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스 패션

2002.12.21 14:09

이용우 조회 수:1160 추천:108

훙분해 있는 처남의 모습과는 달리 팔장을 끼고 다리를 꼬아앉은 오스카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누인체 느긋했다. 알아 듣지는못하지만 다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처남의 목소리가 불쑥 올라갈때마다 어깨를 들썩하며 눈자위를 빙긋 치뜨곤 했다. 그의 앞이라 대놓고 드러내지않을뿐, 흥분을 못이겨 따다거리는 처남의 행동을 경멸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당신들 언어로 실컸 떠드시오, 그런다고 무었이 달라질까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 오스카의 낙낙한 모습에 더욱 열이 오르는지 처남은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느라 얼굴 근육을 한껏 실룩대고 있었다.
[호세가 카운트한 것을 제가 다시 한 번 확인했다구요, 다섯 장도 아니고 오십장이나 빈다니 말이나됩니까? 저자식이 무슨 농간을 부리고 있는 게 틀림없다구요.]
영준은 눈자위를 찌그리며 처남을 건너다 보았다. 영어가 시원치않은 처남은 언어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풀어버리기라도 하듯 그렇게 말끝마다 이자식, 저자식 했다. 물론 냉랭한 비웃음과 함께 속사포 같이 쏘아대는 오스카의 능란한 언변에 속시원히 대거리도 못하고 울화만 끓였을 처남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바는 아니다. 뒷일파트 십여명의 남미계 공원들 앞에서 잘잘못을 따지기에 앞서 우선 언어 때문에 당했을 처남의 굴욕이 어떠했을지 보지않았어도 눈앞에 선했다. 중남미계 출신답게 평소에는 느슨하다가도 궁지에 몰린다싶으면 방울뱀처럼 발딱 일어나 타라락 독을떠는 오스카의대화법은 영준역시도 두어차례 겪은바가 있다. 그러나 조리있는 반론이 아닌, 상대에게 덮어씌우듯 내벧는 처남의욕설은 썩 듣기좋은 것이 아니었다.
[알았어, 우선 처남은 흥분좀가라않혀. 앉으라구, 좀앉아서 차분하게 얘길해봐. 그러니까 딜리버리는 오스카 혼자갔던거야?]
[네, 뭐 손바닥만한 불라우스 오백장 납품하는데 호세까지 보낼 필요는없잖아요 그 리고 호세는 폴리백 씌울일이 밀려있어서...]
처남은 마지못해 오스카의 반대쪽 소파 팔걸이에 엉거주춤 허리를 내리며 말했다.
[그럼뭐야, 부라우스 오백장에서 오십장이나 빈다는 말이야?]
[글세 그렇다니까요. 그러니 제가 분통이 안터집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구요. 오 천장 육 천장씩 실어내도 한 두장이 안틀리는데 겨우 오 백장에서 오 십장이나 차이가난다니 기가 막히지요. 그런대 저 자식은 무조건 네가 실어준대로 가져갔다, 난 모른다, 네가 부족하게 줬다, 이 말밖에는 안해요. 오 마일밖에 않되는 다우니를 두 시간이나 넘어걸린 것은 해명도없이말입니다. 나쁜 자식.]
처남은 오스카의 지체된 시간에 의심의 초점을 맞춘체 노골적인 증오의 눈빛을 드러내며 식식 거렸다. 처남이 그러거나 말거나 오스카는 꼬아앉은 한 발을 탈탈떨어대며 알았어, 알았다구 하듯이 반짝치킨 턱까지 까딱거리고 있었다.
오 십장을 홀세일프라이스로 변상하면... 영준은 언 듯 그런 계산을하다가 아니지, 그것이 문제가아니야, 하는 생각과함께 고개를 들어 처남과 오스카의 얼굴을 건너다 보았다. 심각한 것은 거기에 있었다. 블라우스 오십장이야 수금액이 천불쯤 줄어들면 해결되는 일이다. 그리고 사고가 재발하지만않으면 된다. 그런대 일이 그렇게 간단히 해결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처남의 욕지거리섞인 말처럼 오스카에게선 딱집어낼 수 없는 냄새가 느끼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대 그 느끼한 냄새의 생산에 처남의 증오가 한몫하고 있다는 것을 훤하게 읽을 수 있었다. 어물어물 넘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영준이 어제 오늘 느낀 것은 아니지만 눈앞에 일어난 사고와함께 둘을 마주앉혀놓고 보니 그 심각성이 거칠게 피부에 닿아왔다.
[왕코좀 오라구해봐.]
처남이 호세를 부르러 가느라 벌떡 일어나는 서슬에 놀라 오스카가 무슨 일 인가하고 멀뚱한 시선을 든다. 영준이 호세를 별명으로 불렀기 때문에 처남이 왜그렇게 급히 나가는지 오스카는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영준네는 남미계 공원들문제로 이야기할때면 이름 대신 별명을 불렀다. 이틀이 멀다하고 발생하는 자잘한 사고들을 해결하기위해서는 사무실이 아닌 작업현장에서 바로 문제를 해결해야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하면서, 마리아가 뒤집어 박았느니, 마누엘이 번들을 바꿨느니 하고 말하면 곁에서 듣는 그들이 무안해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영준네가 둘러서서 수런대는 것은 대개 자신들의 실수를 추궁하는 것들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쭈뼛이앉아 주인의 눈치 만 살피고 있는 그들은 자신에게 화살이 돌아오지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기마련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날새운 신경을 누르고 의혹이 가는대로 맘편히 얘기하기위해서 찾아낸 궁리가 별명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처음엔 그냥 얘가, 쟤가 하고 산만한 눈짓으로 지목해가며 얘길했었다. 그러나 정확히 누굴 말하는 것인지 잘몰라서 쟤가 누구야? 뚱뚱한 애? 코 큰 남자애? 하고 되묻는 번거로움을 반복한 끝에 아예 사십여명의 남미계 중 절반이 넘게 별명을 갖게 된 것이다.
