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

2008.12.06 15:20

이용우 조회 수:1639 추천:156

준호는 자신의 손에 집혀져 나오는 것들을 생경한 눈으로 살폈다. 청바지, 여자블라우스와 스커트, 반바지, 원피스, 쟈켓 등 종류도 다양 했다. 박스 속에 처박혀있어서 마구 구겨지기는 했지만 한 눈에 보아도 그 옷들은 사용하지 않은 새것이었다. 종이박스 속에는 아직 더 많은 옷가지들이 담겨져 있다. 준태형은 이런 것들을 왜 모아두고 있을까. 자신에게 거라지 속을 살펴보라고 말하던 수경의 냉랭한 얼굴이 떠올랐다.
자기가 한 번 가봐, 이상해.
수경은 마치 거라지속에 뱀이라도 한 상자 들어 있는 양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내의 행동에 준호는 대뜸 결기부터 앞세웠다.
뭔데 또 그래, 이상한 게 뭐야?
준호는 아내 수경이 준태형에 대해 무슨 말이라도 할라치면 자신도 모르게 심각한 얼굴을 하거나 화를 내거나 했다. 날선 말을 내뱉는 즉시 아차, 하고 후회하면서도 수경이 굳은 얼굴로 큰아빠 말이야... 하고 시작을 하면 어김없이 발갛게 혈압부터 치올렸다. 형에 대한 것이라면 알레르기를 일으킬 만큼 예민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수경이 입을 연다는 것은 그만한 심각성을 지녔다고 보아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형에 대해 언급하는 수경을 욱박지르거나 추궁하는 투로 대하기 일쑤였다. 아니, 어쩌면 수경의 입에 형이 언급되면 예사로운 문제가 아닌 것이 분명하기에 지레 짜증을 부리게 되는지도 몰랐다. 이번엔 또 무슨 일 일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방어적으로 내모는 것이었다.      
또 저런다, 열 내지 말고 가보기나 하세요.
여전한 준호의 상투적인 대응에 수경은 눈을 째리며 돌아섰다.        
준호는 형이 사용하던 간이침대에 천천히 엉덩이를 내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의 따듯한 온기가 볼에 옮겨왔다. 거라지 속의 온도가 몹시 낮다는 것을 깨우쳤다. 며칠 후면 십일월이라는 생각도 났다. 준태형이 멀쩡한 방을 두고 이 썰렁한 거라지에서 자는 것도 마땅찮았다. 그나저나 형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준호는 새삼 아득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아 돈데라 휄로스이 화티가다 라스 골론드리~나...
드르륵거리는 머신소리와 함께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나나무스꾸리의 청량한 음성이 들려왔다. 옆집 거라지에서 넘어오는 이태리 가곡이 그의 마음을 헤집었다.
제비도 마음대로 넘나드는 그곳을 나는 가지 못하네...
저 노래가 형을 떠나보낸 건 아닐까, 거라지의 썰렁한 간이침대에 앉아 듣는 노래가 문득 처량하게 들려 턱없는 짐작이 잠시 떠올랐다. 그러자 그의 마음 한편에서 불끈 분노가 치밀었다. 저렇게 감성적인 노래를 왼 종일 틀어대는 사람이 왜 그렇게 모진 짓거리를 할까, 하는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그대로 두어도 차 두 대가 비켜갈 수 없이 좁은 드라이브웨이에 담을 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다. 설계도에 의해 진행하는 하자 없는 공사라지만 서로에게 전혀 유익이 없는 행위를 굳이 만만찮은 돈까지 들여가며 강행할 필요성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족히 50년도 더 넘은 집을, 그 세월동안 이웃들이 무탈하게 지내왔을 진입로를 준호네의 이사로 막는다는 것은 불편을 넘어 자존심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준태형의 가출이 바로 그 담장 공사로 비롯된 것이기에 그로서는 더욱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준태형이 어느 날 돌아와 높이 쌓은 담을 본다면 아마 목발로라도 때려 부수고 말 것이었다. 옆집 보기 싫어 담쌓는 놈들과 어찌 이웃하고 살것냐, 이사 가자.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집을 나간 준태형은 지금 어디에선가 담 때려 부술 궁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준호가 마켓의 단골손님인 인도계 변호사에게 푸념을 했더니, 오백불만 비용을 들이면 정확히 알 수 있으니 옆집에서 그어놓은 담장선이 맞는지 직접 측량을 해보라고 했다. 준호도 당장은 그래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집이라면 몰라도 리스로 사는 입장에 측량사를 부른다는 게 당치않은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런 법적 시비는 집주인의 몫인 것이다. 준호 입장으로서야 싫으면 이사를 가던가 아니면 변하는 환경에 적응 하던가 그래야 할 것이겠다. 허지만 이사를 한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십여 년 넘게 살았던 킹슬리의 듀플렉스 아파트를 떠난 것도 옆집에 이사 온 흑인남자와 준태형의 불화가 원인이었다. 지금 이곳도 급하게 집을 구하면서 주위에 흑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아주 멀리 외곽지대로 나가던가, 아니면 베버리힐 같은 곳으로 이사하기 전에야, 흑인과 히스페닉을 모두 떠나 살 곳은 이 로스엔젤레스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담쌓기 기초공사를 위해 경계선을 따라 한 뼘 깊이로 고랑을 파놓은 날, 준호는 그 선을 따라 자신의 차를 진입시키는 시험을 했다. 우선 차를 드라이브웨이 입구에 세워놓고 운전석에서 내려 눈짐작을 해보았다. 어깨높이쯤으로 담이 올라간다는 가정아래, 양옆으로 돌출한 사이드미러까지 계산해 보니 고작 두 뼘 정도밖에는 여유가 없었다. 사이드미러를 안쪽으로 접고 진입하면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그런대 그의 승용차보다 한 뼘은 족히 넓을 준태형의 포드웨곤은 문제가 되고도 남았다. 차 세 대 중 수경의 장난감 같은 미니쿠퍼 만이 걱정없이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좁은 뒤뜰에서 차 돌리기가 힘들면 뒷걸음으로도 곧잘 나왔는데 담장이 완성된다면 그것역시 어림없는 일이다.    
