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엔젤레스는 겨울

2002.12.21 14:06

이용우 조회 수:1331 추천:78

그의 예상 대로 한 손에 셀률라폰을 든 황사장은 207호 주차석 앞에 서 있었다. 이 사십 유닛짜리 세라노 아파트의 새 주인이 된 황사장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나타나기는 지난 3개월 사이에 처음 있는 일이다. 특별한 일이 없는한 주로 오후 두 세시쯤 들려서 한바퀴 쓱 둘러보고는 옥상에 있는 팬트하우스로 올라 갔다가 언제 가는지도 모르게 슬그머니 사라지는 사람이다. 팬트하우스에서 잔건 아닐까, 그는 잠깐 그렇게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니다. 황사장의 입성이나 느낌으로 보아 팬트하우스에서 자고 내려온 모습은 아니다. 그런데 오전 10시도 체 않된 시각에 나타났다. 황사장이 뭔가 단단히 작심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짐짓 우겨넣은 과장된 투지가 스무 걸음 이상이나 떨어진 그의 눈에도 여실히 잡혀 졌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걸어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일찍 나오셨습니다.
속으로는 뜨끔 하면서도 겉으로는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그는 꾸벅 머리를 숙이며 황사장 곁으로 다가갔다.
미스터 킴, 이백 칠호 테넌트에게 노티스를 주었지요?
그의 인사에 대한 답으로 입귀를 방긋 당겨 올린 황사장이 뾰족한 턱을 목 앞으로 끌어당기며 나긋한 소리로 물었다. 황사장의 목소리는 언제나 높낮이가 없이 그렇게 여리고 느리다. 하지만 그 느리고 여린 톤이 낮아지고 여려질수록 문제가 더 심각 하다는 것을 그는 지난 6개월 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럴 때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보다는 묻는 말에 대답만 하는 것이 황사장의 말투를 더 여리게 만들지 않는 비결이라는 것까지도 말이다.
네, 구두로 두 번이나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는 황사장의 범상치않은 모습에 장단이라도 맞추듯,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지어 그렇게 대답 했다. 특별히 두 번이라는 대목은 목소리의 톤을 약간 높였다.
그런데, 이게 그대로 있네요?
황사장은 좀더 나긋해진 목소리로 말하며 발 한짝을 살풋 들어 올렸다. 황사장의 구두코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그려야 했다. 가지 각색의 페인트통과 고장난 분사기, 그리고 롤러와 사다리따위들이 주차장 뒷벽을 타고 위태롭게 쌓여져 있었다. 정돈이라도 좀 잘하라는 그의 말에 따른다는 것이 오히려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모양을 연출하고 있었다.
장형, 아파트 주인으로부터 주차장에 쌓여 있는 페인트통이 위험하기도 하고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다고 여러번 말이 있었어. 우선 보기좋게 정돈이라도 좀 하지.
황사장에게는 목소리까지 높여가며 노티스를 주었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기실 그가 페인트장에게 한 말은 고작 그것이 전부였다. 아파트엔 쓰다남은 페인트나 장비따위를 보관할 만한 장소가 당연히 없다. 그래서 페인트장은 자기 차의 주차석 뒤쪽에 그것들을 쌓아두는 것이었다. 주차석 뒤의 공간이라야 겨우 발 한짝 벌릴 넓이가 전부다. 그 좁은 곳에 잡다한 것들을 쌓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옆자리도 침범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페인트장의 주차석 양쪽이 다행이도 모두 같은 한국 사람이다. 살아가는 모습이 그만그만 하다보니 차를 빼고 넣을 때마다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정식으로 불평을 제기하지는 않지만, 가끔 렌트비를 지불하며 못마땅하다는 언질을 주곤 했다. 그럴때 마다 그는 황사장에게 하듯, 노티스를 주었노라고 시침을 때곤 했다. 또 페인트 장이 일을 마치고 들어온 저녁 시간 이후로는 그의 차에 가려진다지만, 뒤쪽의 물건들 때문에 가뜩이나 덩치가 큰 그의 작업밴이 앞으로 툭 튀어나와서 입주자들의 눈총과 불편을 사기는 일반이었다. 그가 가끔 주의를 주노라면 페인트장은 어디 허름한 하우스라도 하나 얻어 나가야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그러나 아파트 렌트비도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것이 한인타운의 실정인데, 몇다리 건너 하청 일을 하는 페인트장의 처지로 하우스를 얻어 간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올망 졸망한 아이 셋에 식당 웨이츄레스를 하다가 허리가 아파 쉬고 있는 아내까지 페인트장은 식구가 다섯이다. 소주 한 잔 해야지, 얼굴을 마주칠 때 마다 그렇게 인사를 거르지 않는 페인트장의 등짝은 서른 여덟 나이답잖게 언제나 구부정하다. 그런 페인트장에게 당장 그것들을 치우라는 것은 직업을 바꾸던지 아니면 아파트를 떠나라는 얘기다. 황사장이 제법 심각하게 나오기는 하지만, 구질스런 것들을 버리고 깔끔하게 정돈을 하면 어찌어찌 넘어가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미관은 둘째 치고 너무 위험해요, 페인트는 인화물질이잖아요? 베리 덴저러스,
낮아지기만 하던 황사장의 음성이 위험 하다는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올라갔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일 거 라고 추측만 하는 황사장은 버릇처럼 대화 속에 영어를 섞는다. 그것이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아 황사장의 미국 생활이 꽤 오래 되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뜨리데이 노티스를 주세요, 미스터 킴이 두 번이나 구두로 노티스를 주었으니까 이제 정식으로 페이퍼웤을 해도 됩니다. 오늘 안으로 뜨리데이 노티스를 주세요.
