒤섞여 들려왔다. 준호가 냉동창고 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들어가 보니 무너져내린 소다 상자와 맥주박스 사이에 브라이언의 다리와 마누엘의 팔뚝이 수초에 걸린 문어처럼 엉켜 돌고 있다. 어쩐 일인지 몸집이 큰 브라이언이 오히려 마누엘에게 눌리고 있었다. 고작해야 입씨름이었지 지난 3, 4년 동안 이런 몸싸움은 한번도 없던 일이다.
스톱, 스톱! 준호는 그렇게 소리치며 브라이언을 타고 누른 마누엘의 목덜미를 왈칵 잡아젖혔다. 마누엘에게 잡힌 브라이언의 셔츠자락이 북 튿어지며 둘의 몸이 떨어져나왔다. 숨통이 트였는지 깔려 있던 브라이언이 그 틈을타서 마누엘의 사타구니를 차올린다. 비명을 지르며 사타구니를 움켜쥔 마누엘을 두고 준호는 얼른 브라이언의 앞을 가로 막았다.
갓데미, 퍽킹 드러그딜러!
마누엘이 통증으로 우그러진 목소리를 그렇게 내질렀다. 준호는 으레 욕지거리려니 했다. 그런데 바닥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던 브라이언이 송곳에라도 찔린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브라이언의 얼굴이 하얗게 바래졌다. 검은 피부가 하얘질리 없지만 브라이언의 표정이 조금전 싸우던 때와는 너무도 달라져서 준호의 눈에 그렇게 비쳤다.  
드러그딜러? 방금전 마누엘이 했던 말을 입속으로 웅얼거려보면서도 준호의 머리속에 그것이 ‘마약장사’로 이해 되기까지는 조금의 시간이 지나야했다. 그것은 그만큼 가깝고도 먼 말이었다. 가게 문을 나가 5불짜리 지폐 한 장만 내밀면 당장에라도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으면서, 아무리 큰돈을 주어도 주머니 속에 집어넣기는 두려운 것이 그것이다. 마약 만도 그런대 하물며 딜러라니, 내 가게에서 일을하는 브라이언이. 준호는 자신의 얼굴색도 하얗게 바래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뚫을 듯한 눈으로 브라이언을 응시했다. 준호의 시선을 받은 브라이언의 얼굴이 이번엔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금시전 하얗게 바래지던 것은 느낌만 그랬는데 이번엔 정말로 검은 피부에 붉은색이 섞여들어 목덜미로부터 이마까지 검붉게 물이 들었다. 브라이언은 충혈된 눈동자를 마누엘에게로 옮기더니 오른손 약지를 총구처럼 펴올렸다.
유, 왓칭, 마우스! 아임, 낫, 드러그딜러! 아임, 빅팀!
브라이언은 흑인 특유의 쉰목소리로 말의 마디를 딱딱 끊으며, 그때 마다 총구처럼 겨눈 약지를 같이 흔들며 선언하듯 그렇게 말했다. 함부로 말하지마, 난 마약장사가 아니야, 나도 피해자라고. 끝에 한 피해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브라이언의 외침은 그런 것이었다. 말을 마친 브라이언은 마누엘의 사타구니처럼 냉동창고 문을 걷어차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텔미, 왓헤픈?
브라이언이 집으로 돌아간 후 준호는 마누엘을 케시박스 안으로 불러들였다. 무슨일인지 말해보라는 준호의 물음에 마누엘은 그럴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기는 하면서도 선뜻  입을 열지는 않았다. 싸움의 이유가 아니라 그가 브라이언에게 마약장사라고 한 것에 대해 해명하라는 말인줄 마누엘 자신이 잘아는 탓일 터였다. 준호는 다그치지 않았다. 마누엘의 표정으로보아 뭔가 자신이 모르는 중대한 일이 이 가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마약장사라는 마누엘의 말에 얼굴을 달구며 과민반응을 보이던 브라이언의 태도까지도 포함해서였다.
