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지붕

2008.12.06 15:16

이용우 조회 수:1538 추천:144

탁탁, 문지방 치는 소리가 들린다. 두 번째 인가? 아니 세 번째 인 것 같기도 하다. 빨리 일어나야 한다. 늦으면 벼락이 떨어진다. 진규는 허둥지둥 상체를 일으킨다. 필경 눈알이 벌게졌을 아버지의 얼굴을 찾는다. 깜깜하다. 열린 문 저쪽에 서 있을 아버지가 보이질 않는다. 가물가물 멀게 느껴지는 창으로부터 어숨푸레한 빛이 스며들 뿐이다.    
머리가 빠게질 듯 아프다. 두통과 함께 한기가 겹치며 몰매라도 맞은 듯 어깨쭉지가 결렸다. 어우, 진규는 뻑뻑한 두 팔을 힘겹게 들어올리며 신음을 쏟았다. 두어 차래 하품이 터지고서야 조금 정신이 났다. 지난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위스키 한 병을 다 마셨던가? 그러자 술에 취해 고성으로 주고 받던 아내와의 통화가 생각났다. 아니, 주고 받은 것이 아니라 진규 혼자 퍼부은 일방적 공격이다. 언제나 아내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내 마켓 내가 판다는데 누가 말려, 그렇게 소리친 것이 생각났다. 처남이 뭔데 주인행세를 하는 거야, 라고 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허지만 그것을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아내는 입술을 앙다물며 냉소했을 것이다.
이젠 나를 남편으로 여기지도 않는거지? 그런 소리도 한 것 같다. 아니 분명히 했다. 통화 내내 아내가 헛기침이나마 큼,큼, 하며 반응을 보인 것은 그때 뿐이었잖은가. 난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어, 리스마켓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라 나라구. 수화기 저편의 아내는 그럴 것이 분명한 느낌을 침묵의 언어로 던져왔다. 궁금증에 혀가 바짝바짝 마르면서도 끝내 헬렌에 대해서조차 한 마디 언질이 없었다. 한 길 사람의 속은 모른다더니 아내가 정말 저렇게 모진여자였나. -어두운 골목길 님발자욱, 모퉁이 휘돌아 오시는 소리... 때때로 나직나직 노래를 불러 늦결혼의 기쁨을 가득 안겨주던 아내였다.
간밤의 기억을 헤집어 가던 진규는 흠칫 놀라며 어둑한 옆자리를 황급히 더듬는다. 있다. 다복한 머리통과 편편한 등짝이 두 손바닥 아래 익숙하게 잡혀왔다. 안도의 한숨이 어둠을 헤쳐나왔다. 음료수와 라면박스로 벽을 둘러주어도 추웠던지 슬리핑백속의 아이는 모로 누운체 잔뜩 웅크려 있었다. 문득 3학년 아이의 몸피 치고는 몹시 외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만 마주치면 답삭 끌어안고, 응석이 그치기도 전에 냉큼 들쳐업던 아이였다. 시시 때때로 쓸고 만지고 입맞추며 팔안에서 굴리던 아이다. 그런 아이가 새삼스레 작아 보였다. 어둠속에 웅크려 있는 모습이 마치 고양이 같았다. 집 나온 한 마리 들고양이. 가슴이 싸아 하게 아려왔다. 진규는 슬리핑백 입구로 밀려난 아이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 안으며 차거운 입술을 머리칼에 얹었다.
탁탁, 탁,탁, 문지방 두드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진규는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들고 사방을 살폈다. 깡통밴속을 휘도는 공명이 희뿌연 어둠을 날카롭게 가른다. 요즘들어 걸핏하면 아버지의 환영에 시달린다. 아버지는 벌게진 눈으로 탁탁 문지방을 치던가 연기가 치솟는 양철지붕위에서 쾅,쾅, 발을 구르며 잠자리를 어지럽혔다. 허지만 이건 꿈이 아니다. 어서 일어나라고 손바닥으로 문지방을 내려치는 아버지의 성화가 아니다. 진규는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의 진원지를 좇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문지방 두드리는 것과 리듬은 물론 소리도 달랐다. 탁,탁, 이 아니라 타락,타락, 이었다. 어느 쪽에서 소리가 나는지 방향감각은 없었지만 그게 무슨 소리 라는 건 알아 냈다. 그건 바로 꽃비의 쳇바퀴 돌리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헬렌의 발치께, 깡통밴의 뒷문쪽 사과상자 위다. 진규는 몸을 돌려 뒤쪽으로 엉금 기어갔다. 짐작 되는 곳 쯤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어제 놓아둔 대로 햄스터 꽃비의 철망집은 거기 있었다. 간밤에 술이 취해 젖가락 질르는 것을 깜빡 했던 모양이다. 진규의 다가오는 기척에 잠시 뜀박질을 멈추었던 꽃비는 이내 타락타락, 쳇바퀴 돌리기를 시작한다. 진규는 더듬더듬 나무젖가락을 찾아 쥐었다. 어렴풋한 윤곽을 짐작으로 쳇바퀴를 향해 젖가락을 질러넣었다. 소리가 뚝 그쳤다. 신새벽의 정적이 단번에 찾아왔다. 그때였다.