황사장은 '뜨리데이 노티스'라는 말에 두 번이나 힘을 주었다. 삼일 안에 그것들을 치우지않으면 퇴거 명령을 내리겠다는 말이다. 황사장이 그렇게까지 나오리라곤 생각지않았던 그는 놀란 속을 감추느라 커, 헛기침을 쏟으며 고개를 들었다.어느새 나긋하게 목소리를 낮춘 황사장은 입귀를 방긋 당겨 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르르르...
낮고 음습했지만 그래서 더욱 사실적인 소리 하나가 둘 사이를 파고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것은 흡사 두어집 건너에서 넘어온 고물 자동차의 엔진 소리 같기도 했고, 멀리 밤하늘을 나는 비행기의 후음같기도 한 그런 소리였다. 은근하면서도 분명하고, 먼 것같으면서도 가까웁다는 것을 확연히 인지하게 되는, 육감으로 먼저 감지 되는 소리였다.
소리의 실체는 위태롭게 쌓아올린 페인트통 옆으로부터 정체를 드러냈다. 검정 페인트를 뒤집어 쓴 것처럼 이빨을 빼고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새카만 놈이였다. 그 놈을 먼저 발견하고 놀란 것은 황사장이었다.
왓, 이거 뭐야!
황사장은 얼마나 놀랐는지 페인트 더미쪽으로 내밀었던 발 한짝을 황급히 거두어들이며 비명을 질렀다. 그 역시도 적잖이 놀랐다. 색깔도 검은 데다가 덩치마저 송아지처럼 컸다. 누구라도 예고없이 그런 놈을 만나서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아니, 이거, 개가 어떻게... 오, 마이갓.
잘못 움직이면 공격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인지 바짝 얼어붙은 황사장은 추궁하듯 겁먹은 시선을 그에게로 들어 왔다. 반지르르 윤기 흐르는 짧고 새카만 털이 온 몸을 뒤덮은 그놈은 바로 109호의 흑인 영감 브라운의 개다. 가끔 사람을 물어 죽이기도 해서 메스컴을 장식하는 핏블 종류의 사나운 개다. 황사장이 몰라서 그렇지 브라운영감이 그 개를 데려온지가 벌써 열흘이 넘었다. 그는 이미 며칠전에 줄이 풀린 그 놈을 세탁장 안에서 맞닥드려 혼비백산한 경험이 있다. 케니, 케니, 흑인 특유의 쉰 목소리와 함께 개줄을 거머쥔 브라운영감이 세탁장에 거구를 들여놓고서야 그는 그 동물이 바로 영감의 개 라는 것을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애지 중지 하던 오디오셋트를 도둑맞은 브라운영감이 아파트의 허술한 보안문제를 지적하며 개를 키우겠다고 했을 때만해도 그는 그저 말뿐이겠지 했다. 설혹 개를 키우더라도 그렇게 큰 놈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브라운영감은 자기 동생의 개라며 송아지만 한 그 놈을 끌고 왔다. 그놈을 데려오던 날 브라운영감은 24시간 상주하는 경비원을 고용하면 케니를 브라더에게 돌려주겠노라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대화가 통하는 한국사람도 아닌대다가 피해자로서 보안을 담보로 하는 행위라 그로서도 제지하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브라운영감의 거구가 휘청거릴정도로 목줄을 채며 뒷발을 버퉁기는 놈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같아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그는 영감과 개가 좁은 아파트 출입문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을 보며, 저거 몇 파운드나 나갈까, 리빙룸이 꽉 차겠군, 냄새가 심할텐데, 하고 한가한 걱정만 했다.
케니, 케니.