수시로 티격태격하는 둘을 함께 대리고 있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미국의 대도시, 그 중에서도 이 로스엔젤레스는 흑인과 히스페닉의 비율이 비슷하게 살고 있다. 얼마전의 통계에서는 히스페닉이 흑인 인구를 앞질렀다는 보고도 나왔다. 준호의 델리마켓이 위치해 있는 이 사우스엘레이 역시 누구나 인정하는 흑인 중심지역이지만 어느쪽이 더 많은지 분간을 못할정도로 비슷하게 뒤섞여 살고 있다. 그러니까 판매한 물건으로 해서 문제가 생기던지, 아니면 캔디 한 봉지 훔치다 들킨 녀석까지 그들의 언어로 설명하고 주의를 주어야 뒤가 편하다. 결국 브라이언이 흑인들을 생각해서 고용 되었다면 마누엘은 히스페닉 손님을 위해 있는 것이다.
준호는 둘 중에서 마누엘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생김과 피부색이 비슷해서 그런지 케시박스를 맡긴 브라이언보다 야채 상자를 나르는 마누엘에게 마음이 더 기울었다. 때로 대화를하며 시선을 맞춰보면 브라이언은 허연 눈알을 불안정하게 굴리며 말과 시선이 엇나가지만, 마누엘은 까만 눈동자와 고개를 함께 떨굴지언정 그것이 따로노는 이중성을 보이지 않았다. 가끔 기분이 좋으면, 무이 부에노 세니욜킴, 하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마누엘을 준호는 동생을 대하듯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마누엘도 그런 준호에게 무슨 일이건 가감없이 말하고 의논하였다. 그런 마누엘이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준호는 맥주 캔을 따서 마누엘에게 내밀었다. 마누엘은 주저없이 한모금을 벌컥 들이켰다.
컴온, 미스터킴.
무슨 결심이라도 섰는지 마누엘은 벌떡 일어나더니 준호에게 따라오라는 말을하며 앞장을 섰다. 마누엘을 따라 케시박스를 나서는 준호의 가슴이 이유도없이 쿵쿵 뛰었다. 문을 닫을 시간이 가까워서 그런지 마겟 안에는 아무도 들어와 있는 사람이 없었다. 마누엘은 스낵코너를 돌아 각종 와인병들이 가지런히 늘어선 와이너리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준호를 돌아보았다. 놀라지 말아요, 그런 눈빛이었다. 괜찮아, 뭐야? 준호도 눈으로 그렇게 재촉했다. 마누엘은 심호흡을 한차례하더니 허리를 굽혔다. 거의 바닥에 앉듯이 몸을 낮춘 마누엘은 와인병 몇 개를 이것 저것 들어보다가 어느것 하나를 쑥 뽑아내더니 그 속을 들여다 보라고 눈짓을 했다. 준호도 마누엘처럼 깊은 숨을 한번 들여마신 후 상체를 굽혔다. 와인병을 들어낸 자리에 손바닥 만한 투명 지퍼백이 하나 놓여 있었다. 와인병에 눌린 자국이 지퍼백 한 가운데 동그랗게 찍혀 있다. 바닥에 납작하게 깔린 지퍼백을 찬찬히 들여다 보니, 손톱만하게 접힌 하얀종이 봉지가 열 개도 넘게 들어 있다. 마누엘이 미스터 킴, 하고 부른다. 준호가 고개를 들어보니 마누엘의 다른 손에 또 하나의 와인병이 들려 있다. 몸을 옆으로 옮겨보니 그 곳에도 똑같은 지퍼백이 놓여 있었다.
노 몰?
이게 다야? 하고 준호가 웅크린체로 물었다. 날카롭게 치켜올린 준호의 눈길에 위압을 느꼈는지 마누엘은 취조관 앞의 피의자처럼 정색을하며 아이 돈 노우, 하고 말했다. 와이너리에서 들어 낸 두 개의 와인병을 양 손에 거머쥔 마누엘은 결백이라도 주장하듯 부르르 팔을 떨었다. 그런 마누엘을 올려다 보는 준호의 눈에 벌건 불꽃이 일었다. 그 불꽃은 사우스앨에이를, 그리고 이 델리마켓을 태워올리던 불꽃이었다. 바로 준태형의 허리에 날아와 박힌 그 불꽃이었다.