아빠, 하지마, 꽃비 엑서사이스 필요해.
얼굴을 슬리핑백속에 묻어 어눌해진 헬렌의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아이도 잠을 깨어 있었던 모양이다. 허리를 일으키던 진규는 다시 몸을 굽혀 천천히 젖가락을 뽑았다. 타락,타락, 꽃비는 지체없이 달음질을 시작한다. 그는 억누른 콧숨을 후 내쉬었다.
그렇게 진규가 고개를 드는데 강렬한 빛살 한 줄기가 벼락처럼 뛰어들었다. 빛살은 무섭게 밝았다. 어찌나 밝은지 어둠속에서 보이던 것까지도 까맣게 묻혀 버렸다. 진규는 눈을 질끈 감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전혀 예고없이 깡통밴안으로 달려든 그 빛살은 차량 내부의 갖가지 모습들을 무차별적으로 훑었다. 점령군처럼 난폭하게 빛밟기를 하던 그것은 상대의 보잘것없음을 꼼꼼히 확인한 후에야 흉기를 거두어 갔다.
지독한 암흑이 찾아왔다. 아귀같이 바짝 마른 구회장과 붉으죽죽한 최상사의 얼굴이 앞다투며 떠올랐다. 방금전 쏘아댄 후레쉬불빛 뒤에 최상사의 불룩한 똥배가 버티고 있을 가정이 비데오 보듯 그려졌다. 정말 저들의 손아귀에 잡힌 것일까. 이제 겨우 두 밤이 지났을 뿐이다. 깜깜한 절벽앞에서 진규의 가슴은 두려움으로 벌렁거렸다. 땅밑으로 꺼지든지 하늘로 솟는 재주가 없는바에야 지금의 상황을 모면할 길은 없다. 독안에 든 쥐가 아니라 깡통밴에 든 빚쟁이였다.      
텅텅, 차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진규는 황황한 손길로 아이를 더듬었다. 헬렌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어둠속에 허우적거리는 제 아빠의 두 팔속으로 아이는 난짝 달려 들었다. 얇은 피부를 격한 아이의 여린 가슴이 거친 펌푸질로 할딱거렸다. 진규는 쿨럭 솟구치는 눈물을 침으로 꿀꺽 삼켰다. 그를 궁지에 몰아넣은 어둠이지만 눈물을 감출 수 있어 고맙기도 하다고 진규는 아이의 등을 쓸며 곁생각을 했다.
헬렌아, 아빠 잠깐 나갔다 올테니까 슬리핑백에 들어가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걱정하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어, 알았지?
아이는 그러나 등나무에 매달린 늘보원숭이처럼 그의 가슴으로 더욱 달라붙었다. 가녀린 팔뚝 어디에 그런 힘이 있었는지 놀랍도록 아귀차게 목덜미를 감아 잡는다. 완강했다. 어떤 말로도 아이를 떼어놓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같이 나가자, 까짓 두려울 게 뭐야.
진규는 헬렌을 안은체 차문을 열어젖혔다. 기다렸다는 듯 강렬한 빛살이 난폭하게 달려들었다.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의 턱밑으로 머리를 묻는다. 진규는 바르르 떠는 아이를 감싸 안으며 빛살 저편의 보이지않는 상대를 향해 찡그린 얼굴을 들어 올렸다. 후레쉬불빛은 두 줄기였다. 빛살 저편에 최소한 두 명 이상의 불명체가 있는 것이다.  
굿모닝, 써얼.
진규는 귀를 의심했다. 최상사의 목소리가 아니였다. 최상사는커녕 그것은 동양인의 음색도 아니었다. 최상사와의 정면 대결을 각오하고 비장한 결의로 차문을 열어젖혔던 진규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운전면허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빛살 너머로부터 그렇게 두 번째 말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진규는 아, 경찰이구나 하며 풀석 웃었다. 하지만 실소도 잠깐이였다. 혹 아내가 신고를 했다면 최상사를 만난 것보다 더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진규는 한 손으로 운전면허증을 꺼내느라 꾸물거리며 그 틈새에 아주 잠깐 긴박한 고민에 빠졌다. 아내의 신고 여부와 상관없이, 아이까지 데리고 마켓의 물건 운반용 깡통밴에서 잠자고 있는 동양남자를 대면대면 보아넘길 경찰이 아니다. 차량 내부의 적나라한 모습까지 세세히 보아버렸다. 이제 저들은 미국경찰 특유의 끈질긴 탐구력으로 집요한 질문 공세를 펼칠 것이다. 거짓으로 가느냐, 진실로 가느냐, 진규가 할수 있는 선택은 단순히 그뿐이다.    