아무리 사고와 체질이 다른 이민족이라지만 콧수염이 보이는 적대감은 도가 넘는 것이다. 그와 준태형에게는 물론 아내 수경과 어린 엔디에게까지도 이유 없는 적의를 드러내기 일쑤였다. 인사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준호네 식구가 보인다싶으면 제 편에서 먼저 몸을 틀어버리기 예사였다.
여보, 저 옆집 멕시칸 남자가 우리 엔디 스케이트보드를 집어 내던졌어.
어느 저녁 마켓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간 준호에게 아내 수경이 겁먹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말이 되지 않는 소리여서 준호는 대답 없이 눈으로 설명을 재촉했다.
엔디가 낮에 드라이브웨이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물 마시려고 잠깐 들어왔는데 우당탕, 하는 소리가 들려서 내다보니까 글쎄 엔디 스케이트보드가 우리 거라지 앞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거야. 엔디가 무심코 그 집 드라이브웨이에 스케이트보드를 두고 왔었나봐. 그렇지만 어떻게 아이의 물건을...
수경의 말이 체 끝나기도 전이었다.
이, 도둑놈의 새끼가!
준호 뒤에 서서 수경의 말을 듣던 준태형이 그런 욕지거리와 함께 후다닥, 몸을 돌리더니 목발을 내두르며 옆집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준호가 재바르게 붙잡지 않았더라면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단단히 났을 것이었다.                                
준호는 몸을 일으켜 벽쪽으로 다가갔다. 언젠가 준태형이 내다보던 구멍을 찾았다. 어림짐작으로 와인박스가 쌓여 있는 왼쪽 벽의 키 높이 부근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에 띄지 않았다. 허리를 조금 구부려 보았다. 준태형이 엔디를 어깨에 태우고 활짝 웃는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지난여름 샌디에고 동물원에서 찍은 것이었다. 압정에 꽂힌 사진을 살짝 들쳐보았다. 동전크기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준호는 구멍에 눈을 붙였다.
이쪽 벽을 향해 문이 활짝 열린 거라지 속에 콧수염부부가 앉아 일을 하고 있었다. 쿼러크기의 작은 구멍이었지만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그들의 손동작 하나까지 선명히 보였다. 콧수염은 테이블위에 놓인 무언가를 뒤적거리며 가위질을 하고, 그의 뚱뚱한 아내는 드르륵, 드르륵 머신을 돌리고 있었다. 여자의 몸피가 얼마나 우람했던지 그녀 앞의 공업용 미싱이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콧수염은 카세트 음악에 맞춰 머리를 흔들흔들 내저으며 일을 하고 있었다.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 전형적인 히스페닉 남성의 모습이었다.  
준호는 벽구멍에서 눈을 뗀 후 간이침대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박스속의 옷들이 형과 어떤 연관을 이루는지 모르겠다는 것과, 더는 머뭇거리지 말고 콧수염과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문제가 무거운 돌덩이로 변해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자궁속의 태아처럼 몸뚱이를 웅크렸다.