폭동이 일어난 그날 준태형은 정오가 되기전에 마켓문을 닫고 형수와 함께 집으로 돌어왔다. 흑인 음주운전자를 무차별 구타한 백인 경관에게 무죄평결이 내려지면 폭동이 일어날거라는 소문이 며칠전부터 엘에이 시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터줏대감인 죠지영감도 이런저런 정보를 전하며 마켓문을 닫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마켓은 내가 지켜줄테니 걱정말아라, 준은 집에서 TV나 보다가 오늘 밤에 아무일이 없거든 내일 나와라, 죠지 영감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날 오후 3시쯤 AME 교회 앞에서 시작된 흑인들의 항의시위는 5시가 지나면서 폭동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사우스엘에이의 플로렌스와 놀만디 교차점에 있는 리커마켓을 습격하며 약탈과 방화가 본격적으로 불붙었다. 갱단과 동네 우범자들이 앞장을 선 폭도들은 상점의 문을 부수고 물건을 훔친 후 불을 질렀다. 총을 쏘며 마켓에 불을지르는 사람은 대게 흑인들이었고, 히죽히죽 웃으며 훔쳐낸 물건을 양손 가득들고 뛰는 것은 거개가 남미계들이었다. 그 아수라장의 약탈과 방화는 밤을지나며 코리아타운이 있는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밤새 한잠도 못자고 TV를 통해 약탈당하고 불타오르는 사우스엘에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준태형은 날이 밝자 형수의 만류를 뿌리친체 헤븐스트릿으로 차를 몰았다. 사우스엘에이와 코리아타운의 중간 지역에 위치한 형의 델리마켓이 TV화면에 비친 적은 없었지만 이미 폭동의 선두는 그 지역을 넘어서 있었다. 한인 청년들이 코리아타운을 지킨다며 자경대를 조직하고, 상점의 주인을 비롯한 종업원들이 자기 업소의 약탈을 막기위해 총을 들고 나섰다는 뉴스를 준태형은 한인 라디오 방송을 통해 듣고 있었다. 이렇게 방구석에 앉아 TV나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준태형은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었다. 허지만 그 아침 준태형이 내린 당연한 용기는 형의 일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마겟문을 막아선 죠지영감의 설득에 주춤거리고 있던 폭도들이 준태형이 나타나자 맹렬한 증오심을 터뜨린 것이었다. 폭도들 중에서도 가슴에 하이에나 문신을 새긴 박박머리가 유독 길길이 날뛰며 준태형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준태형의 빈번한 신고로 마켓 주변에서의 마약 판매에 어려움을 겪던 동네 불량배 중 하나였다. 총을 거머쥔 오른손으로 벌거벗은 앞가슴을 두드리며 지독한 욕지거리를 퍼붓던 박박머리는 급기야 끓어오르는 흥분을 주체못해 준태형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그것이 형의 척추를 꿰뚫었다. 이어 마켓문이 부서지고 물건이 약탈당한 후 방화가 이어졌다. 죠지영감의 사력을 다한 보호가 아니었다면 한쪽 다리는 고사하고 준태형의 생명까지도 어찌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상은 북가주에서 대학을 다니던 준호가 폭동이 일어난 다음날 저녁 준태형이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왔을때 입술이 바싹 마른 형수가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들려준 말이었다. 시든 야채류들 말고는 거의 모든 물건이 약탈당했다는 것과 냉동창고쪽을 뺀 마켓 건물이 거의 전소되었다는 이야기는 다음날 아침 병원을 찾은 죠지영감에게 들었다.
준호야, 우리 두 형제의 꿈을 이 사우스엘에이에 걸었다. 잘될 거다. 너는 아무 걱정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면 돼 장사는 내가 한다.
