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림자

2008.12.06 15:31

이용우 조회 수:1308 추천:128

칸막이 너머의 여자가 경자 누님인 것이 분명했지만 순우는 알은 체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경자 누님이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열심히 통화를 하고 있어서도 였지만, 그 통화 내용이 자신을 숨기고서라도 엿들어야 할만큼 흥미로운 것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여긴 주근깨 많은 여자가 미인이잖아, 호호호. 응... 그럴 수도 있지. 얘, 그것 보다도 난 걔가 웨츄레스 한다는 게 좀 그렇더라. 응... 응.. 아니지, 회화학원이라도 다니고, 또 자기 적성에 맞는 쟙츄레이닝도 받고 해서 미국생활을 제대로해야지 웨츄레스가 뭐니.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손님들이 던져주는 팁 맛에 빠지면 날라라 삼천리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더라. 응... 뭐라구? 야, 내가 바보냐 웨츄레스라고 말하게. 그냥 언니네 가게에서 일 도와주고 있다고 했어. 호호호, 그렇지, 인연이 되어 자기들 끼리 좋다면 뭐가 문제겠어. 참, 혜숙아, 걔 이혼한 남편과 아이들은 서울에 있다고 했지? 그럼, 아무리 이혼을 했어도 멀리 있는 게 낳지 코 앞에서 알짱거리면 신경 쓰이잖아. 그래, 그렇지... 어머, 혜숙아, 어디서 전화 들어온다. 그래, 내가 수시로 상황을 알려 줄게. 응... 알았어, 끊는다, 바이.
경자 누님이 언제 칸막이 한 장 너머 순우의 뒤쪽에 자리를 했는지 몰랐다. 넓직한 칵테일바의 그 많은 자리를 다 버려두고 연속극의 한 장면처럼 서로가 등을 대고 앉다니 참으로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한인타운을 피해 말리부 바닷가로 만남의 장소를 잡았는데 공교롭게도 소개장이가 등 뒤에서 비밀을 털어놓는 꼴이다. 경자 누님은 혜숙이라는 친구와 전화를 끊고 연해 새로운 상대와 통화를 시작했다.  
여보세요? 아이고, 명희 씨? 응... 어디? 학교 앞이라니... 뭐, 피 자로 시작 한다구? 정문까지 잔디가 좌악 깔려 있어? 어머나, 그럼 페퍼다인 대학이잖아! 어머, 너무 멀리 갔어, 어떻허나, 다시 유턴해서 돌아와야지 뭐. 그럼, 한 오 마일은 더 갔어. 뭐라고? 왜 안보였을까, 건물 벽에도 써 있고 입간판도 높이 달려 있는데... 스펠? 오, 스펠링을 다시 불러 달라고? 그래, 알았어. 엠, 오, 오, 엔... 에스, 에이치, 에이... 디, 오, 더블유. 문쉐도우, 달그림자라 이 말이야. 응? 그래 에스, 에이치, 에이. 그리고 디, 오, 더블유. 아니야, 에이 다음에 디, 오, 더블유라니까... 이봐요 명희씨, 그렇게 다 외우려 하지 말고 그냥 엠,오,오,엔 만 보이면 파킹장으로 들어와요. 그리고 유턴 할 때 조심해, 일 번 도로는 하이웨이라서 차들이 무섭게 달린다니까. 응, 그래, 그래요.  
전화를 끊은 경자 누님은 어유, 저런 멍청이 같으니라구... 하고 투덜거리며 어디론가 또 다이알을 누르더니 얘, 얘, 글세 말이야, 하고 통화를 시작한다. 속이 타는지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졌다.
지원아, 혜숙이 조카 명희 말이야. 걔 어떤 애야? 넌 혜숙이 하고 친하니까 그 집안에 대해서 좀 알 거 아니야. 으응, 내가 혜숙이 조카를 어떤 사람에게 소개 했거든, 그래서 묻는 말이지. 그래, 쓸만하냐 그 말이야. 그럼, 이혼 한 거 알지. 남자쪽도 재혼이야. 그건 서로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 응, 응... 혜숙이야 뭐 자기 조카니까 예쁘고, 센스 있고, 여성 답다고 칭찬이 자자 한데 그거야 그 쪽 말이고... 응, 그래? 혜숙이 말로 일류는 아니지만 대학 나왔다고 하던데... 어머,어머, 초급대학! 이 년제? 그것도 졸업은 못했다고? 어휴, 그 여우같은 기집애, 그러면서도 시침 뚝 따고 대졸이라는 거야, 세상에. 호호호, 그거야 그렇지. 중년들의 재혼에 학벌이 중요한 건 아니지. 그래도 서로 수준이 맞아야 대화도 되고 재미를 만들 것아니니. 뭐? 남자쪽? 그럼, 그건 내가 보증하지. 내 동생 윤호와 대학 동창이야, 케이에스 마크지. 인물도 괜찮고, 재력도 빵빵 해. 지금 하이스쿨 다니는 아이들 둘 만 대학에 보내고 나면 말 그대로 파라다이스의 여왕이 되는 자리 라니까.    
