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기(雨期)

2004.04.01 10:44

이용우 조회 수:1824 추천:79

- 단편소설 / 이용우 -


우기(雨期)

하늘이 어두워 오고 있었다. 아침의 일기예보는 밤부터 비가 올 것이라고 했다. 남가주가 이제부터 겨울 우기로 접어드는 모양이었다. 희철은 백밀러에 매달린 세라믹 컵을 약지로 톡, 퉁겨 본다. 공명이 크지는 않지만 탱, 하는 소리가 제법 맑게 울린다. 공예학원에서 유미와 함께 만든 것이다. 찻잔이라곤 하지만 관상용으로 만든 것이어서 성인 엄지 한 매듭 크기의 조그만 컵이었다. 몸통은 유미가 만들고 귀바퀴 모양의 손잡이는 희철이 붙였다. 손잡이를 붙이던 희철의 손이 떨려서 귓밥부분이 조금 비뚤어졌다. 유미가 교정을 한다고 열심히 매만졌지만 바른 것을 단번에 잘 붙인 모양으로 되돌아 오지는 않았다. 찻잔의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팥알만한 핑크색 인조다이아를 박았는데, 불루톤의 바탕색과 아주 잘 어울렸다. 유미는 그 비뚤어진 컵의 손잡이에 자신의 은색 목걸이줄을 꿰어 희철의 차 백밀러에 달아주었다. 작은 것이 단단해요, 크면 깨지기 쉽거든, 우리 사이도 이 불루컵 같았으면 해요, 그렇게... 되겠지? 유미는 목걸이를 떼어낸 허전함 때문인지 드러난 앞가슴을 손바닥으로 꼭꼭 누르며 그렇게 말하다가는 쿡쿡 웃고 그랬다. 희철이 유미의 지난 모습을 떠올리고 빙그레 웃는데 가방을 둘러멘 헬렌이 녹색신호를 받아 탈랑탈랑 뛰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아빠, 있잖아, 쟈넷 언니가 저쪽에 갔다 온다고 조금 기다리래”
헬렌은 차문을 열고 올라 타더니 숨을 할딱거리며 말했다.
“어디?”
“몰라, 말 안해주고 그냥 학교 뒷문으로 나갔어.”
“또 뒷문으로 나갔어?”
희철은 은근히 짜증이 났다. 근래 들어 벌써 서너 번째 있는 일이었다. 말이 조금이지 언제나 30분을 넘겼다. 그렇게 사라졌다 돌아오는 쟈넷은 항상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어디갔다 오느냐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늦게 오는 것보다 그게 더 문제였다. 지난번에는 어떻게 하든 대답을 들어 보려고 재우쳐 물었더니, 아이 돈 워너 탁투 유! 하며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는 것이었다. 희철의 말이라면 언제나 쟈넷은 대꾸를 기피했다. 어쩔수 없는 상황이면 겨우 불어터진 목소리로, 그것도 짤막한 영어로 대답을 했다. 가능한대로 쟈넷과 친해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건만 희철은 아직 아이에게 한 발작도 닥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희철은 차의 시동을 걸었다. 학교 뒤편에 무엇이 있는지 오늘은 돌아보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앞길에 차를 주차 했던 희철은 북쪽방향의 첫 번째, 그리고 다음 블록에서 연달아 좌회전을 했다. 후문이 위치한 학교 뒷길은 팜츄리가 촘촘히 서 있는 제법 넓은 길이었다. 두 아이의 등하교 시간에 가끔 스트릿파킹자리가 부족할 때면 주차할 자리를 찾기위해 때때로 공회전을 하는 길이기도 했다. 하교 시간의 뒷길은 아이들과 마중나온 부모들로 해서 정문쪽 못지않게 복잡했다. 기다리는 사람을 찾아 걷거나 뛰는 아이들, 그런 아이의 이름을 자기의 언어로 부르는 갖가지 소리와 모습이 뒤엉켜 있었다. 포장이 조악한 아이스캔디를 팔거나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솜사탕을 매단 손수레들이 아이들의 길목을 막기도 했다. 희철은 길을 가로질러 뛰는 아이들과 갓길에서 돌출하는 차량의 방해로 어쩔수 없이 느리게 차를 몰아야했지만 그것이 양방향에 주차된 차속을 살펴보기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희철이 그런 생각을하며 남미계 풍선장수가 과장된 몸짓으로 동물모형을 만들고 있는 간이테이블 옆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노란색의 신형 폭스바겐에 잇대어 주차된 낡은 네이비웨건에 희철의 눈길이 머물렀다. 반짝거리는 새차와 구형 웨건의 극렬한 대비가 자연스래 시선을 끌었던 것인데 그 곤색 고물자동차 앞자리에 쟈넷이 있었다. 쟈넷 옆의 운전석에는 어떤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얼른보아 남자는 희철 또래의 삼십대후반 쯤으로 보였다. 이마가 넓은 수재형 얼굴이었다. 넓은이마는 햇살을 받아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은 그 남자를 보는 순간 희철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은 것이었다. 저 사람이 쟈넷의 아빠다, 하는 생각은 그 다음에 들었다. 본능의 직관성과 인지능력의 차이에 전율하며 희철은 얼굴을 붉게 달아올렸다. 쟈넷의 책상위에 놓여진 액자 속에서 활짝 웃는 남자의 사진을 보기는 했다. 