이곳에 사는 대게의 중남미계들은 보편적으로 한국사람들에게 호의적이다. 생김새나 크기, 그리고 빛깔이 비슷하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더욱 그렇겠지만, 거의 자영업에 종사하는 한국인들과 노동력이 풍부한 그들과의 밀접한 연계성도 한 몫 하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옆집의 마누엘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 년 전 한인타운에서 이사 오던 그날부터 그랬다. 드라이브웨이가 맞붙은 바로 옆집에 새사람이 이사를 오는데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이사 후 일주일이나 지난 어느 아침의 출근길에 준호는 콧수염과 처음으로 조우했다. 준호는 형과 함께 마켓으로 출근하느라 집을 나서는 길이었고, 콧수염의 차는 거라지가 있는 뒤뜰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경계가 분명치 않은 대로 두 집의 진입로가 나란히 붙은 드라이브웨이는 서로 엇갈려 지나치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때 준호의 차는 이십여 메타쯤 되는 드라이브웨이를 거의 다 빠져나간 상태이고 콧수염은 막 꺾어드는 중이었다. 당연히 콧수염이 뒤로 차를 빼거나 방향을 틀어서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콧수염은 꿈쩍도 않았다. 상대의 의도를 읽은 준호가 얼른 차를 후진시켜 길을 터주었다. 콧수염은 준호가 길을 터주는 대로 무뚝뚝하게 밀고 들어왔다. 뒤뜰이 만나는 조금 넓은 곳에서 차를 멈춘 준호가 굿모닝, 하고 먼저 인사를 했지만 콧수염은 겨우 하이, 하며 몇 발짝도 안되는 거리에서 가속 패달을 우웅, 밟았다.
저 도둑놈의 자식이 왜 저런다니?
준태형이 참지 못하고 목발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글쎄요, 저도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요. 좀 별난 사람입니다.
참, 기가 막힐 일이다. 똥 싼 놈이 성낸다더니, 우리 마켓 털어간 놈들이 누군데 저따위 행위를 하느냐 말이다, 이런 싸가지 없는 놈 같으니라고.
준태형의 사고는 단순했다. 불을 지르고 다닌 흑인들은 폭도놈, 부서진 마켓에서 물건을 훔쳐낸 스페니쉬 들은 도둑놈, 이었다. 콧수염 부부가 뒤뜰 거라지에서 자르고 고치는 옷들도 모두 훔쳐온 것을 조금 손보아 팔아먹는 것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흥분한 준태형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무의식중에 담배 찾는 몸짓을 하는 것이다. 금연은 출옥한 준태형의 다섯 가지 약속 중 하나였다.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준태형은 전보다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우선 불룩한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국방색 야전잠바를 벗어던지고 얇은 쟈켓을 걸쳐 입었다. 트레이드마크 같은 목발도 스텐레스 재질의 깔끔하고 날렵한 모양으로 바꾸었다. 항상 찌푸리고 다니던 표정도 억지로나마 웃어 보이려고 나름 노력을 기우렸다. 준태형이 야전잠바를 벗어던진 것은 몸에 총기를 지니지 않겠다는 무언의 표시였다. 형 자신을 지키고 불의를 응징하겠다며 야전잠바 속에 총을 품고 다닌 17년의 세월이 막을 내린 것이며, 더불어 그 세월 뒤에 웅크려 있는 폭동의 기억을 지우겠다는 준태형 나름의 결단이기도 했다.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마켓에서의 총격사건도 만약 그때 준태형이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었다. 마켓내의 물건더미 사이에 코케인박스를 숨겨두고, 마치 제집처럼 드나들며 행패를 일삼던 마약딜러를 총격한 것이, 마켓 근방을 우범지대로 만드는 마약딜러의 보스 한 명을 제거하는 공을 세우기는 했다지만 그래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준태형 삶의 궤적에 한 줄 붉은 금이 그어졌을 따름이었다.    
허지만 아무리 준태형이 기억을 지우고 스스로 결단을 다진다 해도, 결코 자신의 한쪽 다리가 잘리고, 아내를 떠나가게 한 흑인폭동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총도 버리고, 술과 담배도 끊고, 외양도 말끔히 바꿨지만 가슴 밑바닥에 굳어 붙은 회한의 덩어리까지 녹여낼 수는 없는 일이겠다. 간혹 엔디가 없는 날, 형을 깨우기 위해 거라지에 들어갔다가 웅크려 누운 준태형의 등짝을 만나기라도 하면, 그동안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마켓 지붕위로 솟구치던 벌건 불꽃처럼 선명하게 달려들었다. 등짝을 보는 자신의 마음이 그럴진데, 하물며 그 등짝을 짊어진 준태형의 마음이야 오죽할 것인가, 하는 생각에 그는 가슴이 메이곤 했다.