아, 다 말해버릴까.
문득 진규는 자신을 올가매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유혹에 간절히 젖었다. 엉엉, 통곡이라도 하고 싶던 차에 모질게 뺨 때려줄 적임자가 제발로 나타났다. 여기 있소, 하고 뺨만 내밀면 된다. 팽창한 풍선이 펑, 터지며 조각난 잔해가 산산히 흩어지겠지만, 파열 직전의 압박감 보다는 찢어져 날리는 자유가 견디기에 훨씬 수월할지도 모른다. 진규는 운전면허증을 건네기 위해 경찰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며 빛살의 정점을 노려보았다.

며칠이고 소식이 없던 아버지가 두 눈이 발갛게 충혈되어 귀가하는 시간은 언제나 어머니가 밥을 짓는 신새벽이였다. 대문을 들어서며 아버지는 카악, 가레침을 돋우어 자신의 귀가를 알리지만 새벽잠에 빠진 진규나 동생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이 게을러빠진 자식들,
악에 받친 아버지가 댓돌에 선채 방문을 열어젖히고 손바닥으로 문지방을 탁,탁, 내려칠 때에야 진규의 잠귀는 겨우 열린다. 눈두덩 부빌 사이도 없이 고무공처럼 톡 튀어 일어난 진규가 꾸벅 인사를 해도 아버지의 노기는 여전하다.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니? 애비가 오는 것도 모르고.
놀음판에서 홀랑 털린 아버지의 분노는 끝내 동생들까지도 일으켜 세우고서야 급한 불이 꺼진다. 간혹 꿀같은 새벽잠을 헤어나지 못해 문지방 치는 소리를 놓치기라도 하면 아버지의 화풀이는 손찌검으로 이어진다. 방으로 뛰어든 아버지는 이불을 걷어젖히고 아홉, 일곱, 다섯살의 고물고물한 삼형제의 연약한 머리통과 등짝을 사정없이 내려친다. 진규와 어린 동생들은 영문도 모르고 새벽 매질을 당한다.
이놈의 자식들이 지애미처럼 귓구멍이 막혔나!
아버지의 화풀이는 애초부터 어머니를 겨냥한 것이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양 달그락, 달그락 아침 준비에 몰두하는 어머니를 공격하기 위해 어린 자식들을 두들기며 메마른 가슴에 불꽃을 지피는 것이다. 어느날 진규와 동생들의 등짝을 때리던 아버지의 두 손이 구들방 윗목에 놓인 고무다라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버지는 도라지묶음이 가득담긴 고무다라이를 사정없이 마당으로 내동댕이 쳤다. 퍽, 소리와 함께 마당 가득히 하얀 도라지가 널브러졌다. 지난 밤 어머니가 맑갛게 씻어 묶은 도라지는 사정없이 마당에 딩굴며 흙먼지를 뒤집어 썼다. 이내 처참한 표정을 지은 어머니의 얼굴이 부엌문에 내걸렸다. 도라지껍질을 벗기고 씻어 묶느라 밤이 이슥해서야 잠자리에 드는 어머니의 핏발 선 시선이 흙마당에 나뒹구는 도라지무더기에 꽂혀 파르르 떨었다. 느닷없는 새벽 매질에 놀라 튀어 일어난 진규는 그 처참한 광경에 벌벌 떨면서, 어서 어머니가 달려들어와 아버지의 가슴팍이나 어깨쭉지를 사정없이 물어뜯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어머니는 진규의 기대를 저버리고 천천히 마당에 쪼그려 앉더니 흩어진 도라지묶음을 하나, 둘, 고무다라이에 주워 담았다.
이년아, 집구석 더러워지게 저따위 것을 왜 끌어들여! 그래, 밤새도록 일해서 언제 남편에게 용돈 한 번 줘봤니? 나쁜년 같으니라구.      