턱까지 숨이 찬 브라운영감이 쉰 목소리로 개의 이름을 부르며 계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감이 나타나자 그 놈은 지금까지의 위협적인 태도를 버리고 쏜살같이 그리로 달려갔다.
쏘리.
브라운영감은 지난번 세탁장에서처럼 개목에 줄을 걸더니 그들을 향해 손을 번쩍들며 그렇게 말하고는 계단을 올라가버렸다. 그와 함꼐 서 있는 사람이 건물 주인이라는 것을 영감이 알았다면 아파트의 문제점과 자신의 의지를 설명하느라 분명 쉰목소리로 열을 올렸을 것이었다.
저 영감이 언제부터 개를 키웠지요?
흥분과 긴장이 가라앉지 않은 황사장은 여유와 미소가 싹 가신 얼굴로 물었다. 그는 아파트에 도둑이 든 사건은 황사장에게 말했지만, 보안을 담보로 한 브라운영감의 개 이야기는 함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유야 어쨌던 영감의 행위를 처음부터 막지못한 자신의 실책을 어떤 식으로 덮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브라운영감이 케니를 데려오던 날, 놈에게 물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아파트에선 개를 키울 수 없다고 무조건 영감의 앞을 막아섰어야 했다. 언어 소통이 시원찮은 데다가 피해 당사자라는 고려가 지나쳐 자신의 입장이 궁색해질 일을 방조한 꼴이었다. 그렇다고 이미 머리꼭데기에 앉아 묻고 있는 황사장에게 나도 몰랐노라는 거짓말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숨 한 번을 천천히 내쉰 그는 브라운영감이 개를 데려오게된 경위와 자신의 부단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오, 노우, 잘못했어요. 규칙대로 해야지요. 개가 얼마나 위험한 동물입니까? 더구나 저 개는 사람을 물어 죽이는 개라구요, 아파트 전체 테넌트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예요, 베리베리 덴저러스! 그리고, 감시 카메라가 다섯개나 있는데 무슨 시큐리티가드를 세우라는 거요? 저 영감에게도 뜨리데이 노티스를 주세요, 문제 있는 아파트에 사느라고 애 쓰지 말고 시큐리티 잘된 아파트로 이사 가라구 말이요. 안그래요 미스터 킴?
눈꼬리를 말아올리고 그의 말을 듣던 황사장은 웃기는 일도 다 본다는 듯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감시 카메라가 다섯개나 있지 않느냐는 것은 당신의 책임도 있다는 말로 들렸다. 영감과 그를 싸잡아 멍청한 사람으로 폄하 하는 황사장의 거침없는 언사에 그는 이맛살이 떨렸다.

수영장 곁의 팜추리 밑둥에 걸터앉은 여자는 무릎 위에 올려진 하얀 개의 등줄기를 빗질하고 있다. 한 손은 개의 목덜미를 잡고, 나머지 손으로 머리 꼭대기부터 꼬리까지 천천히 빗어 내린다. 무슨 생각에 사로잡혔는지 여자의 시선은 개의 등줄기를 버려두고 수영장의 흔들리는 물살 위에 머물러 있다. 자연 여자의 손은 이미 몇 번이고 빗질한 자리를 반복해서 쓸고 있다. 여자의 작은 손안에 가슴팍이 답삭 들어오는 하얀 개도 빗질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주인의 시선을 따라 수면 위에 눈길을 던지고 있다. 팜츄리를 등지고 앉은 여자가 수면에서 고개를 조금 들면 디긋자 형의 아파트 현관을 바라볼 수 있다. 그러니까 여자와 개는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며 펼쳐지는 풀장 끝의 손바닥만한 정원 팜츄리 아래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여자는 입꼬리를 한 편으로 샐쭉 당겨 물며 복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내젓는다. 눈살을 치뜨며 숨을 들여 마셨다가는 어깨가 쳐지도록 후, 내 쉰다. 그것을 몇 차래나 반복한다. 여자가 지난 밤의 헤프닝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의심없이 떠올랐다.
새벽 세 시가 다된 시각에 일어난 것이 뇨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사무실 문을 어깨쭉지로 밀어 찌그린 눈으로 감시 카메라 모니터를 일별한 것은 요즘들어 생긴 그의 강박증 때문일 것이었다. 그러니까 브라운 영감이 도둑을 맞고, 며칠전 황사장으로부터 보안 카메라에 대한 감시 소홀을 지적 받고 한 어름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차 두 대가 연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앞의 차는 흰색 폭스바겐이었다. 그것은 김수지 라는 펜트하우스 여자의 차다. 여자가 일을 마치고 들어오는 시간이다. 그런데 여자의 차를 따라붙는 검정색 스포츠카의 기새가 졸린 눈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아파트 입주자의 차량도 아닐뿐더러 여자의 차를 너무 바짝 따라붙어서 아차 하면 접촉 사고라도 일어날 것처럼 위험 했다. 여자가 자기의 자리에 주차를 하자 검정 스포츠카는 여자 차의 꽁무니를 막아서며 차를 세웠다.