전주인으로부터 마켓을 인수한 첫날, 헤븐스트릿에 부서지는 캘리포니아의 여름 햇살을 바라보며 준태형은 자신이 그린 미래가 눈부신 듯 아련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었다. 혼자 사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울의 집을 처분한 20만불 거의를 털어넣고 인수한 마켓이다. 준태형이 우리의 꿈을 걸었다는 말은 준호의 몫도 계산하고 있다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의 몫이 함께 담긴 그 꿈의 무대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내린 것이다.
물론 준호 자신에 비해 준태형의 잃음이 훨씬 큰 것이야 말할 필요가 없지만, 유실의 실체가 그 잔인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흐르는 시간을 등에 업고서였다. 그러니까 폭동이 가라앉고 준태형의 총상과 부서진 마켓의 장래에 어느정도 가닥을 잡은 준호가 십여일 만에 센프란시스코로 돌아온 한 달 뒤였다. 준호에게 걸려온 형수의 목소리는 425 마일의 거리를 격하고 있음에도 가물가물 묻어나는 술기를 감출 수 없었다. 말의 허리가 대중없이 잘리는 것은 형수가 애써 울음을 참고 있다는 증거였다.
삼촌, 놀라지 말고... 들어요. 형이... 형이 말이예요... 불구가... 된다구... 닥터가... 못고친.... 다고... 수술을... 두 번이나... 더 했는데...
준호는 숨을 죽인체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는 척추 신경이 손상을 입어 힘들었지만 수술이 잘되었다며 활짝 웃던 유태계 의사의 길죽한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병상에 누워서도 정부의 특별융자가 나오면 다시 마켓을 시작하겠다며 부석부석한 얼굴에 애써 미소를 올리던 준태형의 모습도 겹쳐저 왔다. 그동안 몇차례 전화 통화가 있었지만 전혀 언급이 없던 말이었다. 휴학계를 내야겠다는 결심이 그제야 선명하게 그의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준태형의 잃음은 그것 만이 아니었다. 준호가 이것 저것을 정리하느라 형수의 전화를 받은 두 주 후에 엘에이로 내려와보니 퀸엔젤스병원의 중환자실에는 준태형 혼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네 형수가 유산을 했단다. 몸이 너무 나빠졌어. 그래서 집으로 보냈다. 잠에서 깬 준태형은 준비한 원고를 읽듯 고저 없는 음성으로 형수의 부재를 설명했다. 유산이라니... 올해로 결혼 3년째에 접어드는 준태형이 그동안 얼마나 바라던 것이었는데. 아이를 다섯 이상은 낳을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준태형이었다. 방화된 마켓, 아니 어쩌면 불구가 된 한쪽 다리의 상실보다도 형에게는 형수의 유산이 더욱 큰 아픔으로 자리할 것이었다. 준태형의 아픔은 유산을 핑계로 귀국한 형수가 종내 돌아오지 않음으로 해서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형수의 귀국이 다리는 물론 생식 기능까지 마비된 준태형의 불구에 기인한다는 것을 준호가 알기까지는 좀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였다. 준태형은 결국 자신의 목숨을 남기고는 거의 모두를 잃은 것이었다.  

준호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즉시로 마약 담당 수사관을 보내 와이너리 바닥에 감춰진 코케인을 모두 수거했다. 수사관들은 꽤 오랜시간을 마켓에 머물며 조사를 벌렸다. 그들은 집요하게 누가 마약을 이곳에 감췄느냐, 의심가는 사람이 없느냐 하며 답변을 유도했지만 준호는 끝까지 스킨헤드를 말하지 않았다. 스킨헤드에 대해서라면 그보다도 마누엘이 말을해야 될테지만 녀석도 완강히 고개를 내저으며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었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숨겨진 마약을 신고 한 것만도 호랑이 콧수염을 건드린 꼴인데 거기다 누구라고 지목까지 했다면 스킨헤드가 어떤 보복을 가해올지 상상이 않되는 일이다. 나는 이렇게 신고를 했으니 이제부터 당신들이 전문가적 수사력을 발휘해서 우리 마켓은 물론 이 주위를 범죄로부터 지켜주시오, 하는 것이 준호의 말없는 주문이었다. 그런 한편으로 어떤식으로든 스킨헤드와 연관이 되었을 브라이언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것은 이미 준호가 지켜줄 수 있는 한계 밖의 일이었다. 마누엘과 싸울때 나도 피해자라고 외친 것으로 미루어 어쩌면 이 일로해서 브라이언이 스킨헤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위안처럼 하기도 했다.