어느 때는 어깨를 껴안은 세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책갈피에서 튀어나오기도 했다. 허지만 희철이 쟈넷 아빠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진으로 볼때는 실체성의 거리감이 막연했는데 막상 반질거리는 남자의 넓은 이마를 보자 가슴이 섬뜩하도록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가슴을 내려앉게 했다. 남자는 학교 뒷문은 물론 희철의 아파트 뒤쪽 어두운 골목에도 저 낡은 네이비웨건을 주차시켜놓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희철이 모르고 있었던 것 뿐일 것이었다. 관자놀이가 불끈거렸다. 정작 그들은 희철의 존재에 아랑곳없이 자신들의 대화에 열중이었다. 헬렌도 자넷을 보았는지 아빠, 저기 언니... 하다가 입을 닫았다. 아이도 자넷과 이야기 하는 남자에게서 뭔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희철은 무엇에 쫓기듯 서둘러 그 길을 빠져나왔다.
일기예보 대로 저녁이 되자 여지없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주와 자넷을 집에 대려다 놓고 잠시 낮잠에 빠졌던 희철은 유미의 공예학원으로 가기위해 하일렌드에비뉴를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달라붙어 텐트속처럼 아늑해진 차 안에서 희철은 지금 어지럽던 낮잠을 떠올리고 있었다. 유미와 같이 꽃병을 만들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불쑥 뛰어든 사내 하나가 희철의 어깨쭉지를 잡아올렸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누구시지요? 하고 희철이 물었다. 사내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아이 돈 워너 탁투 유! 여자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희철이 돌아보니 쟈넷이었다. 유미는 어디로 갔지? 유미는... 희철이 꿈속에서 허둥거리던 자신의 모습을 거기까지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리는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체가 심하게 요동쳤다. 혼이 나갔던 희철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차거운 빗방울이 얼굴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깨어진 앞유리창으로 굵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처음으로 유미와의 관계에 실패를 했다. 유미는 피곤해서 그럴거라고 어서 자라며 희철의 가슴을 쓸어주었다. 자동차 사고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이제 가능하면 비 올때는 운전을 피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희철이 하는 일이래야 아이들 등하교가 전부 이다. 피곤에 빗댄 유미의 위로는 달리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탓일 것이었다. 자동차 사고라는 것도 앞유리가 깨어진 것이 전부였다. 빗길을 저속으로 달리다 브레잌 밟는 것을 잊어서 앞차의 후미에 추돌을 일으킨 것 뿐이었다. 유미야말로 피곤했던지 이내 돌아누워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희철은 잠들지 못했다. 희철은 굳건히 발기되었던 자신의 남성이 어떻게 힘을 상실했는지를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이마 때문이었다. 차창에 빗긴 햇살을 받아 말갛게 빛나는 넓은 이마가 마악 삽입을 시도하려는 희철의 망막에 불쑥 나타난 것이었다. 그때 희철은 이미 유미의 몸 위에 있었다. 유미도 왜 방금전까지 자신의 살갓을 스치며 도전적 몸짓을 보이던 희철의 남성이 한순간에 힘을 잃었는지 의아 했을 것이었다. 유미는 조금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분명 잠들기 위해 그 의문을 수면제로 삼았을 것이다. 어쩌면 잠속에서도 힘빠진 희철의 성기를 꿈꾸고 얼굴을 찡그릴지 모를 일이었다. 언젠가 해명할 기회가 찾아와 이마 때문이었어, 라고 말한다면 유미가 이해 하려나, 희철은 실없는 망상을 하며 심각하게 냉소를 지었다. 희철은 들숨을 느리게 빨아들인 후 같은 속도로 날숨을 길게 내쉬었다. 열패감에 젖은 그를 둔중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도 그 말간 이마의 환영에 시달릴게 분명하다는 께름직한 느낌이었다. 마치 개의 모근에 달라붙은 진드기처럼, 날카로운 발톱으로 땡볕이 기울도록 털어내도 떨어지지 않는... 희철의 그런 느낌은 여지없이 들어 맞았다. 며칠 후 시도한 도전에서 희철은 또 한번 낭패를 겪고 말았다. 이번엔 희철이 유미의 위에 오를 일도 없었다. 말간 이마가 나타난 것은 발기도 되기 전이었으니까.