잠시 후 거칠게 되돌아 오는 처남의 꽁무니에 호세가 따라붙은 것을 본 오스카는 눈살을 찌푸리며 목을 꼬았다.
[호세야, 아침에 딜리버리 나간 불라우스 말이야, 그거 몇장이었어?]
사무실 안의 심상찮은 분위기에 기가 질렸는지 출입구 문턱을 밟고 선 호세는 미처 대답을 못하고 주먹코만 벌름거렸다. 모든 신경이 그리로쏠리는지 팔장을 끼고앉은 오스카쪽만 연해 힐끔거렸다.
[호세, 네가 카운트 했다며?]
멕시코 북부 치후아 태생의 순둥이 호세가 안스럽기는했지만 이미 마음을 다잡은 영준은 재차 그렇게 다그쳤다. 그제서야 호세는 시이, 미스터 킴. 하며 자신없는 목소리로 시인을 한다. 호세의 대답이 떨어지자 영준과 처남의 시선은 한꺼번에 오스카에게로 돌려졌다. 그러자 그때까지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있던 오스카가 소파 등받이에서 상체를 발딱 일으키며 독오른 뱀처럼 머리를 꼿꼿이 세웠다.
[분명해? 정말 오백장 맞아?]
오스카는 새까만 눈길로 호새를 쏘아보며 빠르고 각진 자기네 언어로 쥐어박듯 그렇게 물었다. 호세의 입에서 그렇다는 대답이 떨어지기라도한다면 당장에라도 발딱 일어나 면상을 받아버리고말겠다는 독기가 실려 있었다. 오스카의 표변한 서슬에 깜짝 놀랐던지 세 사람의 시선 속에 갖힌 호세는 황망하게 손사레를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노, 모르겠어, 잘모르겠다구.]
방울뱀처럼 턱을 치켜든 오스카의 위협에 겁을 먹었던지 호세는 금시 말을 뒤집으며 꽁지를 빼었다. 호세의 돌연한 말바꿈에 기가찼던지 잠시 멍해 있던 처남은 이내 불같이 화를내며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야 호세, 네가 먼저 카운트했잖아? 이 사이즈 밑에 적힌 숫자위에 동그라미를 친게 너잖아 이자식아, 네가 확인해서 나에게 넘겨준거아니야 임마, 이 종이가.]
처남은 구겨진 종이쪽 하나를 호세의 코밑에 흔들어대며 그렇게 소리쳤다. 당연히 한국말을 알아듣지못하는 호세는 그러나 처남이 들이댄 종이쪽을 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리줘봐.]
처남의 손에서 넘겨받은 종이쪽은 쓰레기통에라도 처박혀 있다 나왔는지 심하게 구겨저 있었다. S, M, L 이렇게 나열된 사이즈표시 밑에 각각의 숫자가 적혀 있고 그 숫자 위에 동그라미가 쳐저 있었다. 처남이 딜리버리 할숫자를 적어주고, 확인을 한 호세가 그 위에 동그라미를 친것같았다. 아마도 정식으로 납품장부에 옮겨적은 후 버렸던 것을 처남이 다시 찼아 낸 모양이었다.
[호세, 이 동그라미 네가 체크한 거 아니야?]
영준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묻자 호세는 대답을 못하고 주먹만한 코를 벌름거리기만 했다. 처남의 눈빛은 도둑놈을 잡은 것처럼 양양 했다. 그러나 정작 오스카는 난 뭔지모르겠다는 냉랭한 시선으로 호세의 얼굴을 쏘아 보았다. 헛소리 하면 안돼, 그따위 종이쪽에 굴복하지마, 그런 무언의 압력을 넣고 있는 것같았다.
[노메꾸에르도.]
짧은 정적을 깨고 호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것이었다. 기억이 나지않아, 숫자가 기억나지않는다는 것인지 숫자 위에 동그라미 친 것이 기억나지않는다는 것인지 불분명 한체로 호세는 그렇게 말했다.
[뭐야? 이자식아.]
처남이 호세의 이마에 코를 박을 듯 대들었다.영준은 그런 처남을 제지 했다.
[처남,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그렇게 하지말라고. 아무리 약이 올라도 그러면 않돼, 잘못하면 시끄러운일 만 생긴다니까. 하여튼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할테니까 처남은 나가봐.]
영준의 처사가 못마땅한 처남은 호세와 오스카를 몇번이나 노려보더니 가레침을 칵 돋우며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지난 육 개월동안 겪을만큼 겪었으면서도 처남은 언제나 스페니쉬들의 습성을 이해못해 머리끝까지 혈압을 올렸다. 자기가 한 것이 분명한데도 나는 아니라며 고개를 내젖는 그들의 생뚱한 짓거리는 오히려 묻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딱잡아떼기가 미안할정도로 명백한 사안에 대한 부정이라야 겨우 호세처럼 기억이 않난다며 노메꾸에르도, 할뿐이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조금 더 추궁해들어가면 쪽가위를 집어들고 발딱 일어나버린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노동청에 고발하겠다느니, 더러는 엉뚱하게 폴리스를 부르겠다느니 하고 눈을 부라리는 축들도 있다. 적반 하장이기는하지만 그런 뒤끝이면 공장 분위기나 영준네의 심사가 한꺼번에 썰렁해지기 마련이었다. 기실 내가 잘못했소 하고 자백을한다해서 그 손해를 변상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노동에 대한 보수 만 챙겨갈 뿐, 작업 결과에 대한 책임은지지 않는 법이다. 그런걸 뻔히 알면서도 궂이 책임의 소재를 가려내려하는 뒷면에는 같은 사안의 재발이나 방지해보자는 안스러운 몸부림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쪽가위를 들고 일어서는 상황은 만들지않되 최대한 양심에 압박을 가하는 그런 작전 인셈이다.