아버지의 패악질에 눈물을 뚝뚝 떨구던 어머니는 급기야 마당가득 널브러진 도라지 위에 입술을 앙다물며 무너져내렸다. 그런 어머니를 터질 듯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바라보는 진규의 눈에도 벌써부터 도라지처럼 굵은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중앙통 네거리의 몫좋은 양화점을 빚잔치로 날린 아버지는 며칠이고 아랫목에 누워 잠만 자거나 아니면 몇날이고 소식없이 집을 비우거나 그랬다. 다정했던 아버지가 진규는 물론 동생들에게까지 욕설이나 손찌검을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며칠 집을 나갔던 아버지가 충혈된 눈으로 신새벽에 돌아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어머니와 싸움을 했다. 식구들 굶겨 죽이려느냐 제발 마음잡고 일을 해라. 평상심을 상실한 아버지의 흉포해지는 언행에 어머니는 오직 그 한마디로 대항 했다. ㅈ읍에서 구두박사로 알려진 아버지가 취직을 하려면 얼마든지 일자리가 널려 있다고 한숨을 쉴 때마다 어머니는 말했다. 하지만 가슴에 바람이 든 아버지는 취직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마치 허깨비처럼 스르르 사라졌다가 어느 신새벽 눈알이 발게져서 돌아와 어머니와 싸움을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싸움을 할망정 며칠이나마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나마 편해 했다. 아랫목을 차지하고 누워 몸을 뒤척일 때 마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아버지의 모습이야 말로 어머니는 뱀처럼 싫어했다. 진규와 어린 동생들도 잠잘 때 말고는 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기를 꺼려했다. 밥도 장지문을 격한 컴컴한 윗방에서 숨죽여가며 먹었다. 아버지도 그런 집안 분위기를 모를리 없다. 구들장을 지고 방구석에 누워 있는 것이 어쩌면 아버지 자신이 제일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밖으로 도는 날이 많아져 갔다. 집안에 아버지의 부재 만큼 평화의 부피도 늘었다. 평화의 시간에 어머니는 호구지책으로 도라지를 까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받아온 생도라지를 물에 불려서 껍질을 벗겨낸다. 껍질을 벗긴 도라지를 다시 한 번 깨끗한 물에 행궈내어 고무밴드로 열 개씩 묶어 차곡차곡 고무다라이에 담으면 되었다. 도라지껍질을 조그만 과도로 박박 긁듯이 벗겨내는 일은 진규도 할수 있었다. 동생들에게는 허락을 않았지만 어머니도 진규에게는 칼질하는 요령을 가르쳐주었다. 도라지껍질 벗겨내는 일이 재미 있어 열심히 칼질을 하다 고개를 들어보면 가끔 어머니가 울었다. 진규는 아버지가 욕하고 때리면 엄마도 가만히 있지 말고 같이 때려, 하고 말했다. 진규의 말에 어머니는 그래, 하고 입술만 웃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한 번도 아버지를 때리지 않았다. 때리기는커녕 전처럼 대거리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점차 아버지의 횡포에 무반응으로 대응했다. 아버지의 들고 남에 철저하게 무관심해져갔다. 어머니가 그럴수록 아버지는 더욱 포악해졌다. 어떠한 시비에도 어머니가 대응을 하지 않자 아버지는 급기야 가족의 생계수단에까지 위해를 했다. 아버지는 평삼심을 잃은 정도를 벗어나 점차 미쳐가기 시작했다. 도라지가 가득담긴 고무다라이를 마당으로 집어던진 것이 광기의 시발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 데려오는 것을 와이프가 동의했습니까?
차적조회와 갖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진규의 신상을 대충 파악했을 경찰이 그렇게 묻는 것으로 보아 아내의 신고가 없었다는 것은 판명이 된 셈이다. 진규는 잠시 생각했다. 아내가 헬렌을 데려가지 말라고도 않았지만 진규 역시 아내의 동의를 얻지도 않았다. 왜 집을 두고 차에서 자느냐는 질문에 아내와 다투어 화김에 집을 나왔다고 했지만 그건 경찰의 이해를 돕기위해서였지 정확한 대답은 아니었다. 능숙찮은 영어실력으로 보잘것없는 품위를 지키려다 자칫 엉뚱한 의심을 초래할까 보아 저들에게 이해가 가는 답을 골랐던 건데 아이 문제로 넘어오자 대답이 궁해졌다. 경찰의 질문에 대한 답은 예스, 아니면 노, 밖에 없다.
예스.
진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대답 했다. 미성년자 납치 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을 스스로 덮어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댁의 전화번호를 주시겠습니까.