브라이언의 근무시간을 알고 간 수사관들은 다음날 아침이 되자 어김없이 마켓문을 밀고 들어섰다. 수사관들은 어제 준호와 마누엘에게 했던 것처럼 브라이언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준호는 무심한 척하면서도 수사관들의 질문에 답하는 브라이언의 말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허지만 실망스럽게도 피해자라고 외치던 브라이언조차 자신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며 얼굴을 검붉게 달아올렸다. 그런 브라이언을 바라보는 준호의 마음에 저녀석이 정말 스킨헤드의 똘마니가 아닐까 하는 의혹이 솟아 올랐다. 그렇다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와이너리 밑바닥의 코케인봉지를 신고한 것이 마켓 주인의 우연한 발견에서가 아니라 마누엘의 고자질에 의해서라는 것을 스킨헤드가 알게 된다면 준호의 계산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브라이언을 내보내든 그냥 대리고 있든 둘다 개운할 수가 없는 일이다. 브라이언을 내보낸다면 준호 자신에게 적대감을 품은 동네 불량배를 하나 더 늘리는 일이 되고, 그냥 둔다면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처럼 불안한 일이 될 것이었다.
조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수사관들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건낸 준호는 무거운 마음을 추스르듯 망연한 눈길을 들어 올렸다. 길 건너편 도넛가게 유리창에 초여름의 낮햇살이 따끈하게 박혀 있다. 목발을 앞세운 준태형이 막 도넛 가게의 문을 밀고 나서는 중이었다. 오늘도 역시 두터운 야전점퍼를 입었다. 아랫주머니가 불룩한 것도 어제와 다름이 없다. 이그러진 걸음으로 횡단보도앞까지 걸어온 준태형은 언제나처럼 헤븐스트릿 싸인이 걸린 신호등 기둥에 어깨를 기댄다. 넓지않은 4차선 도로를 건너기 위해 준태형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쩐일인지 오늘은 죠지영감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요 며칠 기침을 쿨럭거리더니 그예 드러눕기라도 한 것일까. 죠지영감이 동행하지 않는 준태형의 보행은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길 양쪽으로 달려와 정차한 차량 중 어떤 것은 횡단보도를 깊숙히 침범해서 멈춘 차도 있다. 죠지영감이 뒤따를 때는 잘 볼 수 없는 거칠음이다. 성한 다리와 목발로 보행의 균형을 유지하며 죠지영감이 없는 횡단보도를 어렵게 건넌 준태형은 이번에는 이쪽편 신호등 기둥에 어깨를 기대며 또 한차례 호흡을 고른다. 얼마전까지도 횡단보도를 건너는 걸음에 곧장 마켓으로 들어왔는데 요즈음 들어 저렇게 한번을 더 쉬는 것이다. 준호는 출입문을 열고 바닥 고임쇠를 질렀다.
죠지영감은 오늘 안나왔나봐?
그의 물음에 준태형은 눈살을 찌그리며, 그러게 말이야, 감기가 심한가. 하고 한껏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흥분이 가시지 않아 검붏은 얼굴로 케시박스 안에 앉아 있는 브라이언을 힐끗 일별한 준태형은 냉장고를 열더니 맥주 두 캔을 꺼낸다. 버릇인가 아니면 죠지영감몫까지 마시려는 걸까.
쟤 왜저래?
그냥 쪽방으로 들어가나 했더니 준태형은 예외없이 그렇게 물어왔다. 이 델리마켓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도 준태형의 눈을 비껴갈 수 없다. 냉장고 위에 진열된 컵라면박스가 바닥으로 내려와 있던가, 껌상자 옆에 걸렸던 감자칩이 한칸 옆으로 옮겨지기 만해도 그렇게 한 이유를 묻는 준태형이다.