[노메꾸에르도?]
영준은 방금전 호세가 했던 말을 그대로 흉내내며 녀석을 처다보았다.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슬적 뒤집으며 농담하듯 미소를 띠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감을잡은이상 공연히 소득없는 신경전에 시간을 허비할필요가 없다는 판단애서였다.
[시이, 미스터킴. 노메꾸에르도.]
처남이 없어서그런지 호세는 훨씬 자신 있게 대답을하며 오스카를 건너다 보았다. 원래 순한녀석이 마음편히 말해서그런지 정말 기억이 안나서 저럴거라는 생각이 들정도 다. 호세의 확실한 굴복을 확인한 오스카는 거보란 듯이 팔장을 다시지르며 소파에 등을 누였다.
바보같은 녀석, 영준은 문득 자기 애인까지도 가로채간 오스카녀석에게 어째서 호세는 저렇게 질질 끌려만다니는걸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자 공연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 치미는 부아와함께 나타난 것은 이사벨의 팬티 속으로 숨어들다 남은 뱀꼬리였다. 언제나 호세와 오스카의 관계를 생각 할때면 해바라진 이사벨의 얼굴이 떠오르며 동시에 분통처럼 허연 그녀의 엉덩이에 타투된 초록색 뱀꼬리가 선명하게 투영되 오는 것이었다.

벌써 일 년도 더 지난 일이다. 샌드위치에 커피 한 잔으로 느슨한 토요일 아침을 맞고 있는 영준 앞에 얼굴을 벌겋게 달아올린 호세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오스카가 창고에 들어가서 나오질않는다는 것이었다. 토요일은 대게 일이 밀려 있는 파트의 사람들이나 몇 명 나와 두 세시간, 길어야 오전 작업으로 일을 끝내는 날이다. 특별히 오스카는 딜리버리와 자재관리, 뒷일파트의 작업독려등 들숙 날숙한 일을 하기 때문에 딱집어 이거다, 하고 정해진 일이 없는 아이다. 옷걸이나 폴리백, 쓰다남은 실박스 등이 쌓여 있는 창고에 들어갔다면 아마도 그런 것들을 정리하고 있을 터 였다. 그런대 호세녀석은 자꾸 가보라는 것이었다. 제딴에는 뭐라고 진지하게 설명을하는데 영준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올 해로 꼭 오 년째 봉재공장을 운영하며 터득한 스페니쉬로 별어려움없이 그들과 대화를 하기는 하지만, 그 것이 봉재의 범주를 벗어나면 단번에 까막귀가 되고마는 영준이다. 어쨌던 그날도 호세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한 체로 녀석의 간절한 눈빛에 끌려 창고로 들어 선 영준은 가슴이 벌렁 들릴만큼 기막힌 장면과 맏닥뜨렸다.
우선 너무 놀라서 인지 도대체 그것이 어떻게 엉켜 있는 것인가 얼른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허지만 한 순간 후, 이내 파악이 되어졌다. 그러니까 노란 티셔츠가 겨드랑이까지 말려올라간 여자의 허연 엉덩이가 실박스 위에 무릎을 세운 사내녀석의 장단지 위에 걸터않아 있는 것이었다. 연신 울렁울렁 요동치는 그 덩어리들은 영준이 들어 선줄도 모르고 탐닉에 열중이었다. 사내녀석이 여자의 젓가슴에 코를 박고 있어서 그렇기도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귀가 멍멍하도록 틀어놓은 라디오의 굉음에 발자국 소리나 인기척따의는 들릴턱이 없었다. 오히려 처음엔 가슴이 치받히도록 놀랐던 영준이 상황을 인지한 후에는 되려 마음놓고 훔쳐보아도되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정도 였다.
그리고 뱀을 보았다. 아니, 뱀을 통째로 본 것은 아니다. 여자의 히멀건 엉덩이 아래쪽에 겨우 걸린 팬티자락 속으로 숨어 든 머리와 몸통을 뺀 꼬리부분이었다. 진초록과 빨강색의 비늘이 교직되어 리드미컬하게 S 자를 그리고 뻗쳐오른 뱀의 꼬리였다. 저 엉덩이를 타고내려간 뱀대가리는 어디쯤에 멈추어 혀를 날름대고 있을까, 아주 짧고 절박한 순간이었지만 그런 궁금증에 사로잡혔던 영준은 이내 정신을 번쩍차리고는 후딱 창고를 벗어났다.
조금전 자신을 찾아왔던 호세보다 더욱 벌게 진 얼굴로 뛰쳐나온 영준을 말둥히 올려다보며 왕코녀석은 뭔가 단서를 찾으려고 눈알울 굴렸다.
[야이, 바보 같은놈아.]
영준은 호세가 알아들을턱이없는 한국말을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 녀석의 얼굴에 벧아 주었다. 그렇게 무안한 얼굴이되어 사무실로 돌아오는 영준의 머리속에 언젠가 호세와 이사벨이 상기된 얼굴로 창고를 나오던 기억과 함께, 방금전 자신이 본 뱀덩어리가 이번엔 오스카와 이사벨이었다는 것이 동시에 떠올라왔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호세는 카운트하지말고 오스카가 직접 확인해서 딜리버리 해. 알겠지? 그럼 가서 일들 해.]