검정 스포츠 카에서 내린 것은 한 사람의 남자 였다. 모니터의 화면상으로 정확히 판단 할 수는 없었지만 백인이나 흑인은 아니었다. 남자는 성큼 여자의 차로 다가 가더니 운전석쪽 창에 얼굴을 내렸다. 미행 강도다, 그는 대뜸 그렇게 생각 했다. 도둑에 이어 이젠 강도까지? 두 번 생각 할 겨를도 없이 그는 911로 전화기를 두드렸다. 분명 차 안에도 한 녀석이 앉아 있겠지. 그는 경찰이 도착 할 때까지 현장을 지키기 위해 뚫어져라 모니터를 응시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경광등을 밝힌 폴리스카가 아파트 입구에 도착한 그 순간에 일어났다. 그때까지 강도에 대항해 차 안에서 꼼짝않던 펜트하우스 여자가 차문을 열고 나온 것이다. 차를 내린 여자가 남자의 어깨 위로 팔을 뻗는 것이 강도에 대항하는 무모한 행동이라는 생각으로 그가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난 순간이었다. 발딱 치켜든 여자의 턱이 남자의 얼굴을 향해 폭포를 오르는 연어의 그것처럼 날쌔게 올라 붙는 것이었다. 그가 세 대의 폴리스카에서 나온 다섯명의 경찰을 따라 지하 파킹장에 들어 섰을 때, 펜트하우스 여자와 낮모르는 남자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체 겁먹은 얼굴로 서로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감시 카메라 모니터로는 남미계와 구별이 않되던 그 남자는 한국 사람이었다. 펜트하우스 여자와 나이가 걸맞을 이십대의 잘생긴 남자 였다.
여자가 경찰에게 남자를 자기 애인이라고 말하여 사건은 우습게도 그의 경솔함으로 판정이 내려졌다. 모니터상의 정황으로 보아 여자의 동의 없이 이루어진 행위가 분명하건만 여자는 자기가 문을 열어주었노라고 시침을 떼었다. 경찰이 신고자인 그에게 재차 신고 경위와 그때의 상황을 물을 때 여자의 표정이 잠시 미안함과 무안함이 섞인 얼굴로 바뀌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경찰의 질문이 그녀에게로 향하면 주저없이 자기 의사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여자의 말을 뒷받침 하듯, 잘생긴 남자의 손은 연신 여자의 어깨와 허리께를 감싸며 오르내렸다.
아파트를 둘러싸고 번쩍거리는 폴리스카의 경광빛에 잠을 깬 몇 사람의 입주자들 틈에 섞여 있던 황사장이 마치 펜트하우스에 들렀다 돌아갈 때처럼 슬금슬금 뒷걸음으로 사라져간 것도 그런 어름에서였다. 어차피 강도가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난 이상 공연히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경찰 하나가 오케이, 하고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손을 내밀었다. 신고 재대로 하라는 뜻을 담고 내미는 악수였다. 그는 속으로 분통이 터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달밤에 체조라더니 한참 단잠에 빠졌을 새벽 시간에 이게 무슨 짓 인가 하는 자조로 마주 손을 내밀며 허탈한 시선을 들었을 때 였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사람들의 어깨 사이에 뾰족한 턱을 들여밀고 있던 황사장과 얼굴이 마주쳤다. 어쩌면 여자와 남자의 차를 뒤이어 좇아왔는지도 몰랐다.그런데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황사장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방을 빠져나와 돌아갈 때처럼 멋적은 몸짓으로 비실비실 사라져 갔다.
여자는 지금 황사장이 지하 파킹장에 도착한 것을 모르고 있다. 황사장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펜트하우스로 올라가면 몰라도 여느 날처럼 그의 사무실겸 숙소인 현관 곁의 메니져룸에 들른다면 그녀와 황사장은 수영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치게 된다. 블라인드 커텐 사이로 여자의 모습을 옅보며, 다른 한 편으로는 테이블 위에 진열된 다섯 대의 감시 카메라 모니터에 번갈아 눈길을 돌리던 그는 황사장의 베이지색 렉서스가 지하 파킹장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입가에 풀석 미소를 지었다. 지난 밤 숨겨둔 자기 여자의 당당한 모습을 훔쳐보고 돌아간 심정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올라와서 였다. 잠이 잘 왔을까. 지난밤 그는 멍청해진 자신의 입장 보다도 뒷걸음으로 돌아간 황사장의 생각으로 잠자리를 질퍽거렸다. 펜트하우스의 넓은 패티오를 버려두고 입주자들의 눈에 훤히 드러나는 풀장 끝의 팜츄리 아래서 넋나간 얼굴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여자를 마주치면 황사장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는 묘한 궁금증이 일었다. 애완용이라고는 하지만 브라운 영감에게는 뜨리데이 노티스를 주면서 여자의 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는 황사장이었다.