경찰은 진규가 한 말의 진위를 직접 확인 해볼 모양이었다. 싸늘한 새벽공기속에 진규의 얼굴은 슬며시 달아 올랐다. 이틀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기에 경찰의 조사를 받나 하고 칙칙한 상상으로 냉소 지을 아내를 생각하자 진규는 뒷목이 당겼다. 아니 어쩌면 새벽잠결에 전화를 받은 아내가 흥분해서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남편이 상의도 없이 아이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그렇게 말한다면... 진규는 떠듬떠듬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이건 예스와 노 따위 선택의 여지도 없는 일이다. 형체만 어슴푸레 보이는 경찰이 후레쉬 불빛 앞으로 손을 쑥 내밀어 전화기의 자판을 누르더니 이내 그것을 거두어 갔다.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연결이 된 듯 하이, 나는 윌셔경찰서의 쟈슈아 로드리게스 입니다, 하고 통화를 시작한다. 진규는 경찰의 성이 로드리게스 라는 말을 듣고서야 어둠속의 인물이 남미계라는 짐작을 했다. 생김과 색갈이 비슷해서 인지 평소에도 냉정하게 보이는 백인이나 속마음을 읽을 수 없는 흑인 보다 스페니쉬계 경찰에게 호감이 있었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당신이 친큐리의 와이프입니까? 오우케이 미세스 리, 몇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틀전에 남편과 싸웠나요? 남편이 아이 데려가는 것에 동의한 것 맞습니까?
싸웠느냐는 질문 뒤에 잠시, 예스... 으흥... 오케이... 하며 듣기만하던 경찰은 아이 문제로 넘어와서는 동의 했느냐는 말을 두 번이나 거푸 물었다. 아내가 그 질문에 선뜻 대답을 않는 모양이었다. 미국식 사고에 익숙한 아내가 자신의 답변여하에 따라 상황이 심각하게 발전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민하는 것이 분명했다.            
네? 아, 미스터 리는 와이프께서 동의 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아내가 진규는 뭐라고 하더냐고 물은 듯 경찰은 그렇게 말했다. 한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멀리서 싸이렌 소리가 앵앵 들렸다. 선잠을 깬 새들이 나무가지를 옮겨 앉느라 푸르륵 거렸다. 이윽고 경찰이 유 슈얼? 하며 수화기 저편으로 던져두었던 신경줄을 거둬들인다. 그리고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오케이, 땡큐 하며 아내와의 통화를 마쳤다.
좋아요, 당신 아내가 동의 했다는군요.
경찰은 석연치 않지만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다는 투로 느리게 말했다. 석연찮키로는 진규도 마찬가지였다. 아내가 부인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더니 막상 그런 대답을 듣자 왠일인지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한자락 계산이 깔린 도움을 받은 것같아 불쾌했다. 가슴에 안긴 아이와 심장을 맞댄 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는 자괴감까지 겹쳐 심한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후레쉬불빛에 의지해서 뭔가를 끄적거리던 경찰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 곳은 퍼밋이 있어야 주차할 수 있는 지역이요, 그러니 지금 곧 떠나시오.
진규의 손에 티켓을 건네준 경찰은 그렇게 말하고는 횅하니 떠나갔다. 술만 안마셨어도 가로등 하나 없는 적막한 동네 분위기에 뭔가를 느꼈을 것이다. 조용한 주차장소를 찾는다고 행콕팍을 지나 베벌리힐스 근방까지 온 것이 잘못이었다. 진규는 멍한 시선으로 멀어져가는 순찰차의 꽁무니를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헬렌이 진규의 턱밑으로부터 머리를 빼들었다. 진규는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대었다. 그때 앞가슴이 부르르, 떨렸다. 가슴을 맞대고 있던 아이가 소스라치게 놀란다. 가슴이 또 부르르 떨렸다. 저고리 안주머니에 진동변환으로 넣어둔 휴대폰의 착신호였다. 진규는 휴대폰을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 했다. 6으로 시작하는 최상사의 전화번호가 찍혀 있다. 어제도 다섯 차래나 메시지를 남겨놓고 또 이렇게 꼴두새벽부터 전화기를 울려대는 것이다. 이놈을 고발했어야 하는데... 경찰에게 정말 해야 될 말은 못하고 엉뚱한 면죄나 받은 자신이 죽도록 미웠다. 진규는 휴대폰이 으스러져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사장님 최상삽니다, 메시지 받으시면 전화 주세요. 감사합니다.
-네에, 이사장님, 또 전화 드림니다. 저 최상삽니다. 통화 한 번 하고 싶습니다.
-이사장님 어디 가셨습니까? 전혀 연락이 안되네요, 이렇게 연락이 안되면 이거... 통화 좀 하십시다, 전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사장, 나 구회장이여, 통화 한 번 허구싶구먼. 어, 험,험.
최상사가 세 번, 그리고 구회장이 직접 한 번 메시지를 남긴 그제까지만해도 그들은 억지로나마 한껏 예의를 지켰다. 그런데 어제부터는 심히 위압적인 경고성 메시지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얹혀 있었다.      
