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젤 마미

2008.12.06 15:25

이용우 조회 수:1379 추천:140

학교 정문으로 차를 진입시키며 힐긋 시계를 보니 7시를 5분이나 넘어서 있었다. 가끔 이런 저런 이유로 늦을 때가 있기는 했지만 오늘처럼 늦은 적은 없었다. 늦었다는 것도 6시를 넘어섰다는 말이지 최종 픽업시간 인 6시 30분을 넘긴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급히 차를 주차시키고 서둘러 계단을 올랐다. 그린이는 약속한 일에 조금만 차질이 생겨도 불안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다. 이미 울어도 몇번을 울어서 눈이 벌개져 있을 그린이의 겁먹은 얼굴이 사진처럼 보여진다.
픽업시간을 넘긴 것은 분명 나의 잘못이면서도 이렇게 시간에 쫓겨 애가 닳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불쑥 치솟는 게 있다. 상대가 분명한 울화가 목구멍을 비집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다. 자기 손으로 기르지도 못할 것을 궂이 우겨서 낳아놓더니 기저귀 떼기 무섭게 안녕, 하고 떠나가버린 여자가 이럴 때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고 미워진다는 말이다. 아이가 설거지하고 라면이라도 제 손으로 끓여 먹을 수 있을 때, 아니, 스쿨버스 타고 돌아와 아파트에 불이라도 밝힐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있어주었더라면 좀 좋았을까.  
불을 환히 밝힌 픽업룸은 문이 활짝 열린 체 조용했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는 시간이 지났으니 들리지 않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언제나 왕왕 틀어져 있던 TV 소리까지 잠잠한 것은 조급한 마음을 더욱 옥죄었다. 나는 픽업룸 안쪽으로 머리를 들여밀기 전에 잠깐 멈춰서서 한차래 심호흡을 했다. 그런 후, 할로윈 장식물이 늘어져 있는 문설주에 어깨를 기대며 이마부터 천천히 얼굴을 집어 넣었다.
픽업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린이도 없고 아이들을 돌보는 교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책상과 의자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고 바닥에는 크레용, 색종이, 캔디껍질 따위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다. 왜 아무도 없지, 그린이는 어디에 있는 거야, 그런 의문속에 나는 언 듯 아래층의 도서관이 생각났다. 언젠가 늦어졌던 날 허둥지둥 학교 안을 헤맨 끝에 눈이 빨개진 아이를 도서관에서 찾아낸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건물 외곽에 붙은 시멘트 계단을 중간쯤 내려갔을 때 층계 아래쪽에서 누군가 나를 올려다 보며 쉰목소리를 던져왔다.
“학생 픽업 오셨어요?”
이미 어둠에 잠긴 바깥날씨 때문에 얼굴이 잘 안보였지만 야구모자를 뒤통수에 삐딱하게 얹은 것으로 보아 학교건물과 청소를 담당하는 관리인남자 같았다.
“네, 우리 아이가 어디에 있나요?”
나는 급한 마음에 인사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아이의 소재부터 물었다.
“남자 아이예요, 여자 아이예요?”
나는 안도의 한숨이 후 나왔다. 나만 늦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순간적으로 위로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아이가 잘 보호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자 아이예요, 이름은 이 그린 이구요.”
“아, 그린이 아빠시군요. 이리오세요, 아이들은 모두 오디토리움에 있습니다.”
관리인 남자는 내가 내려오기를 기다려 앞장을 서더니 묻지 않았지만 궁금했던 말을 주섬주섬 풀어놓았다.
“픽업룸을 담당하는 보조교사들은 근무시간이 지나서 모두 퇴근했구요, 픽업시간을 넘긴 두 아이는 오디토리움으로 보냈습니다. 지금 연극부 학생들이 성탄공연을 위해서 연습을 하고 있거든요. 픽업룸에서 텔레비젼을 보는 것 보다 연극구경을 하는 게 더 유익하잖아요.”
“아, 네, 그렇구 말구요. 이거 픽업시간을 넘겨서 죄송하기 짝없는데 이렇게 교육적인 배려까지 베풀어주시니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여러 가지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그런 결정을 건물관리인이 하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잠깐 스쳤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내 아이가 그런 배려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해서 마치 교장선생님을 대하듯 관리인남자에게 깍듯한 예의를 차렸다.
오디토리움의 뒷문으로 슬그머니 들어갔더니 무대위에서는 연극부 아이들이 춤과 노래를 섞은 동작으로 리허설에 열중이였다. 객석에는 그린이와 남자아이 하나 그리고 지도교사가 등을 보이고 앉아있었다.
나는 잠시 뒤쪽에 선채로 무대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이 하고 있는 연극은 ‘성냥팔이 소녀’ 였다. 마침 주인공 소녀가 마지막 성냥을 켜자 촛불을 환히 밝혀 든 할머니가 나타나 소녀의 손을 잡아일으키는 장면이었다. 소녀가 할머니를 쳐다보며 반가운 미소를 짓는다. 앞에 앉은 지도교사가 손벽을 탁탁 치며 일어났다.
“자, 다시 한 번 하자. 할머니가 나타날 때 죠이스가 얼굴을 돌리며 놀란 표정으로 활짝 미소를 짓는거야, 반가우면서도 놀란 표정으로 말이야. 알았지?”
그때 지도교사의 손뼉치는 소리와 높은 음성에 정신이 들었는지 그린이가 뒤로 고개를 돌려왔다. 그린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린이는 방금전 연극 교사의 말처럼 놀라고 반가운 미소를 활짝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종종 걸음으로 뛰어와서는 허리춤에 난짝 매달리더니 쿨쩍쿨쩍 울음을 터뜨렸다.
“연극 보니까 슬펐어?”
나는 그린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물었다.  
“아니야, 아빠가 늦게 와서 슬픈거야.”