황사장이 아파트에 오면 건물 옥상에 있는 펜트하우스의 여자 방에 들렸다 간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된 것은 아파트의 주인이 황사장으로 바뀌고도 두어 달이 지난 최근에서 였다. 벌써 돌아 간줄 알았던 황사장을 몇시간 지나 불쑥 마주치고, 그 때마다 멋적은 표정으로 짓는 억지 웃음을 서너차래 대하고 나서야 그는 어렴풋이 짐작을 하게 되엇다. 아파트의 주인이 바뀌고 여자가 펜트하우스에 입주 하고 한 시기가 비슷했다는 생각도 그제서야 떠올랐다.
여자와 황사장의 관계를 결정적으로 확인시켜준 것은 붉은 페인트가 묻은 백불짜리 지폐였다. 귀퉁이에 적색 페이트가 묻은 백불짜리 두 장은 페인트 장이 렌트비로 가져온 구백불 속에 들어 있던 돈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돈을 헤아리다 작업대 위에 떨어뜨려서 그랬노라고 페인트 장이 우정 말해주어 더욱 기억이 되는 돈이었다. 그 적색 지폐를 다른 입주자들의 렌트비와 함께 황사장에게 건냈는데, 며칠 후 여자의 렌트비로 그의 손에 다시 돌아 온 것이다. 스피츠처럼 날카로운 황사장이 그것 만은 기억에 두지 않았는지, 한 바퀴 돈 적색 지폐를 방긋 웃으며 다시 받아 갔다.
그는 황사장이 엘리베이터를 탈까 아니면 계단으로 올라오나 보기위해 파킹장에 연결된 3번 모니터에 눈길을 집중 했다. 차에서 내린 황사장은 계단쪽으로 발길을 잡았다. 그의 방이 있는 현관 옆으로 올라 온다는 얘기다. 그는 얼른 팜츄리 밑의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여자가 없다. 잘못 보았나, 그는 두 손으로 블라인드를 활짝 벌렸다. 없다. 어느틈에 사라졌는지 여자와 개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여기 좀 보세요.
황사장이 손가락질 하는 곳을 보니 건물 외벽을 칠한 갈색 페인트와는 다른 얼룩이 져 있었다. 얼른 보아서는 눈에 띄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갈색 페인트 칠과는 구별되는 땟물이 부옇게 말라붙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십여일 전에 쏟아진 비바람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황사장은 얼룩을 가리키던 손가락을 위쪽으로 치켜 들었다. 그는 황사장의 손가락을 따라 조심스래 고개를 젖혔다. 허지만 그는 황사장이 딱히 어디를 가리키는지 몰라 옥상 난간도 보았다 구름 낀 하늘도 보았다 했다.
저 삼백 오호 베란다 말이예요.
그의 시선이 자기가 의도 하는 곳에 포커스를 맞추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황사장은 아파트 호실까지 지적하며 가늘고 긴 손가락을 흔들었다. 황사장의 손가락에 찍힌 삼백 오호의 베란다는 푸른 숲으로 둘려져 있었다. 흰색의 큰 화분 두 개에는 상추가 빽빽히 심어져 있고, 그보다 작은 것 세 개에는 각각 서너포기 씩의 고추 모종이 키재기를 하고 있다. 그 외에 몇 개의 올망 졸망한 화분과 플라스틱 용기에 쪽파와 콩버섯 따위 푸성귀들이 자라고 있다. 그가 익히 보아 오던 모습이다. 그러니까 황사장은 삼백 오호의 화분에서 흘러내린 뒷물로 인해 아파트 벽이 더러워지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벽에 진 얼룩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그렇게 자세히 보니 얼룩에는 작은 흙알갱이같은 것들이 엉겨붙어 있었다. 삼층 화분으로부터 흘러내린 토사물이 분명했다.