-이사장님, 이러시는 거 좋은 방법 아닙니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거예요. 이 것이 피한다고 될 일입니까, 또 피하면 어디로 피하실려오? 제발 현명하게 판단하세요.
-이사장님, 어쩔려고 이러십니까? 내 메시지 다 들었을텐데 리턴콜 한 번없이, 최상사 이
렇게 무시해도 되는겁니까? 계속 이렇게 나가시면 어쩔 수 없이 미세스리를 만나 해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현명하게 판단하세요.
-이사장, 나 구여. 근디 이사장이 왜 이런디야, 알만한 사람이 일을 이르케 맹글어서야 쓰것어?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을라나? 그렇게 안봤는디 이사장 아주 수뚜핏이구먼 그랴, 최상사헌티 전화 말고 내게로 직접 혀, 좋게 해결하는 방법이 있응께. 알았제? 어, 험,험.
아내를 볼모로 최후 통첩을 하는 최상사의 협박과 좋은 방법이 있다는 구회장의 회유를 전화 메시지로 듣는 진규의 심정은 무거움을 넘어 아프기까지 했다. 헬렌이 듣지 못하게 패스트후드점의 화장실 같은 곳에서 숨죽여 듣는 그들의 음성은 당장에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와 목덜미를 움켜쥘 것처럼 생생하고 두려웠다. 하 나, 둘 쌓이는 메시지를 듣지 않으려고 휴대폰을 아예 꺼버리기도 하지만 머리속을 치받는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이내 전원을 켜게 되었다. 어떻게 하든 빌려준 돈을 받아내려는 그들의 메시지가 뻔한 것이려니 짐작하면서도 점점 강도를 더해가는 협박의 수위가 진규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지를 입은 체 변기 위에 털석주저앉은 진규는 자신에게 흐르는 아버지의 피를 원망하며 지금 닥쳐 있는 이 모든 것이 꿈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때늦은 회한에 젖었다. 만기 몇 달을 앞두고 해약한 적금을 다 잃었을 때에만 손을 씻었어도, 아니, 아내 몰래 받은 이차 에퀴티융자를 모두 날린 시점에서만 멈췄더라도 이런 상황으로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융자금을 상환할 때까지 힘이야 들겠지만 이렇게 자신과 연관된 모든 관계들이 어긋나고 헝클어 지는 것은 막을 수는 있었을 것이었다.

어떻게 된일 인지 말해봐요, 숨기려하지 말고. 이 시점에서 당신이 나에게까지 거짓말을 한다면... 끝이예요, 끝장이라구요.
자기 동생은 물론 세탁소 주인 유사장과 마켓 건너 편의 순두부집 미세스 김에게서까지 돈을 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진규를 불러앉히곤 그렇게 몰아붙였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비밀을 지키겠다고 제 입으로 말한 처남의 고자질이 진규는 몹시 미웠다. 결국 아내와의 냉전이 심각해 지고 진규가 슬슬 밖으로 돌자 처남이 제 누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마켓 관리를 틀어쥔 것은 계획적이다 싶을 정도로 괘씸한 일이었다.
끝장이라는 말로 단판을 지으려 드는 아내의 추궁에 진규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진규 스스로도 자신이 저지른 엄청난 과오에 심한 자책과 회한으로 괴로워 하던 중이었다. 아내의 말이 아니더라도 끝장을 내고싶은 순간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카지노를 나서며 그대로 차를 몰아 태평양에 풍덩 뛰어들까도 생각했고, 110 번과 만나는 지점의 105번 후리웨이 높은 고가도로를 지날때는 고속도로 난간을 부수고 나가 아득히 떨어져 내리고 싶은 유혹에 부르르, 어깨를 떨기도 했다.