내 말에 그린이는 금시 토라진 목소리를 내었다.                    
“그래그래, 미안하다, 아빠가 늦게 와서. 그대신 오늘은 그린이 좋아하는 샌드위치 사줄게 서브웨이에 가서, 아니면 엘뽈로 치킨 먹을까, 그러면 됐지?”
“싫어, 그런 거 다 사주고 늦게 오지도 말아야 해, 씩스터리 넘으면 않돼.”
샌드위치 사준다면 뭐든 수월하게 넘어갔는데 이번만큼은 꼬리가 달린다.
주차장으로 나와 차에 오르면서도 그린이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백밀러로 넘겨다 보니 이마를 찌그려 샐쭉하게 늘어선 눈매에 심각함이 나란히 붙었다. 백팩은 발치께로 던져두고 치켜든 턱을 외로 꼬고는 팔장을 껸다. 이제 여덟 살을 갓넘어선 3학년짜리 아이가 언제부터인지 제 맘에 안들면 저렇게 대뜸 팔장부터 껴붙인다. 어디서 배웠을까, 조그만 턱을 발딱 치켜들고 가녀린 팔을 아주 굳세게 질러넣은 모습을 보면 언제나 웃음이난다. 그렇지만 지금 웃으면 안된다. 저 모습은 이제 무언가 따질 게 있다는 자세이다. 제 나름대로는 몹시 심각한 상황이라는 뜻이다. 나는 헛기침으로 마음을 다잡으며 시선을 비꼈다.
“아빠, 오늘 왜 늦었어?”
나는 흐음, 하고 어깨를 떨구었다. 그럴줄알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면 이미 수도없이 반복을 거듭한 레파토리들 뿐이다. 갑자기 일이 바빠서였다든가, 101후리웨이가 츄레픽이 걸렸었다든가, 가끔은 하일렌드에서 내려 보니 헐리웃볼에 큰 공연이 있어서 길이 막혔었다든지 하는 두서너 가지의 이유가 전부였다.
허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일을 일찍마쳐서 시간이 남은 게 오히려 사고였다. 오후 3시쯤 퇴근을 하며 세탁소에이젼시를 하는 친구에게 심심풀이 전화를 한 것이 늦어지게 된 사연의 첫단추였다. 늘 배달해주던 세탁물이 오늘은 사정이 생겨서 친구가 직접 픽업을 해야 한다며 1시간 만 가게를 지켜달라는 부탁이었다. 못해줄 이유가 없었다. 1시간이라면 넉넉잡아도 5시에는 그린이를 데리러 갈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친구의 세탁소에서 학교까지는 체 10분도 안되는 거리였다. 그래서 오케이, 했던 것이 무려 7시가 다 되어서야 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세탁물을 가지러 405를 타고 토렌스로 내려갔던 친구가 사고난 후리웨이에 3시간이나 갇혀버렸던 것이다.
허지만 이것을 아이에게 사실대로 말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누라들도 이해 하지 않으려할 사연을 8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알아들을까, 공연히 왜?왜? 하며 말만 길어질게 뻔할 뿐이다. 나는 또 한차래 흐음, 하고 숨을 가다듬었다.
“그린아, 너에겐 엄마가 필요해.”
나는 백밀러로 그린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근엄하게 말했다. 샐쭉하게 아미를 내려깔고 있던 그린이는 무슨 소리냐는 듯 힘풀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상찮은 엉뚱한 말이 제딴에는 무척 당황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엄마가 있으면 늦게 픽업하지 않을 거 아니야, 아빠가 일을 많이 해도 되고. 발레학원도 제시간에 데려다주고, 영화도 보러 가고, 뮤지움에도 가고...”
말이 너무 멀리나갔다 싶기도 했지만 이왕 내친김에 가는 데까지 가 보았다. 전에도 비슷한 말을 두어 차래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마다 아이는 ‘노!’ 하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거냐, 아이가 더 크기전에 엄마를 들여야 마찰이 적다구, 혼자 살 작정이 아니면 하루라도 빠른게 좋아’ 라며 재밌어 죽겠다는 얼굴로 책임못질 걱정들을 마구해대었다. 들어보면 말이야 맞는 말이다.
허지만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일은 하고싶지 않다.
그렇더라도 세상 일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혹시 아니, 언젠가 닥치게 될 것을 짐짓 외면한다고 문제가 없어지는가.
이런 생각이 쌓여 기회 있을 때마다 아이의 마음을 떠보는 것이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더라도 충격이 크지 않토록, 완충작용이라도 하라는 의미에 다름아니다.
그린이는 가로등이 명멸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체 아무 말도 없었다.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노! 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지난 두어 번은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큰소리로 ‘노!’ 하고 성난 얼굴을 했었다.
으레 노! 라는 소리가 터져나오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잠잠하니 노회한 마음을 들킨 것같아 얼굴이 뜨거웠다.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8살 아이가 무심한 얼굴로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는 모습은 두고 보기에 전혀 아름답지 않은 그림이다.
그린이는 잠이 안오면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어느 밤인가도 침대에 나란히 누워 동화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그때 천사가 나오는 대목을 읽었던걸까, 그린이가 갑자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빠, 마미가 헤븐에 갔으면 엔젤이 된거지?”
하늘나라로 간 엄마가 헤븐에 있는 것이야 너무도 당연한 것이지만 천사가 됐을 거라는 생각은 그때 처음 떠올린 모양이었다.
“응, 그래, 엄마는 헤븐에 사니까 엔젤이지. 그럼, 엔젤이구 말구.”
나는 지체없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린이는 신이 났다.
“숄더에는 화이트윙이 달렸고 헤드에는 훌라워크라운을 쓴 엄마가 클라우드를 타고 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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