삼백 오호의 낸시박은 놀만디와 올림픽 네거리의 샤핑몰에서 미장원을 하는 사십대의 독신녀다. 낸시박은 브라운 영감과 함께 이 세라노 아파트의 가장 오래된 입주자의 한 사람이다. 그가 그레머시 아파트에서 이곳으로 메니져 자리를 옮겨오던 5년전에도 그들은 이미 몇 년째 살고 있노라고 말했었다. 낸시박의 베란다는 그 때도 지금처럼 푸르렀다. 아욱이라거나 마늘, 또는 토마도와 알로에베라 선인장 따위들로 종목이 바뀌기는 하지만, 어쨌든 낸시박의 베란다는 사시 사철 그런 푸성귀들로 숲을 이루고 있다. 렌트비와 함께 들고 온 상추, 풋고추 따위 베란다의 화분에서 기른 낸시박의 채소를 그도 몇번인가 받아 먹었다. 일터에서 돌아오면 바깥 출입도 잘 하지 않고 친구도 별로 없는 것같은 낸시박의 유일한 취미가 바로 베란다의 채소 기르기다. 검은 선글래스를 쓰고 빨간 플레스틱 조로로 살랑살랑 물울 뿌리는 낸시박의 화사한 자태는 이 세라노 아파트 입주자라면 누구나 눈에 익은 모습일 것이었다.
여간 주의해서 보지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얼룩이다. 아무 생각없이 본다면 두어 발작만 떨어져도 분별이 않되는 얼룩이다. 그것을 황사장은 잡아 낸 것이다. 그는 가슴이 써늘해 졌다. 낸시박에게도 노티스를 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는 수긍하겠다는 표정을 만들어 고개를 들었다. 입귀를 당겨올려 방긋 짓는 미소를 띄운 황사장이 알겠지요, 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는 쓴 침을 슬그머니 삼켰다. 황사장은 이심 전심 통해서 만족하다는 얼굴로, 그건 그렇게 하구요... 하며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이사 나가는 백 육호 말이예요, 그 방 렌트를 새 테넌트에게는 구백불로 하세요.
그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눈을 거칠게 떴다. 이사 나가는 방이라고 지적까지 했지만 이백 육호를 잘못 말한게 아닌가 하고 황사장의 얼굴을 멀뚱하게 쳐다 보았다. 700불 하던 원베드룸 렌트를 갑자기 200불이나 올리라니 무슨 착각이겠지 했다. 그러나 방긋 웃는 황사장의 눈빛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하세요? 너무 많이 올린다고 생각 되나요? 노우, 요즈음 타운의 렌트비가 얼마나 올랐는지 미스터김이 모르나본데, 원베드가 보통 천불이예요. 말 난김에 이층의 투베드는 천 이백불이 된다는 것도 아예 알고계세요. 물론 새 테넌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요. 기존의 입주자들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그는 갑자기 눈이 훤하게 트이는 느낌이었다. 황사장의 속셈이 어디에 있는지 알것 같았다. 황사장에게 찍힌 브라운 영감과 페인트장, 그리고 박마담이 모두 오래된 입주자들이다. 매 해 법정 인상폭 안에서 렌트가 조정되는 사람들이다. 수시로 들고 난 방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낮은 렌트를 내고 있는 입주자들이다. 당사자들 역시 그런 이점 때문에 이런 저런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눌러앉아 있는 것이다.
근래 들어 아파트나 하우스 할 것 없이 시내의 주거용 렌트비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 이유를 두고 어떤 사람은 90년대 부동산 파동으로 아파트 신축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고, 누구는 아이엠에프에 밀려 온 한국 사람 때문이라고도 했다. 두 이야기 모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코리아타운의 상승폭이 유독히 높아서 사람들은 후자의 말에 고개를 훨씬 깊이 끄덕인다. 아파트 메니져가 직업인 그다. 그 역시 타운의 렌트비가 부쩍부쩍 치솟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 아침에 원 베드를 200불, 투 베드룸은 300불이나 올린다니 기가 딱 막혔다. 벌렁거리는 가슴 위로 일자리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주저없이 떠올랐다. 그는 황사장을 향해 목을 꼿꼿이 들고 훵한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주인아니요, 주인이 내린 결정인데 누가 반대 하겠소, 하는 뜻이였다. 그러나 황사장의 뾰족한 턱을 오래 보고 있을 마음은 아니었다. 그는 억지로 폈던 얼굴이나마 찌그러지는 것을 감추기 위해 얼른 고개를 젖혔다. 거기 얼굴이 하나 있었다. 파란 고추잎 사이로 빨간 조로를 든 여자가 짙은 선글래스 아래 밝은 미소를 베어물고 그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낸시박이었다. 그를 따라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황사장이 큼, 헛기침을 하더니 슬그머니 사라진다. 자기가 아파트 주인이라는 것을 입주자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평소 황사장의 주문이었다는 사실이 불쑥 떠올랐다.