각종 공과금과 할부금에 은행문제 등을 모두 진규가 관리했기에 아내는 적금을 깬 것이나 집을 담보로 이차 융자를 받은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웃 가게들에서 돈 몇 천불 빌린 것으로 새파랗게 질린 아내가 빙산의 밑부분을 보게 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진규의 가슴은 납덩이를 달아 맨 듯 무거웠다.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숨김없이 털어놓으면 아내가 정말 너그럽게 수용하고 끝장을 되돌려 평탄한 연장의 길을 갈 수 있을까... 발가락을 고물거려 종아리를 간질이던 아내, 헬렌을 낳아 안고 병원 문을 나서며 후후 웃던 아내, 자신의 고백으로 정말 그런 것들이 회복 되어질 수 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없는 것은 진규 자신의 미쳐 들끓는 피가 도박장 출입을 멈출 수 없다는 그것이었다. 진규는 끝내 아내에게 진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다음날 아침이나 정오무렵에 눈알이 발게져서 나타나는 진규로 해서 다툼과 냉전의 골은 깊어만 갔다. 친구들과 고스톱 치느라, 술 한잔 마시느라, 그런 거짓말도 도박 초기의 추억이 된지 오래이다. 꾼 돈을 되갚고 다시 빌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도박의 규모와 부채의 부피는 커져만 갔다. 주변에서 돌려막기로 조달하는 도박자금이 한계에 이르자 진규는 아내 몰래 적금을 깨고, 집을 담보로 융자까지 받아 도박장에 쓸어넣게 되었던 것이다. 진규는 엘에이 인근 도박장의 테이블 색갈과 딜러들의 손놀림 특징까지 훤히 꿰고 있을 정도였다. 가데나, 잉글우드, 샌디에고 그리고 때로는 멀리 라스베가스까지 원정을 다녔다. 양철지붕 위에서 까맣게 불타 죽은 아버지의 혼령이 씌우지 않고서야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사람은 목발을 짚고 또 한 사람은 갈퀴손을 휘두르며 대낯부터 술이 벌겋게 취한 상이군인 둘이 불문곡직 방안으로 뛰어 들었다. 느닷없는 침입자에 놀란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두 팔을 휘둘렀지만 그들의 폭력을 저지 하기에는 턱없이 빈약한 저항이었다. 남자들은 모두 고무다라이에 한이 맺힌 것 인지 그들도 아버지처럼 도라지가 가득 담긴 고무다라이부터 둘러 엎었다. 겁에 질린 진규와 동생들이 왁,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에게로 달려 들었다. 그들은 갈퀴손으로 벽에 걸린 사진틀을 찍어 내리고 목발로 장롱을 탕탕 두드렸다.
이창수 어디 갔어? 빨리 이창수 새끼한테 돈 가져오라구 해, 꿔준 돈 내놓으란 말이야!
그들은 방안의 기물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부수며 아버지를 데려오라고 고함을 쳤다. 진규와 두 동생을 부등켜 안은 어머니는 그만 혼절해버렸다.
아버지가 불붙은 양철지붕 위에서 괴성을 지르며 미쳐가던 날은 상이군인 둘이 집에 뛰쳐들어와 난동을 부린 이틀 후의 신새벽이었다. 검은 연기가 양철판 틈새로 꾸역꾸역 치솟는 지붕위에서 아버지는 발을 쾅쾅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어, 잘탄다! 으여 후! 에헤, 시원타! 에헤여!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구동성으로 어서 내려오라고, 빨리 뛰어 내리라고 고함을 쳤지만 아버지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에 의해 잠자리에서 끌려나온 진규는 담장밖에 몰려든 동네 사람들 틈에서 마치 남의 집 불구경 하듯 아버지의 광란을 바라 보았다. 두 동생의 어깨를 감싸 안은 어머니도 사람들 사이에 섞여 망연한 눈으로 지붕위의 아버지를 바라 볼 뿐이었다. 진규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아 흔들며 빨리 아버지 내려오라구 해, 하고 애원을 했다. 어머니는 혼이 나간 얼굴로 진규와 동생들을 감싸안으며 그래, 그래, 하는 대답을 허깨비처럼 했다. 달랑 안방과 윗방 뿐인 일자형 양철집에 붙은 불길은 가을 새벽의 싸늘한 바람을 타고 일렁일렁 치솟았다. 몇몇 사람들이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 부었지만 불길을 잡기에는 턱없는 물질이었다.
양철지붕위에서 발을 구르며 잘 탄다, 으여 후, 소리를 지르던 아버지는 어느 순간 우직끈 부러지는 소음과 함께 지붕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진규와 어머니와 동네 사람들의 입에서 동시에 아! 하는 탄성이 터졌다. 그 뿐이였다. 도라지가 가득 담긴 고무다라이를 마당으로 내던지며 시작 된 아버지의 광기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아빠, 꽃비가 이상해, 썸딩 롱이야.
진규가 윌셔가에 있는 맥도널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옆문을 열자 헬렌이 울상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진규는 헬렌의 무릎에 올려져 있는 햄스터집을 들여다 보았다. 오월의 아침이라고는 하지만 깡통밴 속이 후덥덥해서 인지 몸을 축 늘어뜨린 꽃비는 움직임이 없었다. 새벽까지만해도 쳇바퀴를 돌렸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꽃비는 망가져 있었다. 햄스터가 밤에 활동하고 낮에 잠을 자는 야행성 동물이긴 하지만 쳇바퀴 밑에 머리를 처박고 늘어져 있는 꽃비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았다. 어쩌면 저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지만 헬렌을 실망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글쎄, 햇님이 나와서 꽃비가 잠을 자는 것 아닐까?