준태형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죠지 영감네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준호는 반가운 마음에 형, 여기 있었어? 하며 다가가는데 어떤 여자가 삼촌, 하며 벌떡 일어났다. 그가 깜짝 놀라 바라보니 십여 년 전 형을 버리고 서울로 떠나갔던 형수였다. 형수님, 언제 오셨어요? 형을 찾은 것보다 더 반가운 마음에 덥석 손을 잡으며 그가 물었더니 형수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 형과 죠지 영감도 벙긋벙긋 웃었다. 형과 형수를 모두 찾은 그도 기뻐서 웃었다. 그런데 한참 웃다보니 세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은 이내 정말 꿈이다, 라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무슨 소리가 들렸다. 바스락 거리는 것도 같았고, 식식 숨을 몰아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를 감지한 의식의 다른 한편에서 춥다는 느낌을 전해왔다. 자신의 몸이 한껏 웅크리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살며시 눈을 떴다. 자신이 준태형의 간이침대에 모로 누워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이미 밖에는 어둠이 내렸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옆집의 뚱뚱한 여자가 작동하는 머신소리는 여전히 드르륵, 드르륵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었다. 준호 자신이 누워 있는 거라지 안에 또 다른 움직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웅크린 몸이 더욱 오그라들며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눈을 오므려 붙이며 움직이는 물체에 시선을 꽂았다. 느낌으로 미루어 그 물체는 준호 자신이 간이침대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두운 거라지 안에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움직이는 물체는 간이침대에서 서너 발짝 떨어진 와인박스 부근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사람의 형체가 분명하지만 몸피가 크지는 않았다. 물건을 뒤적이는 행동의 침착성과 그것에 부수되는 소리의 조심성으로 보아 거라지 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 분명했다. 그에게 뒷모습을 보인 체 편안히 앉아 작업을 하는 모습이 낯익었다. 식식, 숨을 몰아쉬고 물건을 들추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자신이 찾는 물건이 생각처럼 쉽게 손에 잡히지 않자 짜증을 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캄온, 가아시!
종내에는 낮지만 그렇게 불평의 소리를 터뜨렸다. 그 목소리의 임자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준호는 후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런 동시에 궁금증이 부쩍 일었다. 저 아이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이 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너 무얼 찾니? 하며 불을 환하게 밝히고 싶은 충동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정말 봐야할 것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우려심이 생겼다. 그는 숨을 한차래 깊숙이 들여 쉰 후 가만히 지켜보았다.
예스, 아이 갓잍!
드디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는지 아이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만족한 탄성을 터뜨렸다. 그는 상체를 세우며 아이 쪽을 향해 바로 앉았다. 되도록 아이가 덜 놀라기를 바라며 조그맣게 이름을 불렀다.
엔디,
조심한다고 음정을 낮게 깔았지만 신경을 너무 써서 그랬는지 오히려 그의 목소리는 음산하게 그라지 속을 울리고 말았다. 추운 곳에서 잠을 잤고, 장시간 닫고 있던 목을 준비 없이 열어버린 탓도 있을 것이었다.
오호, 마이 가앗! 후이즈 잍?
당연히 아이는 기절하듯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엔디, 나야, 아빠라고.
아빠? 어디야, 어디 있어?
여기, 큰아빠 침대위에 있어, 불 켜고 이리와, 불부터 켜.
오, 대디, 왜 여기 있어? 나 놀라서 다이 할 뻔 했잖아.
전등 스위치를 올린 엔디는 환한 불빛에 드러난 아빠의 모습을 발견하고 준호의 품으로 뛰어들며 가쁜 숨을 헉헉 내쉬었다. 준호는 엔디를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아빠는 여기서 좀 잤어, 그런데 넌 불도 안 켜고 깜깜한 곳에서 무얼 하고 있었던 거니, 그게 뭐야? 어디 좀 보자, 대체 뭘 한 주먹 쥐고 있는 건지.      
그의 말에 엔디는 깜짝 놀라며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그러나 준호는 엔디의 손에 들려진 것이 돈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의 부름에 놀란 엔디가 품으로 뛰어들며 두 손을 앞가슴에 모아 쥐었을 때, 단단히 움켜잡은 아이의 주먹에 든 돈을 보았던 것이다.
왜 그러니, 아빠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거야?
이거 큰아빠 꺼야, 아빠 보면 않되.
어쩌면 준태형이 두어 블록 떨어진 버거킹이나 그 건너편의 비디오가게에 와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엔디가 제 큰아빠의 돈을 저리 급하게 찾을 일이 없을 터였다.
뭔데 그래? 아빠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게 대체 뭐야?
노, 큰아빠하고 프라미스 했어.
아이의 강한 거부 행위에 그는 서운한 감정이 일었지만, 마음 부칠 곳 없는 준태형에게 엔디가 위로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오히려 가슴 한 쪽이 따스해졌다. 피는 못속인다고 아내 수경은 준태형을 불편한 존재로 여기지만 엔디는 언제나 제 큰아빠를 앞세우고 따랐다. 준태형도 엔디에 관해서만은 성질도 고집도 다 내던질 만큼 사랑하고 아꼈다. 준호는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준태형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 시급한 문제이긴 하지만, 그런다고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까지 추궁하고 싶지는 않았다. 엔디를 통해 상황을 전달받으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을 준태형의 모습이 눈에 밟혔지만, 아이를 욱박지르는 것이 어쩌면 형을 닦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던 때문이다. 수경의 힘을 빌리면 엔디를 회유할 방법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엔디를 놓아줄 수는 없었다.
오케이, 알았어. 그런데 엔디야, 너 저 옷은 뭔지 아니? 저 옷이 큰아빠 거야?