응, 별일 아니야, 내가 주의를 좀 주고 있던 중이었어. 형은 들어가요. 자세한 건 이따 얘기 해줄게.
준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을 얼버무렸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닥이 잡히면 당연히 말할 것이지만 지금 상황에 불쑥 코케인이나 경찰이 수사를 벌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 다혈질인 준태형은 당장에라도 브라이언의 멱살을 움켜쥘 것이었다. 준태형은 다행스럽게도 뒷말없이 쪽방으로 들어갔다.
유, 윌리 돈노?
너 정말 모르는 일이야? 준태형이 쪽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준호는 브라이언을 향해 대뜸 그렇게 물었다. 준호의 직선적인 질문에 놀란 브라이언은 식지않은 얼굴에 새로운 열기를 끌어 올리며 허연 눈을 껌벅거린다. 검은 얼굴에 뚜렸이 박힌 그 눈이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하는 순간적 갈등으로 번민하고 있었다. 준호는 흔들리는 브라이언의 눈동자를 고정시키기 위해 쏘아건넨 시선을 웅크리지 않은체 입술을 꽉 다물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미스터 킴, 아임 빅팀, 윌리.
브라이언은 냉동창고에서처럼 자신은 정말 피해자라는 소리를 반복하며 두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눈동자의 흔들림이 멈춰 있었다. 이 참에 자신의 결백을 밝히겠다는 의지가 팽팽히 당겨진 브라이언의 이마에 선명히 떠올랐다. 그래, 진실을 말해봐. 준호는 브라이언의 결심이 와해되지 않도록 틈을 주지않고 그렇게 눈의 언어로 재촉했다.
히 톨미 노 타킹, 노 왓칭. 아임 두잉 온리 라잌뎃, 댓스잇!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어, 보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고 말이야, 그게 다라구! 브라이언은 들어올린 두 손을 과장되게 흔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게 사실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아니야, 넌 그냥 입다물고 있으면 돼, 난 이 마켓에 와서 와인 한 병을 사가는 손님일뿐이라구. 협박의 총구를 눈속에 감춘 스킨헤드가 위압적 시선과 부드러운 말 한마디로 브리이언의 입을 막기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었다. 자신이 보지못한 오물과 맡을 수 없는 냄새가 그들이 사는 이 도시의 골목골목에 얼마나 널려 있는지 준호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운 일이다. 눈짓 한 번만으로도 칼에 찔린 이상의 공포를 느끼는 것은 오로지 그들이 속한 세계의 구성원들이나 이해할 수 있는 일 일 것이다.
브라이언의 허연 눈동자를 놓아준 준호의 시선은 케시박스 곁의 쪽방을 쏘아 본다. 준태형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나. 브라이언의 진실은 알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스킨헤드가 준호 자신을 포함한 이 델리마켓의 세 사람 모두를 적으로 삼을지도 모를 일이다. 준호는 커진 걱정으로 차오른 숨을 후, 하고 내쉬며 새삼스럽게 브라이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쩐 일 인지 브라이언이 겁먹은 얼굴로 허연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준호는 브라이언의 흔들리는 시선을 따라 자신도 모르게 서늘한 느낌이 몰려오는 뒤쪽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 스킨헤드가 들어와 있었다. 준태형을 맞느라 열어둔 문으로 스킨헤드가 소리없이 들어온 것이었다. 스킨헤드는 케시박스에 앉아 있는 브라이언과 그 앞에 서 있는 준호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지난 밤과 오늘 아침 사이 경찰차가 서너대씩 출동을 해서 법석을 피웠는데 스킨헤드가 모를리 없었다. 그들은 이 구역을 순찰하는 경찰의 움직임을 거울처럼 들여다 보고 있는 자들이다. 분명 지난 밤으로 브라이언의 집을 찾아가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상세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조금전 브라이언이 준호에게 한 말도 어쩌면 스킨헤드의 조종에 의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얼른 들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평화와 위험이 순서없이 뒤바뀌는 지역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이런 급박한 상황을 가정하지 못하다니. 준호는 체념과 자책이 폭포처럼 소용돌이 치는 가슴을 억누르며 스킨헤드의 발걸음을 주시했다. 섣부르게 행동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런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준호는 휘청 하는 무릎관절에 지긋이 힘을 주며 똑바로 스킨헤드를 바라보았다.
