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보험 (동심의 세계)

2008.12.06 15:44

이용우 조회 수:1320 추천:147

나는 그린이에게 별별 이야기를 다 한다. 열 살이 채 안된 아이가 감당은 고사하고 내 말을 본뜻 그대로 알아듣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워 하면서도, 나는 틈나는 대로 일러주고 가르쳐주고 의논한다. 어리긴 하지만 같이 사는 직계 가족이라고는 오직 그린이 하나 뿐이니 정확히 이해 하건 말건 알릴 것은 알리고 일러 둘 것은 일러 두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다.
무슨 교육시키듯 일부러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가령 장농을 뒤지다가 노트뭉치가 나오면 ‘이거 아빠 친필원고야 버리면 안돼,’ 덧붙여 ‘아빠 소설 그린이가 영어로 번역해야 되는 거 알지?’ 하는 다짐까지 받는다.
옷장 선반위에 얹힌 이불을 내리다 한켠에 단단히 묶인 종이박스가 눈에 띄면 ‘저거 네 엄마 유품이야, 잘두었다가 나중에 더 크면 풀어봐.’ 그렇게 지나가며 한 마디씩 던진다.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며, 이 분은 너의 친 할아버지, 저 뒤에 선 이는 아빠의 작은 고모, 하며 돌아가시거나 아이가 알지 못하는 한국의 친척들 촌수도 가르쳐 준다.      
그린이의 유아원으로부터 유치원,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기록들도 중요한 것, 예를 들면 상장, 성적표, 에세이, 공부 노트 등등의 묶음도 책상 밑에 있다고 일러 주었다. 중요한 서류를 한 곳에 모아 둔 까만색 서류가방도 아빠 옷장 선반 위에 있다고 몇 번이나 말 했다.    
생명보험 이야기도 그런 선상에서 하게 된 것이다.  
“그린아 아빠가 생명보험 들은 게 있거든, 라이프 인슈런스 말이야.”
“그게 뭐야?”
“응, 생명보험은 만약 아빠가 무슨 사고를 당하면 그린이가 돈을 받는 거야. 아빠가 다쳐서 일을 못하거나 죽으면 누가 너를 키워주겠어? 너 학교 다니고 마켓보고 아파트 페이먼트 내고 할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아빠가 보험을 들어 놓으면 보험회사가 아빠 대신 너에게 돈을 주는 거야. 무슨 말 인지 알겠지?”
내 설명을 듣던 그린이가 반짝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게 얼마야?”
“으응, 오십 만불.”
“오십 만불이 얼마야?”
“오십 만불이 얼마냐 하면... 화이브 헌드렛 다우선 달라, 헤프 밀리언이야.”
“헤프 밀리언? 와우!”
와우! 하고 감탄을 하던 그린이가 갑자기 약지 손가락을 치켜들어 나를 가리키며 외쳤다.
“죽어! 죽어! 아빠 죽어!”
갑작스러운 그린이의 행동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얼굴에 웃음기가 묻어 있었지만 진심도 반은 된다는 느낌이 짧은 순간에 왔다. 나는 기가 막혀서 허, 아, 하,하, 웃었다.
“너 정말이야? 아빠 죽어?”
“그래, 그러면 나 헤프 밀리언 갖잖아.”
“정말? 너 아빠 보다 돈이 더 좋아? 알았어... 그럼 아빠 죽을게.”
나는 화도 나고 슬퍼지기도 해서 정말 이 참에 죽을까, 하는 마음을 농담처럼 품으며 그렇게 말했다. 어려운 대로 사립학교에 보내고, 제가 원하는 것이면 깝깝하지 않게 대충 뒷바라지 해주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아빠와 돈을 바꾸려 할까. 새끼들 키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던데, 내 새끼는 크기도 전에 소용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린이 첫돌 잔치 때, 연필과 책과 1불짜리 지폐를 늘어놓고 집으라고 했더니 돈을 집었다. 제 엄마가 돈을 뺐고 다시 하나 집으라고 했는데 그린이는 또 지폐를 집어 들었다. 재차 한 번 더 집으라고 했을 때도 역시 돈을 집었다. 그런 아이의 행동을 보며 여러 축하객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린이가 부자로 살겠어요!’ 했었다. 부자로 살겠다는 거야 제 힘으로 이루어 잘산다는 말이지, 아빠 보험금을 말하는 것은 아닐 터였다.
나는 소파에 등을 누인체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소파에 오래 앉아 있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린이에게 전해지도록, 감은 눈 속에서 염력으로 쏘아 보냈다.
-돈만 있으면 아빠 없어도 잘 살거 같아? 새탁장에 내려간 사이에도 ‘아빠, 무서워 빨리와’ 하고 벌벌 떠는 녀석이 그래, 아빠 없이 돈 하고 잘 살아봐라. 나쁜 사람들이 네 돈 다 뺐고 거지굴에 던져버릴 거다, 이 똥강아지야!-
고개를 깊숙히 숙이고 팔장을 껴붙인 체, 날 선 추궁의 말들을 무언의 화살에 실어 날렸다. 낌새를 챘는지 그린이 쪽에서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흘렀다. 한쪽 무릎 위에 무엇이 살풋 얹혔다. 그것이 그린이의 손이라는 것이야 눈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쏘리, 아빠... 나 돈 싫어, 아빠 갖을래...”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린이 손으로 무릎을 살짝 흔들며 또 한 번 쏘리, 했다. 가만히 있었다. 그린이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울거나 말거나 계속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린이 울면서 일어나더니 내 목을 껴안았다. 그래도 가만히 있었다. 내 목에 매달린 그린이 엉엉,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아빠아- 쏘오리, 엉엉, 정말 쏘오리... 아빠아, 엉엉엉.”
무슨 잘못이든 쏘리 한 마디면 ‘알았어, 다시 그러지 말아.’ 하고 용서를 하던 아빠가 울면서 쏘리를 해도 대답이 없자 그린은 더 크게 울었다. 정말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목을 껴안은 팔에 힘을 바짝주며 슬프게 울었다.
그린이 어찌나 슬피 우는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눈을 감고 있다가는 나도 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팔장을 풀며 슬그머니 눈을 떴다. 내가 눈을 뜨자 그린이 죽은 아빠가 살아 났다는 표정으로 기쁨의 ‘쏘리’를 연발 했다.
“아빠, 쏘오리, 쏘오리, 쏘오리!”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그린이를 꼬옥 안아 주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그린이와 함께 다음날 있을 시험에 대비한 암기 테스트를 하다가 슬적 물었다.
“그린아, 너 돈 많으면 뭐 할꺼니?”
내 말에 그린이 바늘에라도 찔린 듯 팔짝 뛰며 말했다.
“그 말 하지마! 돈 말 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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