준호는 자신의 손에 의해 바닥에 쌓여진 옷 무더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엔디는 제 아빠의 손길을 따라 눈을 돌리더니 또 한 번 펄쩍 뛰었다.
어엉, 아빠가 저렇게 했어? 저거 도네이숀할 거란 말이야.
도네이숀이라구? 어디에다가 도네이숀을 한다는 거야?
그 말에는 아이가 주춤했다. 준호는 근심스런 얼굴로 엔디를 바라보았다.
으음... 몰라, 큰아빠가 그랬어,  도네이숀할 거라고.    
아이는 눈을 슬슬 굴려가며 대답 했다. 잘못 말하면 안 된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 큰아빠를 배려하는 모습이 뚜렸했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준호는 쓴 침을 꿀떡 삼켰다. 오늘은 이쯤에서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디가 제 큰아빠에게 이 상황을 다 고해바칠 것이 분명한데 자꾸 아이를 죄면 다혈질의 준태형이 또 어떤 반응을 할런지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무언가 석연찮은 일이 이 거라지속에서, 그리고 준태형과 엔디 사이에 꾸며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기에 더욱 섣불리 대응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래? 그러면 아빠가 다시 잘 넣어둘게. 대신 큰아빠에게 말하지 마, 알았지?
엔디는 제 아빠가 선선히 물러서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는지 오케이, 하며 거라지를 뛰쳐나갔다. 아이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한기가 몰려왔다. 어떤 방식으로든 수경에게 자신이 본 거라지 상황을 설명해야 할 일을 생각하자 그는 마음이 무거웠다. 수경의 입길에 형이 오르는 것을 그가 싫어하듯, 그녀도 준호가 자기 형의 얘기를 꺼내들면 콧등부터 찌그렸다. 수경은 준태형의 못마땅한 점을 말하고, 준호는 수경에게 너그럽기만을 바라기 때문이었다.
지난 8년의 결혼생활 내내 남편의 형과 한집에 살며 궂은일을 마다 않은 아내의 입장을 모르는바 아니다. 더구나 폭동으로 다리 하나를 잃은 홀시아주버니를 부양한다는 것은 보통 갑갑한 일이 아닐 것이었다. 형과 함께 사는 것이 결혼의 첫째 조건이었다 해도, 가끔씩 터뜨리는 불평정도로 약속을 지켜내는 수경에게 그는 때때로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수경의 입에서 준태형 얘기만 나오면 조건반사적으로 뿜어 나오는 혈기를 어째볼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새벽행상을 나갔다가 청소차에 깔려 참변을 당한 아버지를 대신해 6살 3살의 두 형제는 홀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어린 두 형제는 어머니와 함께 고무다라이 가득한 도라지껍질을 밤이 이슥하도록 벗겼다. 구멍가게에서 물건을 담아주는 종이봉투를 붙이기도하고, 한 달 내내 구슬만 꿰기도 했다. 형 준태가 중학교에 진학할 즈음 종아리가 단단해지기 시작한 형제는 신문을 돌리고 광고지를 붙이느라 잠을 축내며 뛰어다녔다. 차츰 학년이 올라가며 중국집 철가방잡이, 맥주홀의 웨이터보조로 직업이 변해갔다. 대개 야간이나 주말에만 일을 하는 조건이었는데, 그런 것들을 찾아내고 결정하는 모든 권한은 형의 몫이었다. 그는 다만 형이 찾아낸 길을 가면 되었다. 그러면 수입이 늘고 생활이 조금씩 윤택해졌다. 형 준태는 언제나 두 형제가 함께할 수 있는 일자리를 원했다. 동생이 미덥지 못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형으로서의 책무를 다 한다는 뜻 같았다. 준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의 겨울에 홀어머니마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형은 마치 그렇게 될 줄 알고 기다린 사람처럼 그의 손을 끌고 태평양을 건넜다. 재산이 있고 괜찮은 직장을 갖은 사람도 비자가 잘나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국비산업연수생으로 서류를 꾸몄다지만 젊은 두 형제가 한꺼번에 도미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형은 후일 그것 때문에 집 판돈의 절반이 날아갔다고 말했다. 형이 집 판돈을 뭉텅 잘라 쓴 것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런 일을 혼자 구상하고 추진하여 끝내 결행해내고야 마는 집념이 놀라운 것이다. 낯선 땅에 도착해서도 준호는 컴뮤니티 칼리지로 밀어 넣고, 형 자신은 마켓의 박스보이로 일을 했다. 그가 형이 아버지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형은 그의 길을 제시 하고 보호하는 방패요, 세상의 온갖 날 선 것들로부터 동생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을 찢기우고 상처받는 한 마리 짐승이었다. 준태형은 동생 준호를 두 팔로 감싸 안고 하이에나와 맞선 들개처럼 빳빳이 털을 세우며 세상을 향해 으르렁 거렸다.