틀림없이 이번 일은 오스카녀석의 짓이며, 그것은 처남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곱씹으며 영준은 자리를 털었다. 영준의 속마음을 얼마간 눈치챘는지 오스카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싱뚱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갔다. 그런 오스카의 뒤를 멋적은 웃음을 배어문 호세가 쭐래쭐래 붙어선다. 사슴처럼 날렵한 오스카의 뒤를 곰처럼 어기적거리며 따라가는 호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아내의 말처럼 저 순둥이녀석은 미스 최가 오스카의 애인이되면 이사벨이 자신에게로 되돌아 올것이라는 개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하고 영준은 생각했다.
[오스카를 내 보내야겠어요.]
칸막이 뒤의 간이침대에 누은 아내로부터 목소리 만 그렇게 풀석 넘어왔다. 점심 식사 뒤면 으레 후식처럼 즐기는 아내의 낮잠이다. 그러나 음성에 잠기가 묻어있지 않은걸 보니 아내는 이제껏 칸막이 이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야, 처남을 내 보내야해. 허지만 영준의 그것은 소리없는 말이었다. 꽉 다문 입술과 지려감은 눈자위로 단호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누구의 책임문제를 넘어서 이참에 아예 처남의 신상을 정리해버리자, 하는 것이 조금전 자리를 털며 일어설 때 내린 영준의 결심이었다. 그렇다고 생각잖은 일로 낮잠까지 빼았겨보린 아내에게 상규로부터 온 전화내용을 불쑥 까발릴 수는 없었다. 빠른 시일내에 적당한 날을 잡자고 속을 다지는 것으로 급해지려는 마음을 눌렀다.
그런 영준의 머리속에는 지금 호세 때문에 상기된 미스 최의 갸름한 얼굴이 가득 들어차 있다.
알 수 없는 여자야, 영준은 불현 듯 일어나는 호기심으로 당장 고개를 빼어 훌로어를 넘겨다 보았다. 언제나와같이 미스 최는 남미계들 틈에 섞여앉아 고개를 가붓 숙인체 바느질에 열심이었다. 별 장식없이 머리뒤로 바짝 묶어올린 말총머리가 몸의 움직임에따라 살랑살랑 꼬리를 쳤다. 분리된 일감을 맞추어 박느라 팔꿈치를 한껏 벌려 봉침 앞으로 두손을 밀어넣고 있었다. 일에 비해 터무니없이 크고 느린 몸동작으로하여 누가보아도 숙련된 미싱사가 아니라는 것을 금새 알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스 최자신은 너무도 진지하고 열심이었다. 처음엔 며칠이나갈까 하고 시큰둥하던 아내도 이젠 동생이나 대하듯 살갑기 이를 데없다. 아내가 미스 최에게 그렇게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러니까 미스 최는 아내가 라벨을 붙이라 건, 고무줄 텍을하라 건, 부라우스 밑단을 박으라 건 군말이 없다. 오히려 처진 일감을 가져오는 아내의 미안함을 묻어주듯 환한 웃음으로 냉큼 받아하곤 했다. 서른 안팎의 나이에 그만한 열성이면 타운에 널려 있는 한국삭당의 웨이츄레스를해도 봉제공장에서 먼지 먹는것에 비할바가 아니련만, 미스 최는 여자답게 조신히 바느질이나 하겠다는 듯, 하루 종일 아내가 원하는 일을 고분고분 했다. 때로 같이 일하는 한국 아주머니들이 그까짓 상표나 붙이고 밑단이나 박는 일이 무슨 돈이 되느냐고, 좀 좋은 일감을 달래보래도 그냥 배시시 웃기만하더라고 아내는 말했다.
아내는 블랙타임이나 점심 자리에 꼬박꼬박 미스 최를 불러들였다. 영준은 불편을 느껴 아내에게 핀잔도주었지만 한 편으론 싫지만도 않았다. 미스 최로하여 공장에 활력이 생기고 생기가 돌았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식사에만 열중인듯했지만 처남도 미스 최의 출현을 은근히 반기는 눈치였다. 그러나 대개의 일이 그렇듯 미스 최의 등장이 긍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스 최가 몰고온 환력과 생기는 흥분과 호기심도 함께 동반한 것이었다. 나중에야 원인이 처남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지만, 수면에 파장을 일으킨 것은 오스카가 먼저였다.
[여보, 저기 좀봐요.]
언젠가 점심 식사 후 거래처 두어군데를 돌고 온 영준에게 아내가 호들갑스런 음성으로 훌로어를 가리켰다. 뭔데, 사무실 유리창너머로 고개를 뺀 영준은 아내가 무얼 가리키는지 몰라 그렇게 되물었다.
[저거 안보여요? 미스 최 옆에놓인 장미꽃다발.]
그제서야 영준도 볼수 있었다. 미스 최의 미싱옆 철제 테이블 위에 붉은 장미 한 다발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오늘 무슨 날이야? 미스 최 생일인가.]
의아한 미소를 베어물며 영준은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영준의 팔뚝을 쿡 쥐어박으며 피잔을 주었다.
[미스 최 생일이냐구요? 당신, 오늘이 발렌타인데이란걸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칫, 올해도 또 그냥넘어가려나봐.]
아, 오늘이 발렌타인데이여서 그랬군. 그제서야 영준은 생각이 났다. 거래처에 들렀을 때 사무실 마다 화사하게 꽂혀있던 장미꽃과 테이블 위에 놓여진 초컬릿 상자들이. 미국살이 칠 년이라면 이제 발렌타인데이쯤은 기억 할 만도하건만, 영준은 해마다 아내의 면박을 받아야 겨우 아, 하고 생각이났다. 가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오 십대, 육 십대들도 꼬박꼬박 챙긴다던데, 어제 사십고개를 넘어선 영준은 도대체 그게 되질않았다. 영준은 볼을 쓱쓱 부비는 것으로 무안함을 대신 했다.
[당신, 저 장미꽃 미스 최가 누구에게 받았는지 알아요?]