황사장과 여자의 다투는 소리가 아래층까지 들려왔다. 물론 펜트하우스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우려야 겨우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들의 소리는 강풍이 불어야 꺽어지는 팜츄리 가지처럼 아주 가끔 한번씩 떨어져 내려왔다. 그것도 ......잖아, ......아니야? 따위 본말은 몽땅 떼어먹힌 꼬리 뿐이였다. 가지껏 목청을 죽이려고 애를 쓰다가 터뜨리는 소리였다. 공연한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풀장으로 면한 창을 활짝 열어놓고 위쪽을 향해 신경을 모았다. 지난 밤에 눈이 마주친 것으로 아예 감출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엘리베이터의 싸인판에 상승과 하강이 표시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황사장은 그의 시선을 무시한체 펜트하우스로 올라갔었다.
그런 어느 순간이었다. 악, 하는 여자의 비명과 함께 무엇이 풀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풍덩, 하고 들려왔다. 그는 벌떡 일어나 블라인드를 활짝 젖혔다. 풀장의 수면 위로 물거품이 뽀글뽀글 일고 있었다. 무엇이 떨어 진 걸까, 그는 목을 길게 빼고 풀장을 내려다 보았다. 그가 의아한 시선을 몇 번인가 껌벅거렸을 때였다. 바글바글 잦아드는 거품을 뚫으며 어떤 물체 하나가 불쑥 솟구쳐 올라왔다. 그는 너무 놀라 다리가 후르르 떨렸다. 여자가 옥상에서 뛰어내렸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던 거다. 그러나 아니였다, 여자는 아니였다. 수면을 뚫고 솟구친 것은 개였다. 여자의 하얀 강아지였다. 그는 참았던 숨을 후, 내쉬었다. 여자가 아니어서 천만 다행이었다. 허지만 그는 이내 새로운 분노가 솟아 올랐다. 아무리 개라지만 어떻게 그 높은 곳에서 내던진단 말인가, 의식적으로 풀장을 향해 떨어뜨렸는지는 모르지만 만일 물 위가 아니고 시멘트 바닥에 떨어졌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온 몸에 소름이 좍 끼쳤다.
발발발 헤엄을 쳐 수면을 벗어난 여자의 개는 풀장 가장자리 시멘트 블록에 올라서더니 온 몸을 후루루룩 떨어 물기를 털어 냈다. 그렇게 몸 떨기를 거푸 두 서너번을 더 하더니 멍한 눈으로 여자가 있는 펜트하우스 쪽을 올려다 본다. 맨발의 여자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계단을 뛰어내려 온 것이 그 때였다. 은지야, 은지야, 여자는 감격한 목소리로 개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 갔다. 개도 젖은 몸을 날려 여자의 품으로 뛰어 들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개를 끌어 안은 여자는 은지야, 은지야 만 부르며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아침부터 날씨가 꾸무룩 하다. 어쩌면 저녁 안에 빗줄기를 떨굴 것같은 하늘 색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캘리포니아의 겨울 날씨다. 이사 하는 날씨로는 적합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페인트장은 전혀 내색이 없다. 그의 아내 만이 들고 나며 이사짐을 거드는 그에게, 열 블록도 않되요, 자주 놀러 오세요, 그런 말을 인사라고 했다. 혼자 사는 그에게 때때로 손수 담근 김치나 밑반찬을 들여 놓던 그녀다. 이 세라노 아파트의 메니져로 와서 나이가 비슷한 페인트장과 격의없이 지내는 그에게 남편의 친구 대접을 깍듯이 하던 그녀로서는 그렇게 빈 말이라도 해야 서운함을 더는 것일 터였다. 뜻없이 하던 말대로 하우스로 이사하게 되어 누구 눈치 볼 일은 없겠지만, 지금 보다 집세를 갑절은 더 내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나 보았다. 두 내외 중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시원찮은 허리를 끌고 페인트장의 아내가 또다시 식당 일을 나가야 한다는 것은 묻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한 캔 하고 해.