그런 준태형의 날개가 꺾였다. 폭도들의 총에 불구의 몸이 되고, 아메리칸 드림의 실체였던 마켓이 불타고, 그런 충격을 견디지 못한 형수가 서울로 돌아가 버리자 형의 맹수같이 굳은 의지도 태풍 앞의 나뭇가지처럼 꺾여버렸다. 저돌적이면서도 사려 깊던 준태형이 단순한 적개심덩어리로 변하고 말았다. 정부의 특별융자로 불탄 마켓은 되찾았지만 한 번 상실된 형의 본래 모습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형은 이제 거꾸로 동생의 보호와 부양을 받는 한 마리 병든 짐승이 되어버렸다.      

아 돈데라 휄로스이 화티가다 라스 골론드리~나...
준호는 제비 노래가  흘러나오는 콧수염의 뒤뜰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여전히 콧수염의 뚱뚱이 아내가 돌리는 머신소리도 드르륵, 드르륵 그침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일에 코를 박고 있어서 그가 작업장 앞에 발을 멈추도록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하이,
화들짝 놀랄 줄 알았는데 두 사람 다 누구? 하는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뚱뚱이 부인은 준호처럼 하이, 하며 살랑 웃었고, 콧수염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엉덩이를 들었다.
어 유 비지? 랏어 워크?
어... 낫 마치, 리틀 빗.
일이 많으냐는 준호의 물음에 콧수염은 손바닥을 마주 부비며 많지 않다고 대답 했다. 준호는 담장문제를 결판 지으러 왔으면서도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테이블위에 쌓여 있는 옷더미 위로 시선을 흩뿌렸다. 남미계 핸디맨 한 사람이 하는 일이지만, 그가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부록담장이 벌써 무릎높이까지 쌓아 올려졌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사안이 되어버린 것이다. 콧수염과 협상이 안되면 또다시 이사를 가야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준호도 콧수염처럼 빈손바닥을 툭툭 털며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유어, 쏘윙컨츄렉터, 오어... 얼트레이션?
원래 목적은 꺼내지도 못한 그가 침묵이 어색해서 아무생각 없이 던진 말인데, 콧수염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낯빛을 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콧수염의 시선에 분노가 뻗쳤고, 급격한 흥분으로 벌어진 입술이 마구 경련을 일으켰다. 준호는 표변한 콧수염의 반응에 놀라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당신들 하는 일이 봉제업이냐, 아니면 수선업이냐 라고 묻는 게 저렇게 화를 낼 일인가, 하는 생각으로 그는 의혹에 찬 시선을 감출 수 없었다.
하우 유 노, 쏘윙컨츄렉터? 유 헤브 쏘윙컨츄렉 비지네스?
콧수염은 물러나는 준호의 코밑으로 집게손가락을 흔들어대며 따지고 들었다. 그는 당황했다. 준호는 아니라고, 나는 봉제업을 모를뿐더러 봉제업을 하지도 않는다고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노우, 노, 아임 낫, 아이돈 노우, 뎃 비지네스. 컴 다운, 플리즈 컴 다운!
준호가 진지한 눈빛으로 간절하게 권했지만 콧수염은 더욱 크게 손가락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뚱뚱이 마누라가 미싱을 멈추고 일어나 게빠소, 허니, 하며 만류의 몸짓을 보였지만 콧수염은 아랑곳없이 준호의 턱밑을 파고들었다.
예스, 유 노오, 디스 비지네스. 랏어 코리안 두잉 쏘윙컨츄렉터. 아이 노, 유 노우!
콧수염은 그렇게 마구 단정 지어 말했는데 더욱 놀라운 말은 다음에 터져나왔다.
퍽킹 코리안, 유어 스틸 마이 머니! 유어 스톨렌 마이 가멘트! 코리안 나픈 놈, 캐스키!
콧수염은 삿대질과 함께 목청을 한껏 열어 소리 질렀다. 준호는 턱밑에서 흔들리는 콧수염의 손가락을 한 손으로 후려쳤다. 두고 보려니 가관이 아니었다. 한국 사람이 제 돈과 옷을 훔쳐갔다니, 콧수염의 정신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치지 않았다면 제 집을 찾아온 사람에게 이런 행패를 부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상스러운 한국말 욕지거리를 마구 뱉는 것에도 일면 놀라우면서 한편으로는 부아가 치밀었다.
왓 유 토킹 어바웃, 왓칭 유어 마우스!
준호는 그렇게 말하며 콧수염의 어깨를 뒤로 떠밀었다. 그러자 콧수염이 카브론, 싼아바 비치 따위 스페니쉬와 영어가 뒤섞인 욕설을 쏟아내며 와락 달려들었다. 준호는 뒷걸음으로 물러나다가 무엇인가에 발이 걸려 그만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사태가 그렇게 발전하자 뚱뚱이 마누라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와 콧수염을 가로막아 섰다.