그러고보니 영준도 그게 궁금했다. 그동안 아내를 통해 들은 미스 최는 미국에 온지 서너달밖에 않됐고, 더구나 이곳엔 아무런 연고도 없다고 했다.
[저 장미꽃, 오스카가 보낸거래요.]
[뭐, 오스카?]
영준은 느닷없이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동안 길지않은 미국생활 대부분을 다운타운의 봉제공장에서 보내며, 남미계들이 맹목적으로 동양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있었다. 그렇지만 오스카가 미스 최에게 장미꽃이라니. 더구나 뻔히 이사벨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그래서, 미스 최가 저 꽃을 말없이 받았단 말이야?]
영준은 이사벨의 엉덩이에 붙은 뱀꼬리의 환상을 서둘러 지우며 그렇게 물었다.
[글쎄, 내가 잠깐 눈을 붙이고 나와 보니 미스 최가 저걸 받아들곤 어떻해야 좋으냐고 울상이더라니까요. 자기는 받고싶지않지만 그러면 혹시 실례가 되는 게 아니냐면서. 재밌어, 정말.]
그러는 아내도 말을 끝내고는 영준처럼 깔깔 웃었다.
처남과 오스카가 창고 속에서 드잡이질을 친 것은 미스 최가 장미꽃을 받은 그 다음 날이었다. 그리고 그 드잡이질을 시발로 처남과 오스카의 반목은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여보, 아무래도 당신이좀 나가봐야겠어요.]
라임씹은 얼굴로 다가와 선 아내의 표정 때문에 서둘러 전화를 끊은 영준은 급히 훌로어로 나갔다. 무슨 일인가 물을 필요도없이 공장 후면의 뒷일파트쪽으로부터 거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저사람, 저거. 그것이 한국어로 하는 처남의 욕설이라는 것을 느낀 순간 영준의 안면이 왈칵 찌브러들었다. 영준이 찌그린 얼굴로 들어선 뒷일쪽 공장바닥은 쓰레기통을 엎어놓은 것처럼 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한편에서는 다림질을하고 또다른쪽에서는 실밥을 따서 폴리백을 씌우는 사이의 공간 바닥에 풀어진 고무줄뭉치와 지퍼, 각종 상표와 사이즈티켓따위들이 눈처럼 하얗게 널려 있었다. 카트 하나가 모로 누워 있는 걸보니 그 모든 것들이 그위에 실려있다가 나동그라진 것같았다.
처남과 오스카는 배를 드러낸 카트의 양쪽 끝에 나뉘어 서서 으르렁대고 있었다. 뒷일파트의 십여명 남녀들도 모두 일손을 놓은체 두 사람의 싸움에 정신을 팔고 있다.
[어떻게 된일이야?]
누구에게랄것도없이 영준은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오스카가 유노 왓, 미스타 킴.하며 가슴을 세웠다. 아마도 영어로 한 영준의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래, 말해봐. 영준은 안면은 찌그려 둔체 오스카의 말을 눈으로 재촉 했다. 허지만 오스카 보다 처남의 입이 빨랐다.
[어떻게 된일이냐하면요, 제가 이 뒤쪽을좀 정돈하려구 저것들을 옮기는데 말입니다, 이자식이 그냥 난리를 치며 방핼하는거예요. 글쎄 제가 끌고 오는 이 카트를 다짜 고짜 거꾸로 냅다...]
영준은 알았어, 하고 손을 들어 처남의 말을 제지 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처남의 따다거리는 음성을 들으면 이유없이 짜증이 솟구쳤다. 그리고 상황을 보니 무슨 일인지 알만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전엔가 처남이 여러 거래처의 각종 자재들이 너무 무질서하게 놓여있다며 뒤쪽으로 옮겨 정돈하겠다는 말을 했었다. 영준은 생각없이 그것도 좋지, 하고 넘겨버린 일이었다. 영준은 오스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스카, 넌 어째서 반대 하는거지?]
영준의 지목을 받은 오스카는 두 손바닥을 허리높이로 나란히 들어올려 찰랑 흔들며 유노 왓, 하고 잠시전의 자세로 되돌아갔다.
오스카의 대답은 간단했다. 각 박스별로 한 회사의 부품을 몽땅 넣어두는 지금의 방식이 좋다. 왜냐하면, 이 킴스패션이 생긴 이후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기때문이다, 무질서한 것같지만 그 방법에 모두가 익숙해 있다, 그래야 실수가 없다, 그런 말이었다. 듣고보니 새로운 방식으로 정돈 하는 것보다는 그대로 두자는 오스카의 말이 훨씬 공감되었다. 그 동안 공장을 운영하며 항상 어처구니가 없을정도로 단순해야 만 그들과 통한다는 것을 얼마나 뼈저리게 느꼈던가. 이회사 상표를 저회사 옷에 붙이고, 부라우스에 달아야 할 단추를 쟈켓에 붙여 난리를 친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어지럽거나 복잡해지면 십 중 팔구 재작업을 하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어휴, 하나 만 가르쳐주는 건데. 공장 초기에 툭하면 머리를 싸안은 아내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다.
상표는 상표대로 칸을 만들고, 고무줄은 고무줄대로, 지퍼와 단추도 다 각각의 선반에 비치한다. 그리고 각 회사의 스타일넘버에따라 작업지시서를 참조하여 꺼내다 쓰면 된다. 박스에 담겨 공장바닥에 뒹굴며, 오가는 발길에 차이는 것보다야 얼마나 보기도 좋고 일하기도 편리한가, 하는 처남의 장황한 설명이 뒤따랐지만 영준은 고개를 저었다.
[오스카 말대로하는 게 좋겠어, 미관상 않좋기는하지만 여지껏 해왔던대로 하는 게 편해. 이것들 다시 박스에 담아서 원래 있던 자리에 갔다둬. 그리고 처남은 흥분 좀 가라앉히고. 그저 시끄러운 일이 없는 게 누나를 돕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이 구경 하느라고 열 사람도 넘는 일손이 작업을 중단하고 있잖아.]
