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적

2002.12.21 14:16

이용우 조회 수:1100 추천:122

그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마치 잠깐 생각에라도 잠긴 것처럼. 그러나 감은 눈속 그의 동공은 지금 막 분출을 시도하는 활화산처럼 벌겋게 끓어 오르고 있다. 가슴이 덜컹 거렸다. 자꾸 거칠어 지는 호흡을 억누르느라 어금니를 으깨물었다.
바보 같은 놈. 그는 자책의 채찍으로 힘껐 자신의 등을 내려 쳤다. 조금도 시원하지 않았다. 손톱 만큼의 아픔도 느낄 수없다. 그는 다시 한 번 모질게 채찍을 휘둘렀다. 역시 감각이 없다. 물리력 없는 허상의 체벌로는 결코 징벌 되지 않았다.
경적(輕敵) 그 겄이었다. 수를 보지않고 적을 가볍게 본 것이다. 경적필패. 언제나 그런 지경이 되어서야 떠오르는 경구다. 맞고나서야 깨우친다. 어제 이겼다고 오늘도 이길까. 평소의 전적이 언제나 그 확율대로 적용될것이라는 꿈을 깔고앉아 바둑을 두다니. 그는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과 부끄러움으로하여 할수만 있다면 감은눈 그대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고싶은 심정이였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면서 성공이 실패의 어머니라는 것은 잊고 있었던 자신의 자만에 몸을 떨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번 듯 떴다. 불게 충혈된 눈으로 반상을 쏘아 본다. 좌하에서 시작해 우상까지 바둑판을 양단하며 비틀거리는 그의 대마가 연줄처럼 가늘다. 그정도 크기의 말이라면 마땅히 여의주 문 용처럼 웅비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말은 마치 개울 물을 가로지르는 실뱀처럼 여리고 허약 하다.
집이 없다. 아무리 노려보아도 집 하나를 더 낼곳이 없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는 거푸 자책하며 낙담했다. 원인을 따지자면 몇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었보다도 좌하 귀의 날일자 굳힘을 세 번이나 손 뺀 것이 화를 자초한 뿌리였다. 상대가 으래 터진 외벽을 먼저 봉쇠하려니 생각 했다. 그때 입구자로 공격을 겸한 보강을 한다, 그런 혼자만의 생각으로 손을 빼어 여기 저기 벌리고 굳히며 깨소금을 씹었다. 그런데 상대는 봉쇄를 미루고 훌적 삼삼을 뛰어들었다. 물론 그도 침입을 먼저한다면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앙을 향해 터진 광활한 천지에서 내 말 하나가 못살까 하는 자신감에 그는 거푸 손을 빼는 모험을 벌렸던 거다. 상대의 완착에 기대어 단숨에 승세를 굳히자는 발빠름이 스스로의 발등을 밟은 꼴이었다.
종반에 접어든 지금 그는 반면으로 스무집 이상을 앞서 있다. 어차피 중앙은 공배가 될곳이다. 그 넓은 평원에서 두 집내고 살기만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 귀에서 선수 한 집은 보장되어 있으니 중앙에서 한 집만 더 내면승리는 갈곳없는 그의 것이다. 남은 일이란 서울 왕복 비행기표와 우숭컵을 챙겨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자랑스레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삼삼을 침입당하여 중앙으로 한 칸 덜렁 뛴후에 살펴보니 우변에 펼쳐진 상대의 중공식포석이 시커먼 절벽으로 다가서 있었다. 그는 내심 뜨끔했지만 타개의 대가로 지불할 자잘한 손익만 생각했지 자신의 대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가정으로도 해보지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하며 허리를 바짝 세웠다. 책에 나오는 묘수풀이나 종반 타개책을 보면 전혀 수가없어보이는대 기막힌 곳에 열쇠가 숨어 있다. 정신을 차리자. 찾아보면 분명히 수가 있다. 그는 스스로에게 최면이라도 걸 듯 그렇게 대뇌를 향해 주문을 올렸다.
그는 뱀허리가 꼬여든 천원부근을 뚫어져라 노려 보았다. 수를 낸다면 모양상으로 그곳뿐이였다. 그런대 딱집어 이거다 하는 수가 떠오르질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고 위쪽을 젖혀야할지 아래쪽을 끊어 난전을 유도해야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어쩌면 반대쪽의 두점머리를 두드리는 것이 훨씬 유력한 수단같아 보이기도 했다. 혼란이 왔다. 둘러선 사람들의 시선이온통 자신에게 쏠려 있다는 것에 만 신경이 갔다. 바둑통 위에 올려놓은 오른 손등이 간질간질 했다. 그래서 그런지 대여섯수쯤 변화를 읽다보면 그만 가물가물 하고 계산의 꼬리가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그러다 또 서너수전의 계산을 잃어버리곤 했다. 정선으로 접어주고도 승율이 높던 상대에게 이게 무슨 망신인가 하는 비감으로 관상맥이 가스랜지 위의 냄비뚜껑처럼 팔닥거렸다.
젖히자, 끊자, 아니다 두점머리부터 두드리고보자. 판을 들여다 볼수록 생각은 그렇게 더욱 헷갈려만갔다. 뒷머리가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쿡쿡 쑤셨다. 열명도 넘는 관전자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둘러 서 있다. 삼 사위전이나 접바둑조들의 경기는 이미 끝난지 오래다. 대회 관계자들과 몇몇 참가자들은 호선부 결승전의 결과를 기다리며 삼삼 오오 모여 있다. 마냥 시간을 죽이고만 있을 수도없는 일이였다.
그는 어금니를 물었다. 안되면 최소한 패라도 내야한다. 그는 땀이 흥건히 배어난 손바닥을 옆구리에 쓱 문지르고는 돌 하나를 선듯 집어 들었다.상대도 어깨를 들어올리며 긴장의 빛을 드러낸다.
딱 하고 돌이 떨어졌다. 착점을 마친 그의 손이 잠간 돌위에 머물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이윽고 그의 손이 들려지고 그것은 이내 반상을 벗어났다. 바둑판이 환하게 드러났다. 상대를 비롯한 관전자들의 시선이 피사체를 향해 오므려지는 카메라의 조리개처럼 바둑판 위로 왈칵 모여들었다. 스무개쯤의 눈동자가 달라붙은 반상에는 방금전 그의 손을 떠난 하얀 바둑알 하나가 그 때까지도 바르르 몸통을 떨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동안 판위에 고정시킨 시선을 그대로두고 있었다. 그도 사람들처럼 방금전 자신이 놓은 바둑알을 무연히 내려다 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렀다. 이윽고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도 눈을 들어 그 사람을 마주 보았다. 모르는얼굴이었다. 옆의 사람도 고개를 들어 왔다. 그는 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 모르는 사람의 뒤쪽 사람이 얼굴을 빼어 넘겨다 본다. 역시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순간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내가 왜 저 사람들을 모를까?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바둑판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그리고 자신이 조금전 내려놓은 바둑알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 두점머리를 두드린 돌이었다. 그런데 돌이 엉뚱한 곳에 착지해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듯, 하얀 바둑알은 반듯한 네모칸 안에 퐁당 빠져 있었다.
그는 깜짝놀라 황급히 바둑돌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얼른 사람들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거기 하나같이 입을 헤벌린 사람들이 당신이뭘하고 있는지 다알겠다는 얼굴로 피식피식 웃고 있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그도 자신이 지금 무엇을했는지 깜짝 순간후에 깨달아졌다.그의 입이 헤벌어졌다. 그리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비실비실 따라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웃으며 보니 그들은 모두 그가 아는 얼굴들이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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