종내 입을 열 것같지 않던 페인트 장이 여섯 팩짜리 버드와이저 박스를 와락 뜯으며 처음으로 그에게 말을 걸어 왔다. 어지간한 짐은 거의 다 이삿짐 차에 실은 무렵이었다. 이사 비용을 절약한다고 십여일전부터 페인트 장이 자신의 작업밴으로 밤 마다 실어 날라서 냉장고와 침대시트 따위 굵직한 것 몇가지가 이삿짐의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그와 페인트 장은 편한대로 현관 앞의 나무 벤치에 엉덩이를 내렸다. 페인트 장이 건내는 맥주 캔을 받아들며 무심코 든 그의 시선 속에 하얀 개를 안은 여자가 팜츄리 밑에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햇살도 없는 우중충한 날씨에 풀장 가에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가 참견할 일이 아니였다. 그는 여자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맥주 캔을 들어 올렸다. 둘은 말없이 씁스름한 맥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두 개, 세 개, 여섯 팩짜리 버드와이저는 한 순간에 알루미늄캔을 찌그러뜨리며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렇게 거푸 두 세캔을 뱃속에 흘려 넣고나서야 그는 맥주처럼 쓴 미소를 지으며 페인트장의 얼굴을 마주 볼수 있었다. 성인이 되어 만나긴했지만 길지 않은 이국 생활에 5년이라는 세월을 한 지붕 아래서 보냈다. 열 블록도 안되는 곳으로 이사 간다지만 이렇게 헤어지면 그만이다. 서로의 살아가는 방법과 사용하는 시간이 다른 것이다.
이 참에 아예 라이센스를 따서 직접 회사를 설립해보는 게 어떻겠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속에다 누른체 그는 술기운에 의지하며 입을 열었다. 페인트장은 피식 웃으며 빈 맥주캔을 우그려 쥐었다.
그래야겠지.
자신이 생각해도 대답이 시원찮았던지 페이트장은 투박한 손으로 눈두덩을 거칠게 비벼댔다. 그때 주차장 계단으로 통하는 문이 벌컥 열렸다. 황사장의 뾰족한 얼굴이 거기서 톡 튀어 나왔다. 그는 벌떡 일어나며 머리를 꾸벅 했다.
어? 예, 굿 모닝.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던 듯, 황사장은 후루루 놀라며 자기도 마주 머리를 꾸벅 했다. 그런 황사장은 찌그러져 뒹구는 맥주캔과 두 사람의 얼굴을 휘둘러 보더니 얼른 몸을 돌렸다. 무슨 일로 이 시간에 나타났는지는 모르지만 그 역시 놀라고 마뜩찮기는 황사장 이상이었다. 페인트장이 이사 하는 것을 확인하러 온 것은 아닐태지만, 너 그래서 왔지, 하는 억하심정이 솟아 오를 지경이었다. 그에게 말만 들었을 뿐, 황사장을 직접 본 적이 없는 페인트장은 벌건 눈알을 디룩 거리며 그를 쳐다 보았다. 누구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누구냐 하면 저 사람이 바로...
그러나 그의 말은 채 끝을 맺을 수 없었다. 지하 계단의 열린 문으로 시커먼 물체 하나가 튀어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황사장이 나타났을 때는 눈만 멀뚱거리던 페인트장도 이번에는 불에 덴 것처럼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 검은 물체는 바로 케니 였다. 브라운 영감의 개 였다.
그 놈은 쏜살같이 내달았다. 마치 목표를 정해두고 있다는 듯, 풀장을 끼고 걷는 황사장의 등을 향해 탱크 마냥 돌진 했다. 언제처럼 악, 하는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 직후 였다. 풍덩, 하고 이번에는 그때 보다 좀더 큰 물체가 수면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까르르르, 간드러진 웃음 소리가 유쾌하게 울려 퍼졌다. 풀장으로 떨어진 황사장의 몸뚱이가 수면 위로 솟아오르기도 전이었다. 하얀 개를 끌어안고 팜츄리 밑둥에 앉아 있던 펜트 하우스 여자의 웃음이었다. 까르르, 또 한번의 웃음 소리가 여자의 입에서 쏟아 질때서야 황사장의 뾰족한 턱이 먼저 수면을 뚫고 솟구쳤다. 그렇지만 황사장은 수영을 할줄 모르나 보았다. 허우적 거리던 두 팔과 함께 황사장의 칼턱은 꼬로록 하며 재차 수면 아래로 들어 갔다. 또 다시 여자의 웃음이 까르륵 터졌다.
페인트장이 풀장으로 뛰어 들었다. 페인트장의 건장한 팔뚝에 어깨죽지를 붙들린 황사장의 가느다란 몸뚱이는 아주 쉽게 밖으로 끌려 나왔다. 풀장 가장자리 시멘트 바닥에 널부러진 황사장은 왝왝, 하며 먹은 물을 토해 내었다. 페인트장이 그런 황사장을 애처러운 눈으로 내려다 보며 쿵쿵 등짝을 두드렸다. 황사장의 입에서는 한 주먹씩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럴 때마다 여자가 웃었다. 황사장이 물을 한 입 왝, 하고 뱉으면 여자는 까르륵, 웃었다. 여자의 웃음 소리는 아파트 벽을 타고 겨울 하늘로 올라 갔다. 금시라도 빗방울을 떨굴 듯 흐린 하늘에 여자의 유쾌한 웃음 소리가 까르르 섞여 들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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