처남의 열심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영준은 사무실쪽으로 몸을 돌리며 문득 그런 의구심으로 머리속을 헤집었다. 오스카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작심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극악스러운 대립을 벌릴필요가 없을터였다. 처남은 이곳에 눌러앉겠다는 것인가. 그 둥지를 내집에 틀겠다? 막연했던 생각을 그렇게 하고나자 궁금증을 동반한 의구심은 걷잡을 수 없는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일은 뭐, 다림질 끝난 것 실밥 뜯는 곳으로 옮겨나주고, 딜리버리 할 때 물건 싣는 것이나 봐줘. 그저 왔다 갔다하며 일들 잘하고있나 살펴주는 것만도 한 사람몫은 된다구. 이곳에 있는 동안 처남 말처럼 머리나 식혀. 큰 맘먹고 계획한 멕시코 크루즈여행을 마다하고, 머리 식히는 데는 일이 더 낳다는 처남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영준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 처남이 걸핏하면 오스카나 호세와 다퉜다. 영준이 가끔 그 다툼의 자락을 들추어보면 왜저러나 싶을 정도로 악착같은 처남과 마주쳤다. 봉제공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치 상전이나 된 듯 군림하려 들었다. 순둥이 호세야 불평을 하면서도 처남의 말에 따르지만, 오스카는 달랐다. 봉제에는 까막눈이면서 조금 우수한 머리와 눈치만으로 지휘자가되려는 처남에게 승복할 오스카가 아니었다. 같은 중남미계라도 엘살바돌 출신의 오스카는 마치 섬나라의 사무라이처럼 악다받은 젊은이다. 이름만 붙여주지 않았다뿐, 처남이 오기 전까지 뒷일파트의 실질적인 메니져나 마찬가지였다.
천에따라 다림질을비롯한 뒷작업이 까다로운 것도 있고 쉬운 것도 있게마련이다. 그런 일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분배해주는 일도 오스카의 몫이다. 바로 십여명 뒷일파트 공원들의 희비가 오스카의 손짓 하나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처남은 자재 관리와 딜리버리는 물론 오스카의 절대 성역인 작업분배까지도 참견하려들었다. 당연히 오스카는 목을 뽑아 처남에게 대들었다. 아무리 사장의 동생이라지만 하루 아침에 느닷없이 나타나 주인행새를 하는 무뢰한에게 고분고분 할 아이가 아니다. 더구나 오스카는 공장을 오픈하던 첫날부터 일해온 킴스패션의 토박이다. 호세로부터 이사벨을 나꿔챈 힘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만큼 으시대는 자기 자리를 호락호락하게 포기 할리가 없는것이다.
누이네 공장이라지만 어쨌던 사람과 풍토가 다른 남의 땅인대 처남은 아랑곳이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이를 물고 혈압을 올리며, 그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한국말로 욕설을 퍼부었다. 상대를 여간 무시하지않고선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아예 서울에서부터 남미계는 열등하다는 인식을 가져오기라도 한 것일까. 욕지거리 한국말이 무슨 국어 사랑이라도 되는줄로 아는 처남을 바라보며, 영준은 저것이 용기일까 자신감일까 가늠해보느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격이 다혈질 인것이야 워낙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저사람이 정말 그런사람이었나 하고 영준은 예전의 처남 모습을 떠올려보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끔 거래처의 과계자가 나와 하이, 하고 일상적인 인사라도 할라치면 처남은 비굴한 미소를지으며 허리를 틀었다. 영준은 쓴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아야 했다. 그런 저런 일들을 생각하노라면 처남의 머리가 식기는커녕 되려 열탕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친구야, 지금까지 내가 한 말 믿겨지나?]
영준은 통화를 시작한 이후 반 시간이넘도록 오직 듣기만하고 있었다. 길고 부끄러운 사연을 마친 상규가 그렇게 물었을 때에야 영준은 비로서 후우, 하고 긴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나락 끝까지 가라앉았던 의식이 어질어질 흔들리는 체로 조금씩 부상해왔다.
왜 친구의 여동생을 처남에게 소개했던가. 무슨 책임이나 질 듯 강권까지 해서 말이다. 상규의 말을 듣는 내내 그 후회 만이 모래톱을 쓰는 밀물처럼 영준의 가슴을 때렸다.
처남이 그간 운영하던 가전제품점을 정리하고 새로운 사업 구상겸, 머리도 식힐겸해서 왔다는 아내의 말에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던 영준이었다. 아이엠에프니 뭐니 한국이 어렵다더니 처남도 그런 영향을 받았나보다 생각했다.
예사 일이 아니다. 병석의 처남댁과 아이 둘을 남겨두고 저만 훌쩍 건너오다니. 거기다 체권자의 고소로 경찰의 수배까지 내려 진 상태란다. 내돈 오천만원은 아예 생각도 않네, 상규는 그건 정말 문제도 아니라는 듯 한숨에 섞어 말하기도 했다. 영준은 기가막혔다. 처남은 그런 소리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마치 바람이나 쐬러 온 것처럼 가볍게, 머리 좀 식힐려구요, 몇 달 쉬었다 가겠어요. 그렇게 말했었다.
영준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수화기를 쥔손에 바짝 힘을 주었다.
[아니, 안믿어.]
시간을 두었다 대답하면 내용이 바뀔 것같아 영준은 단숨에 내벧았다. 그리고 다시는 말을 않을 것처럼 입을 꽉다물었다. 상규는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거칠게 넘어왔다. 상규 자신이 말 끝에 믿겨지나, 하고 물은 것은 비열한 처남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비난한 말에 다름아니다. 당연히 미안한 마음로 사후 대책을 논의하리라고만여겼지, 영준이 메몰차게 못믿는다는 대답을 하리라곤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태평양을 사이에두고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단검을 뽑아드는 쇠바람처럼 수화기 속을 뚫고 나왔다.