경자 누님의 수다에 입꼬리를 늘어뜨리고 있던 순우는 재력이 빵빵 하다는 소리에 미소가 싹 가셨다. 집과 리커스토어를 내던져야 할 상황에 처한 자신의 입장을 잘 아는 경자 누님이 어떻게 재력이 빵빵하다는 말을 저토록 신나게 지껄일 수 있는지 어안이 벙벙 했다. 벌써 몇 차래나 권하는 것을 지금 여자나 만나고 다닐 상황이 아니라고 극구 사양하자 오히려 이럴 때 새로운 방향에서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며 막무가내로 약속을 잡은 사람이 어떻게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재력 빵빵이니 파라다이스 여왕이니 하고 교언을 하는 걸까. 순우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그만두세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등을 맞대고 있는 두 사람을 빼고는 모두가 다른 민족들이라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도 없었다. 순우가 이럴까 저럴까 머리를 굴리는 사이에 경자 누님의 통화 상대는 어느새 명희라는 여자로 바뀌어 있었다.
응? 뭐라고? 산타모니카 피어가 보인다구? 아니, 그러면 또 지나쳤잖아... 아이고, 어쩐담. 문, 이라는 간판을 못봤어요? 엠,오,오,엔 을 못봤느냐고? 그래 내가 뭐랬어요, 일 번 하이웨이는 차량들의 속도가 후리웨이 못지 않다니까. 에이구, 엠 자를 봤으면 그냥 들어오지 그랬어. 응? 다시 돌아오면 이번엔 찾을 자신이 있다구요? 어휴, 어쩌겠어 그럼 얼른 차를 돌려요, 조심하고... 그래, 그래요.
어유, 못말려... 어쩌구 하며 딸깍 휴대폰을 접었던 경자 누님은 스피드 다이알을 눌렀는지 대뜸 얘, 혜숙아! 하며 숨찬 소리로 상대를 불러 내었다.
문쉐도우가 말리부 초입에 있다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지 아니? 아까는 위로 지나치더니 이 번엔 또 아래쪽으로 내려갔어. 산타모니카 피어를 보고서야 다시 전화를 했더라니까 글세. 걘 말리부에 바람 쐬러도 안왔었나, 그렇게 모른담... 혜숙아, 네 조카 정말 대학 나왔니? 그럼, 중요하지, 소개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니, 길을 지나쳤대서가 아니야. 아무리 영어라지만 보통명사 정도는 알아 들어야 하는 것 아니니, 대학쯤 나왔다면 말이야. 문, 이라는 글자만 보면 그냥 들어오라고 했는데 그걸 못읽어서 또 지나쳤단 말이야. 아이, 어쩜 좋니? 약속 시간도 다 됐는데...
순우는 피식, 웃음이 났다. 경자 누님의 입을 빌어 나온, 이제는 그곳을 찾을 수 있다는 여자의 단순한 용기가 잠시 청량감을 주었던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재력 빵빵이나 파라다이스 여왕을 향한 속물적 갈망에서 비롯하더라도 목표를 향해 부단히 나아가는 노력만큼은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순우는 조금전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던 생각을 바꿨다. 어쩌면 경자 누님의 빈말, 새로운 방향에서의 돌파구가 그녀로 해서 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십분의 일쯤 들었던 때문이었다. 이제 곧 달그림자로 들어 설 여인, 얼굴에 주근깨가 앉은 파라다이스 여왕을 맞기위해 순우는 출입구를 향해 몸을 바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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