게빠소, 하니! 어 유 크레이지? 캄 온 히얼, 캄 온!  
뚱뚱이 마누라는 제 남편의 팔 하나를 낚아채더니 거칠게 잡아끌었다. 흥분한 콧수염을 집안으로 데려갈 모양이었다. 콧수염은 마누라의 완강한 태도에 떼밀려 들어가면서도 몇 마디 욕지거리를 잊지 않았다.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난 준호가 넘어졌던 자리에 서서 한참 기다리고 있자니 뚱뚱이 마누라가 쥬스 한 잔을 받쳐들고 나왔다. 준호는 순간적인 모욕감에 그냥 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어쩌면 이런 해프닝이 담장문제를 해결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할 것도 같아 콧수염네의 동태를 주시하기로 했던 것이다. 뚱뚱이 마누라는 사과의 미소를 풍성하게 지으며 가져온 쥬스잔을 그에게 권했다.
쏘리, 어바웃 뎃, 쏘리, 윌리 쏘오리.
그녀는 준호를 똑바로 쳐다보며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사과의 말을 했다. 제 남편의 행위에 대해 진정으로 미안해하는 모습이 준호의 마음에 그대로 전해졌다. 거라지 구멍으로 내다보던, 그저 뚱뚱하고 평범한 남미계 중년여자 라는 생각이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 지성미를 갖춘 그러면서도 그녀의 몸피처럼 마음이 너그러운 여인으로 달리 보였다.
잇즈 오케이, 낫 유어 프라블럼, 뎃즈 유어 허즈벤드 폴트.
준호는 당신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이 잘못한 것이라고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콧수염의 잘못을 확실히 못박아두자는 생각에서였다. 너무 입바른 소리로 들렸는지 잠시 눈꺼풀을 달싹 치켜뜨던 그녀는 이내 생긋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예스, 아이 노. 음... 벗더... 히 톨미, 투 텔유 댓즈 히 쏘리. 히 쌔이드 윌리 쏘리.
그렇게 열이 올라 씩씩거리며 자신을 땅바닥에 밀어 던진 사람이 행여나 한순간에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의 말을 했을까, 콧수염이 사과했다는 말은 그녀가 지어낸 것이 틀림없었다. 허지만 아내 된 입장으로선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준호는 이쯤에서 담장문제를 꺼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흠, 헛기침을 하며 팔짱을 끼었다. 그때 방금 전까지 미안한 표정을 짓던 여자가 정색을 하고 미스터, 하며 준호처럼 팔짱을 껴붙이는 것이었다. 심각한 얼굴이었다. 뚱뚱이 마누라가 왜 갑자기 돌변하는지 몰라 그는 어리둥절했다. 그는 조금 전에 콧수염도 그랬는데, 여자 또한 이렇게 표변하는 것으로 보아 내외의 공통점이 변화무쌍이라는 생각을 했다.
유 노 왓, 마이 허즈벤드 앵그리?
준호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자기 남편 화난 이유를 그로서는 알 수도 없을뿐더러, 이미 콧수염의 정신 상태를 온전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기에 여자의 말에 대꾸할 마땅한 대답이 없었던 것이다.
헤브 앁 히얼. 플리즈, 헤브 씨트.
여자는 무슨 긴 말이라도 하려는지 그에게 앉기를 권했다. 그는 여자가 내미는 미싱의자에 주춤주춤 엉덩이를 내렸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로서는 잠시 여자의 얘기를 들어주다가 담장문제를 꺼내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그런데 잠시 뜸을 들인 여자가 호오, 숨을 고른 후 들려주는 얘기는 준호의 가슴을 쇠망치로 힘껏 내려친 이상의 충격을 주었다. 수굿하던 콧수염이 왜 갑자기 화를 내며 자신을 밀쳤는지, 온화하고 너그럽던 여자가 왜 갑자기 정색을 띄는지 하는 의문들을 한꺼번에 깨우치고도 남음이 있었다. 굳은 표정을 조금씩 누그러뜨려가며 차근차근 조리 있게 풀어가는 여자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대충 이렇다.                
마누엘(콧수염)은 30년 전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올라왔는데, 18살이던 그때부터 대부분의 미국생활을 다운타운의 봉제공장에서 보냈다. 청소를 비롯한 공장의 잡다한 허드레 일로 시작해 기술자가 되었고, 5년 전에는 그동안 일하던 봉제공장을 인수하여 꿈에 그리던 비지네스 오너가 되었다. 두 내외가 열심히 일한 결과 비슷한 시기에 지금의 집과 봉제공장을 인수하게 되어, 그들은 드디어 아메리칸드림을 이루었다고 큰 기쁨에 들떠있었다. 그런데 한국인 사장으로부터 인수한 봉제공장의 머신 40대 중 25대가 회사로부터 빌려온 리스머신으로 밝혀졌다. 공장을 인수한지 3개월 후 머신회사로부터 고지서가 날아오고서야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때는 이미 공장을 판 한국인 사장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마누엘이 한국인 사장과의 계약서를 내보이며 억울함을 주장했지만 머신의 일련번호까지 기재되어 있고, 그가 공장을 인수하기 1년 전의 날짜로 작성된 것이 분명한 리스계약서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리스회사에서 25대의 머신을 가져가고 남은 것들로는 도저히 공장을 돌리기가 어려웠다. 각기 기능이 다른 머신들의 작업비율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은 기계들도 대부분 수명이 다한 낡은 머신들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마누엘은 그 중 몇 대의 머신을 자신의 거라지로 옮기고 봉제공장문을 닫아버렸다. 그때 가져온 머신으로 그들은 거라지에서 옷수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세탁소와 옷가게들로부터 일감을 가져다가 줄일 곳은 줄이고, 늘릴 곳은 늘려주는 일로 두 부부가 생활을 삼는다고 했다.  