[영준, 많이 변했구나... 너의 그 대답, 삼십년 친구를 막보겠다는 소리로 들어도 되겠나?]
[오해하지 말아, 내 대답은 자네 말속에 내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야.]
영준은 눈을 질끈 감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게 안믿겠다는 소리 아닌가? 그래... 좋도록 하게. 할말이 한가지 더 있지만 분명한 사실도 안믿는 자네에게 그 말이야 해서 뭐하겠나.]
그렇군, 잘있게... 한동안의 정적 끝에 허무에 젖은 배신감을 억누르듯 상규의 잠긴 목소리가 가녀린 떨림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손끝으로부터 떨어지는 수화기 소리가 딸깍, 하고 들려왔다.
아니야, 상규, 잠깐만. 영준은 다급하게 수화기를거머쥐며 그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머리를 뚫고 솟구치는 분노가 생산한 마음의 외침이었을 뿐이다. 대체 내가 무엇을 한 건가, 어쩌면 가장 큰 피해자일 상규에게 엉뚱한 화살을 날린 자신의 행위가 미워 영준은 가슴이 미어지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나쁜놈! 영준은 처남에게로 향하는 맹렬한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 앞에 놓인 테이블을 힘껏 걷어찼다.

비가 올 것같지는 않았지만 하늘은 재법 흐려 있었다. 엘에이의 가을 날씨 치고는 흔치않게 햇살을 깊이 가리웠다.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을 숨긴 이런 날씨가 골프 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다. 그러나 영준은 입맛을 쩝 다시며 핸들을 공장쪽으로 돌렸다. 아내에게 말을 둘러대야 하는 게 귀찮아서 보란 듯이 골프가방을 둘러메고나왔지만, 영준의 마음은 지금 구름낀 하늘만큼이나 어둡고 착잡하다. 처남이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걱정이 앞서는때문이었다. 그 성격에 고분고분 비행기를 타겠다고 할런지, 아니면 적반하장으로 턱을 치켜들고 달려들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처남이 어떻게 나오던 이제 더 이상 내집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어, 영준은 스스로의 마음을 다지듯 입술에 바짝 주름을 모았다.
당신 집안 문제니까 당신이 해결해. 화가 난 영준은 그렇게 아내에게 떠밀어버리고 말까 하는 생각도해보았다. 허지만 그 생각은 이내 지워버렸다. 외아들인 처남의 일이라면 무조건 역성부터 들고보는 아내다. 그런 아내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처남 멋대로 하게 내버려두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상규와의 전화내용을 내놓고 아내와 함께 방법을 찾아보자 하는 것이 지난 밤까지도 굳어 있던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아침 날씨를 보자 바뀌었다.
처남과 단 둘이 톡까놓고 얘기하는 것이 결론에 도달하는 가장빠른 지름길이야, 잔뜩 흐린 날씨를 대하자 단번에 구름을 뚫고 햇살을 끌어낼 묘수처럼 떠오른 생각이 그것이었다. 자신이 먼저 담판을 지어보고 결과에따라 아내의 도움을 받아도되지, 하는 것이 아내를 배재한 이면의 위로이기도했다. 그러나 공장이 가까워질수록 처남이 자신의 바램대로 따라줄것같지 않다는 편편찮은 느낌이 영준의 머리속을 체워왔다.
남미계 공원들 서넛이 앉아 미싱을 돌리고 있는 공장안은 귀청이 떨어질 듯 볼륨을 높인 라틴음악만 가득 날아다니고 있었다. 처남은 화장실에라도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영준은 누가 토요일에 나와 일을 하나 고개를 뽑아 살펴보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처남이 오고부터 특별한 일이없는 한 토요일은 공장에 나오지않던 그 였다. 그러니까 주 중은 물론, 토요일까지 공장의 문을 열고 닫는 일이 처남 차지가 된 것이다. 처남은 공장열쇠를 갖은 것으로 주인 행세를 단단히 즐기는 모양이지만, 그랬거나 말거나 영준으로서는 더없이 편한 일이었다. 이제 처남을 서울로 보내고나면 그간 즐기던 느긋함이 사라지겠지만, 그 것이 처남을 보내는 데 눈꼽만한 아쉬움으로라도 남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화장실에 갔더라도 충분히 올만한 시간이 지났건만 처남은 종내 나타나질 않았다. 영준은 기다리다못해 사무실을 나섰다. 어쩌면 처남이 뒷일파트쪽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혹시 처남이 저 뒤에서 무언가를 자기 방식으로 뒤바꿔놓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부쩍 들었다. 영준은 마치 도둑놈이라도 잡으려는 살금한 걸음으로 가만가만 발자욱을 떼어갔다.
영준은 단추달이와 벨트룹을 자르는 미싱을 지나 부라우스가 가득 걸린 렉 사이로 살며시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림질과 실밥 자르는 일은 어제 점심 무렵에 모든 작업을 마쳤던 것이다. 오늘 뒷일쪽에 오버타임이 없다는 것은 영준 자신이 잘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영준은 부라우스더미를 쓱 헤치고 나섰다. 그때 영준의 귀에 무슨 소린가 들려왔다. 영준은 걸음을 멈추고 신경을 세웠다. 터무니없이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에 묻혀 언 듯 잡아내기 어려웠지만, 그 소리가 창고쪽에서 나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창고 옆으로 다가간 영준이 가만히 귀를 기우렸다. 창고 속으로 부터는 숨을 몰아쉬는 소리와함께 박스따위들이 부딧는 마찰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렇군, 이번엔 창고 속을 뒤집어엎나보군. 처남 이거 정말 못말릴 사람이야. 영준은 혀를 차며 빼꼼히 열린 창고문으로 고개를 쑥 집어넣었다.