진규가 그렇게 말했지만 헬렌은 고개를 내둘렀다.
노오, 슬리핑 하는 거 아니야, 꽃비가 씨크야.
햄스터는 기온의 변화가 크면 안된다, 기르는 장소도 조용해야 한다, 기온차가 심하거나 주위가 시끄러우면 스트레스를 받아 병도 나고 죽기도 하니까 특별히 조심해라, 팻샵의 흑인 여자가 과장된 몸짓으로 여러 번 주의를 주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꽃비가 아픈 모양이다. 헬렌아, 아빠가 꽃비 시원하게 창문 열어 놓을게. 그러면 괜찮아 질거야. 우리 얼른 들어가서 맛있는 브랙퍼스트 먹고 팻샵에 가서 꽃비 먹이도 사고 정말 아픈가 물어도 보자, 응?
연해 슬픈 표정을 짓고 있던 헬렌이 팻샵에 가자는 말에 슬며시 얼굴을 풀었다.
아빠, 마미 보고싶어.
헬렌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지난 이틀 동안 한번도 하지 않던 말이었다. 나이는 어려도 속은 어른처럼 깊은 아이가 꽃비의 시들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진규는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쟈켓속으로 만져지는 아이의 어깨가 야들거렸다. 이런 연약한 아이를 왜 데리고 나왔을까, 진규는 새삼스럽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집을 나올땐 깊은 생각없이 아이의 손을 끌었다. 아이도 어디 여행이나 가듯 자신이 기르는 햄스터 한 마리만 달랑 들고 따라 나섰다. 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아이의 손을 잡아 끈 행동이 지금 생각해 보면 자신의 외로움을 견뎌내기 위한 방편의 하나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모두가 내것이었던 것들을 다 버려두고 홀로 나오는 허전함을 매꾸는 대상으로 아이가 택해진 것이리라.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아버지처럼 미쳐버리기라도 한다면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자 아이를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렸다. 진규는 망상을 털어 내듯 머리를 흔들며 눈을 번쩍 떴다.  
헬렌이 치즈버거와 애플파이를 먹는 동안 커피 한 잔으로 쓰린 속을 달래던 준규는 새벽부터 울려대던 휴대폰의 메시지를 듣기위해 슬그머니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 문을 단단히 걸어잠근 진규는 변기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열었다. 메시지 버튼을 누르고 비밀번호를 입력한 진규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맨 처음의 것은 역시 최상사의 메시지 였다. 마지막으로 오늘 저녁 6 시까지 기다려주겠다, 그때까지 전화가 없으면 곧장 마켓으로 간다, 그런 내용이 어금니를 갈아붙이는 음성으로 떨려 나왔다. 두 번째도 앞의 것과 대동소이한 최상사의 공갈 협박이었다. 세 번째 것은 모든 권한을 최상사에게 일임 한다는 구회장의 메시지였다. 구회장의 그 말은 진규의 문제를 최상사식 폭력적 방법으로 해결하겠다는 최후 통첩에 다름 아니다. 구회장 식으로 해결하느냐, 최상사 식으로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이 결정할 일이다. 그것은 진규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었다. 진규는 씁쓸히 실소하며 구회장의 메시지도 삭제 했다. 다음으로 넷, 다섯 번째의 메시지는 이상한 느낌의 전화였다. 두 차래나 전화를 걸어놓고 말없이 끊어버리는 침묵의 메시지 였다. 혹시 아내가 아니었을까, 진규는 구두코를 노려보며 아내를 떠올렸다.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묵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 아내다, 라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느낌은 속이기 힘들다. 진규는 변기에서 몸을 일으키며 긴 숨을 내쉬었다. 전화의 임자가 아내라고 한들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다. 두 번이 아니라 열 번을 걸었다 해도 침묵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침묵 이외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진규는 느낌으로 온 아내의 잔영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화장실의 수돗물을 대 여섯 번이나 얼굴에 끼얹었다.
진규는 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을 들어 거울에 넣었다. 낯선 얼굴이 찍혀 나왔다. 구겨진 쟈켓에 머리 마저 헝클어진 불혹의 사내가 사선으로 금이 간 거울속에서 일그러져 있었다.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마치 쳇바퀴 밑에서 죽어가는 꽃비처럼 망가지고 늘어진 몰골이었다.
안돼!
진규는 절규하듯 비명을 지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꽃비를 살려야 한다는 절실한 무엇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진규는 두 눈을 부릅뜨며 화장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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