준호는 그녀가 들려주는 사연을 들으며 얼굴이 스멀거렸다. 마치 자신이 그들에게 봉제공장을 팔았던 사람이기라도 한 듯 자꾸 어깨가 아래로 처졌다. 이사 오던 첫날부터 냉랭하던 그들의 태도가 이해되고도 남았다. 준호가 그런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여자가 무슨 말인가를 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그가 뭐라구요? 하는 눈으로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위 루징 퍼 썸 가멘트, 에프터 유어 리브 히얼.
준호는 자신이 다시 말해달라는 눈빛을 짓고도 그녀가 하는 말을 당장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알아는 들었는데 그게 정말 자신이 이해한 그 말이 분명한지를 모르겠는 것이었다. 그녀 말대로 하면, 당신들이 이사 오고 난 후로 가끔씩 우리 옷가지가 없어진다, 는 것이었다. 여자가 지금 우리 이사후로 주문받은 옷이 없어진다는 말을 하는 거지... 그렇지... 우리가 옷을 훔쳐가서 그래서 담을 쌓는다는 말이지, 그런 것이지... 그렇지... 그렇게 말하는 거지... 준호는 혼자 말로 연거푸 중얼거렸다. 그렇게 말을 되새김질할수록 가슴이 둥둥 뛰었다. 지난 저녁 거라지의 종이박스 속에서 쏟아져 나오던 옷가지들이 떠올랐다.
청바지, 여자블라우스, 스커트, 쟈켓...
그거 도네이숀 할거야, 큰아빠가 그랬어. 하던 엔디의 목소리도 환청처럼 들려왔다. 준호는 자신의 머릿속이 훵 하게 비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의자에 앉아 있어도 어지러웠다. 아무 곳에나 들어 눕고 싶었다. 거라지 속 차가운 형의 침대라도 상관없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저 이 자리를 벗어날 수만 있다면 뚱뚱이 마누라의 얼굴이 보이지만 않는다면 어디에서라도 깊이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때 무엇인가 엄청난 것이 무너지는 소리가 꽝! 하고 터졌다.
오우, 마이 갓!
뚱뚱이 마누라가 방금 전의 무너지는 소리 못잖게 큰 비명을 지르며 뒤뚱뒤뚱 달려 나갔다.
왓 헤픈!
문을 박차며 뛰어나오는 콧수염의 떨리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콧수염의 욕지거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갓 데미, 퍽킹 코리안! 나픈놈, 캐스키!
준호가 어지러운 눈에 간신히 초점을 맞추고 바라보니 무너진 벽돌조각위로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 준태형의 포드웨곤이 무참하게 처박혀 있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0 하이꾸 (동심의 세계) 이용우 2008.12.06 2875
29 한국어 (동심의 세계) 이용우 2008.12.06 2702
28 꿈, 강아지 (동심의 세계) 이용우 2008.12.06 2465
27 In The Year of 2026 (아이 마음) 이용우 2008.12.06 2382
26 모래산 이용우 2008.12.06 2360
25 아빠 와이프 (동심의 세계) 이용우 2008.12.06 2203
24 선거 (아이 마음 어른 마음) 이용우 2008.12.06 2140
23 헤븐 스트릿 이용우 2008.12.06 1949
22 우기(雨期) 이용우 2004.04.01 1824
21 낮 술 이용우 2002.12.21 1686
20 첫영성체 (동심의 세계) 이용우 2008.12.06 1677
19 꽃 말리는 여자 이용우 2002.12.21 1659
» 제비 이용우 2008.12.06 1639
17 양철지붕 이용우 2008.12.06 1538
16 엔젤 마미 이용우 2008.12.06 1379
15 아파트 가족 이용우 2008.12.06 1377
14 잉꼬 아침 (동심의 세계) 이용우 2008.12.06 1373
13 로스엔젤레스는 겨울 이용우 2002.12.21 1331
12 생명보험 (동심의 세계) 이용우 2008.12.06 1320
11 달그림자 이용우 2008.12.06 1308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7
어제:
1
전체:
32,6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