처남, 무얼하고 있는 거야? 영준은 박스를 헤집고 있는 처남의 모습을 확인한 후, 되도록 놀라지않게 소리를죽여 그렇게 말하려했다. 엉터리같은 처남의 작업을 중단시키고 사무실로 데려와 이제껏 궁리한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있는 현장을 잡은 게 오히려 잘된 일이야. 영준은 그런 생각을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기까지했다. 그러나 짧은 순간에 했던 영준의 계획은 그것보다도 훨씬 짧은 사이에 깨져버렸다. 영준이 창고 문으로 집어넣었던 고개를 잡아뽑고, 불에 댄 듯 몸을 돌려세운 것은 불과 숨 한번 쉴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몸을 돌려 몇걸음 나아가던 영준이 갑자기 걸음을 딱 멈추었다. 영준이 뒤쪽으로 다시 몸을 돌린 것도 순간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영준의 이마에 내천자가 선명히 모여있다. 창고를 쏘아보는 영준의 시선이 흡사 외계인과 마주친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의혹으로 가득 했다.
사내의 장단지를 타고 앉은 여자가 으레 이사벨이려니 했다. 저 망할 종자들, 또 저짓이야. 얼굴이 확 달아오른 영준은 놀란 입에서 나오는대로 씨부리며 어쨌든 빨리 그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돌아선 영준의 뒤통수를 어떤 강렬한 것이 거세게 잡아다녔던 것이다.
뱀꼬리는 어디로갔을까? 먼저떠오른 의혹은 그것이었다. 허옇게 드러난 이사벨의 엉덩이에 있어야할 뱀꼬리의 부재였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저 말총머리는? 꼬리를 물고 이어진 의문이었다. 뱀꼬리의 부재 이상으로 강렬한 것이었다. 그 강렬함은 아주 선명한 얼굴 하나를 떠올려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갸름한 미스 최의 얼굴이었다. 미스 최의 얼굴이 떠오르자 이유를 모르는 체로 영준의 가슴이 철렁 하고 내려앉았다. 알 수 없는 일이였다. 초강력 접착제라도 바른 듯 영준의 다리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은 잠시 후 그가 맞닥드려야할 상황에 대한 어떤 예고였는지도 몰랐다.
미스 최의 어깨를 감싸안고 창고문을 나서던 처남은 뜻밖에도 영준의 모습을 발견하자 어쩔줄모르며 당황해 했다. 처음 한 순간은 다시 창고속으로 숨어들기라도할 듯, 감싸안은 미스 최의 상체를 흠칫 잡아 다니기까지 했다. 그러나 처남은 이내 마음을 바꾸었는지 미스 최의 어깨위에 올려 있던 손을 내리며 앞으로 한 걸음 쓱 나서는 것이었다. 기왕에 이렇게된 것, 그래 어쩔테요, 하는 낮빛이었다. 금시 작정했으면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그러기로했던양, 전혀 어설픈 구석이 없었다. 처남의 표정은 엄숙할정도로 결연하기까지해서 되려 영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하지않았나싶을 정도였다. 마치 영준을 질책이라도 하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 처남이 다시 한발작을 내딛으며 카하, 하고 마른 기침을 돋워 올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때까지 얼어붙어 있던 영준의 다리가 바닥에서 뚝 떨어졌다. 영준은 거친 숨을 후우, 내쉬며 자신도 모르게 얼른 한발짝 뒤로 물러났다.

할 말이 한가지 더 있지만 그만두겠네. 처남이 또한 걸음을 내디뎌왔을 때 불현 듯 상규의 마지막 말이 영준의 머리속으로 솟아올랐다.
오스카를 내보내야겠어요.언젠가 칸막이 뒤로부터 넘어왔던 아내의 목소리도 그렇게 들려왔다.

그러고보니 모두가 아는 사실을 영준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자각되어졌다. 푸웃, 체념같은 웃음이 영준의 입술 사이로 씁슬하게 흘러나왔다. 양팔의 힘이 쭉 빠졌다. 안그럴려고해도 한쪽 어깨가 자꾸 기우러졌다. 잘못하면 공장바닥에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준은 쳐지는 어깨를 추스러올리며 허리를 세웠다.무슨 할말이라도 있는지 처남이 다시 한걸음을 영준의 앞으로 덥석 다가섰다.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영준은 가슴을 불쑥 내밀었다.
[ 나가, 당장 내집에서 나가! ]
영준은 손을 내저으며 다급히 소리쳤다. 그냥두었다가는 오스카처럼 어깨죽지라도 거머잡힐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였다. 처남의 등뒤에 숨어 있던 미스 최의 뾰족한 얼굴이 옆구리께에서 폴삭 기어나왔다. 영준이 얼핏보니 고개만 빼꼼히 내민 미스 최는 어머, 왜저럴까. 하는 표정으로 붕어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두 눈이 미간을 향해 바짝 오므려진 것으로 보아 영준의 처사가 몹시 서운하다는 얼굴이었다. -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0 저녁은 라면 이용우 2008.12.06 569
9 싱글아파트 이용우 2008.12.06 758
8 우기(雨期) 이용우 2004.04.01 1824
7 순수를 찾아서 이용우 2004.02.28 1238
6 경 적 이용우 2002.12.21 1100
5 꽃 말리는 여자 이용우 2002.12.21 1659
4 낮 술 이용우 2002.12.21 1686
3 형님의 선글라스 이용우 2002.12.21 1237
» 킴스 패션 [2] 이용우 2002.12.21 1160
1 로스엔젤레스는 겨울 이용우 2002.12.21 1331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2
전체:
32,6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