하이.
스킨헤드가 두 발짝 앞으로 닥아왔을 때 준호는 그렇게 인사를 했다. 오른쪽 눈거플을 힐끗 치키는 것으로 반응을 나타낸 스킨헤드는 준호를 무시한체 브라이언을 향해 오른 손을 들어 올렸다.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얼른 한걸음을 물러섰다. 다행이 스킨헤드의 손에 총이 들려 있지는 않았다.
유, 싼아버비치!
자신을 가리킨 스킨헤드의 손가락 앞에서 브라이언은 총구에 겨냥당한 사형수처럼 사색이 되었다. 브라이언도 스킨헤드 모양 손을 치켜올렸지만 그것은 맞서 대응 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날아오는 무엇을 막아보려는 무의식의 자세에 불과했다. 당황한 브라이언은 미처 말이 안나오는지 입을 벙하게 벌린체로 들어올린 손만 마구 내젓고 있었다. 브라이언의 검은 얼굴이 또 한 번 하얘지는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했던 방금전의 판단은 틀렸던 것인가, 둘의 모습을 보며 준호는 그 생각을 했다.
아이 돈 노, 아이 돈 노! 아이 딧, 아이 딧!
그제서야 말문이 트였는지 브라이언은 몰라, 난 몰라, 시키는 대로 했어, 난 네가 시키는 대로 했다구! 하는 말을 절규처럼 쏟아 놓았다. 스킨헤드는 브라이언의 갑작스런 반발에 멈칫 하는 듯 하더니 이내 쉰 목소리를 더 크게 내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쌰랍! 싼아버비치, 암고나 킬 유!
죽여버린다는 소리를 비명처럼 내지른 스킨헤드는 케시박스를 단번에 훌쩍 뛰어넘더니 부들부들 떨고 있는 브라이언의 멱살을 바짝 움켜 올렸다. 그런 스킨헤드는 이내 브라이언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단단한 것이 육중한 무엇에 부딧치며 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브라이언의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그리고 곧 이어 물건들 위로 무너져 내리는 파열음이 폐차장의 소음처럼 들려왔다. 준호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비상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제야 떠오른 것이다. 준호는 허둥지둥 전화기를 찾아 버튼을 눌렀다.
그때 였다. 무엇인가 지금까지 들리던 소음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아주 짧고 강하게 울렸다. 그것은 딱, 하는 소리 같기도 했고 팍, 하는 소리로도 들렸다. 아니다, 조금 더 소리의 느낌을 반추해본 준호는 땅, 하는 소리였다고 생각을 정정 했다. 조용 했다. 그 전혀 다른 소리가 들리고난 후 모든 소음이 일시에 정지해버린 것이다. 마치 통금이 실시된 폭동 후의 거리처럼 정적이 찿아 왔다. 준호는 전화기 위로 떨구었던 머리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거기 쪽방옆 케시박스로 오르는 층계에 목발을 걸친 준태형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준태형의 앞쪽에 공포에 질려 입을 딱 벌린 브라이언이 경악에 찬 눈으로 아래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고 서 있었다. 소리를 삭제한 무성영화의 배우들 마냥 준태형과 브라이언은 말없는 연극을 벌리고 있었다. 준태형의 늘어진 손끝에 날씬한 총신을 반들반들 빛내는 은빛의 작은 총이 쥐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놀랍지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관람하기라도 하듯 놀라워야 할텐데 전혀 놀랍지 않은 것이었다.  
헬로우, 디스이즈 폴리스 스테이숀, 스피킹, 헬로우, 헬로우...
신고자의 음성을 찾는 비상상황실 담당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바닥에 떨어진 수화기 속에서 간단없이 흘러나왔다. 캘리포니아의 초여름 햇살이 사차선의 헤븐스트릿 위에 눈부시게 부서지는 정오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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