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깨비

2008.12.06 15:42

이용우 조회 수:1221 추천:159

“헬로우, 디스이즈 캐빈, 스피킹.”
기름기를 듬뿍 바른 미성으로 호기롭게 셀폰을 열어젖힌 허중일의 목소리가 잠깐 침묵으로 긴장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한 옥타브를 껑충 뛰어 오른다.
“아, 오여사님? 아이구, 이거 제게 전화를 다 주시고... 네, 오늘이 주말 맞지요. 프라이데이, 비 오는 주말... 네, 저야 무슨 힘이 있나요.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사람인데... 네에, 여부가 있겠습니까.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회관에서 뵙겠습니다. 오케이, 바이. 으흠.”
셀폰을 접어 윗주머니에 넣던 허중일의 시선이 슬쩍 넘어 온다. 경수는 모니터에 코를 박고 부서져라 자판을 두드리는 것으로 허중일의 통화를 못들은 척 한다. 허중일은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슬몃 돌아 앉으며 집어넣던 셀폰을 다시 꺼내든다. 허중일의 목소리가 좀전과는 달리 실버레이크의 물안개처럼 착 내려깔린다.  
“수지? 나 캐빈이예요. 으음 다름이 아니고 오늘 저녁 약속을 내일로 옮겼으면 하는데... 괜찮겠지요? 그래요, 갑자기 회사에 일이 생겨서... 아, 미안. 대신 내일은 더 근사한 곳으로 모실테니까. 오케이, 바아이. 으흠.”
통화를 끝낸 허중일이 이번에는 턱을 달랑 치켜들며 곁눈질을 한다. 경수는 아예 고개를 외로 틀며 입속에서 욕을 쏟는다. 에이, 떡으로 똥만들어 먹을 놈아, 제발 분수를 알아라, 이 허깨비 자식아. 경수는 마치 컴퓨터자판이 허중일의 마빡이라도 되는 양 손가락을 바짝 세워 팍팍, 내려찍는다.
타운의 식당과 커피샾을 쥐방구리처럼 들락거리던 허중일이 ‘캐빈’ 이라는 이름을 덜컥 달아붙인 것은 그가 엘에이에 온지 한 주일도 채 안되어서였다. 신분에 하자가 있던 말던 미국에 왔으니 영어 이름이나 하나 짓겠다는 걸 말릴 이유는 하등 없다. 허지만 나이가 마흔을 훌쩍 넘긴 인간이 채신머리없게 ‘캐빈’ 이 뭐란 말인가. 젊잖게 ‘제임스’ 아니면 ‘스티브’ 쯤으로 작명을 했더라면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여북 편했을까. 무슨 유행인지 한국계 젊은이 둘 중 하나가 ‘캐빈’ 인데 거기 늙은 캐빈이 또 영역을 불린 것이다. 그 이름이 미국식으로 부르면 ‘캐빈 허’ 가 되지만 한국식으로 부르면 ‘허캐빈’ 이 된다. 경수는 두 번 생각할 것없이 ‘허깨비’ 로 머리에 박았다.  
허중일은 미국에 왔으니 말을 배워야한다며 영어학원에 등록을 하고, 아들 둘에 마누라까지 세 식구가 서울에서 빵빵하게 숨쉬고 있는데도 현실적 독신이라며 목련횐가 수련회라나 하는 싱글클럽에 가입을 했다. 영어의 생활화를 내세워 전화 수신의 시작은 언제나 ‘헬로우’ 로, 끝은 여지없이 ‘바이’ 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런 것들이야 눈꼴은 사납지만 경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문제의 심각성은 허중일이 제품 세일을 핑계로 근무시간의 태반을 싱글클럽 여자들과의 전화질에 허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게 바로 자기 나름의 세일방법이라며 너스레를 떨지만, 허중일이 경수의 건강제품회사에 근무를 시작한 지난 3개월 동안 판매한 것이라야 고작 비타민 5박스가 전부였다. 실적없는 직원에게 지급하는 보수도 아깝지만 더 큰 고민은 경수 자신이 허중일의 손윗 동서가 된다는 사실이었다. 허중일이 아닌보살처럼 행동하지만 경수의 느낌과 짐작으로 감지하는 심각성은 위험수위를 넘고 있었다. 얼마전부터는 허중일이 방을 얻어 나가겠다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경수 아내도 무슨 낌새를챘는지 밖에서 뭔일 있는지 모르느냐고 그를 몰아세웠다. 처재가 부도로 파산한 허중일을 보내며 제 언니인 경수의 아내에게 한 가장 큰 부탁이 여자문제였다. 아내가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차 하다가 잘못되면 양뺨에 불나기 십상인 상황에 처했다. 경수는 지금이 십여년 미국생활의 최대 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여기가 캐빈 허 사장님 회사... 맞나요?”
문을 빼꼼히 연 사십대 초반의 여자가 그렇게 물었을 때는 허중일이 사무실을 떠난 지 한 시간쯤 후였다. 겨우 얼굴만 들여민 상태의 여자는 그러나 사무실 내부를 재빠른 눈으로 훑었다. 경수는 느낌이 나빴지만 어정쩡하게 무슨 일이신대요? 하고 물었다. 여자는 바짝 추켜세웠던 어깨를 호옥, 하는 날숨과 함께 풀어내리며 그제서야 문을 들어섰다. 여자는 긴장이 풀어진 듯 사무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털석 몸을 부렸다.
“아, 너무 연락이 안되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방을 옮긴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아파트 메니져는 자꾸 독촉을 하고 그래서 할수없이... 아유, 나좀봐, 사장님께 해야할 말을. 아니, 캐빈 허 사장님은 안계세요?”
여자가 문을 빼꼼히 열었을 때부터 기분이 아리까리 했던 경수도 그만 뼈마디가 흐믈흐믈 녹아내려 의자 등받이에 스르륵 몸을 눕혔다. 그런 와중에 경수는 생뚱맞게도 저 맹한 여자와 허깨비가 잘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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