희철이 올림픽길에 위치한 공예학원을 다니게 된 것은 헬렌으로 해서였다. 어느날 헬렌이 유치원에서 조그만 꽃병을 하나 가지고 왔는데 슬쩍보아도 일반 상점에서 파는 것들과는 달라 보였다. 유명 상표가 몰려 있는 로데오드라이브에나 있을 듯 싶은 수제품이었다. 헬렌의 설명을 들어보니 유치원 선생님이 언니에게서 얻어 온 것을 자기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헬렌은 선생님의 언니가 만든 것이라고 재차 말했다. 희철은 투박한 질감으로 정겹게 빚어낸 꽃병을 보며 불현 듯 자신도 유약을 발라 도자기를 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죽은 아내로 비롯하는 상실감을 뿌리치려는 억지처럼 갑작스레 치솟은 의욕이었다.
희철에게 있어 대책도 없고 희망도 사라진 참으로 막막하던 때였다. 다운타운의 새벽꽃시장을 다녀오던 아내가 마약에 취해 중앙선을 넘어온 차량과 정면 충돌하는 사고로 죽은지 일 년, 아내가 하던 멜로즈의 꽃가게를 처분한 희철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제 엄마가 죽을 무렵 프리스쿨을 막 끝낸 5살박이 헬렌의 유치원 뒷바라지를 하며, 가끔 왜 나는 새벽시장에 꽃 사러 가는 일도 못했을까? 하는 회한이나 씹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때때로 아내가 묻힌 로즈힐을 찾아가 여보, 왜 그날 나를 깨우지 않았어, 하는 넉두리로 희철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도 했다.
대학졸업 후 평범한 셀러리맨이었던 희철이 배우자 초청으로 낯선 땅에 건너와 할수 있는 일은 흔치 않았다. 꽃집 아가씨의 배우자가 된 희철이 가게문을 열고 장미가시를 다듬고 슬금슬금 꽃배달을 하게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얼마가 지나 아이가 생기고 아이가 자라며 필요로 하는 자잘한 일들이 희철의 몪이 된 것도 역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중요하고 바쁜 일들을 결정하고 처리하는 능력은 희철이 아니라 아내에게 있었던 것이다. 남들이 보면 일의 분담이 뒤바뀐 것 같지만 희철이나 그의 아내는 서로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희철은 행복하고 아내는 평화 했다. 그렇던 행복과 평화가 미친 운전자에 의해 하루 새벽에 깨어진 것이었다. 희철과 6년을 산 아내는 그에게 조그만 꽃가게와 어린 헬렌을 남기고 죽었다. 희철에게는 아이와 꽃가게를 함께 꾸려갈 능력이 없었다. 그로서는 엄두도 낼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와 꽃가게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아내의 엄마는 자신이 헬렌을 보아줄테니 꽃가게를 그냥 해보라고 말했지만 아내가 부재하는 장모의 호의는 어쩐지 마뜩찮았다. 패달없는 자전거처럼 불편 할 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모의 권유를 뿌리친 희철은 꽃가게를 팔았다. 머리를 싸쥐고 궁리를 해보았지만 꽃가게를 위해 아이를 팔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내의 꽃가게와 바꾼 돈이 야금야금 줄어드는 것을 불안하게 셈하며 헬렌을 유치원에 데려다준 희철은 10번 후리웨이를 서쪽으로 타고 산타모니카로 달려가는 게 일과였다. 해안의 모래밭에 서서 물끝을 넘겨다 보면 그런대로 가슴이 후련했던 것이다. 물론 태양이 기울고 헬렌을 데리러 갈 시간이 다가오면 숨었던 근심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패스트푸드점의 창가에 앉아 아이의 즐거움에 억지 장단을 맞추며 씹는 햄버거는 여간 팍팍한 것이 아니었다. 희철은 그 스산함을 떨쳐내기위해 밤이 가고 해가 솟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헬렌이 들고온 꽃병은 그런 점에서 빛이 소멸된 희철의 삶에 태양을 선사하는 메신져였다. 희철이 찾아간 공예학원의 원장이 유미였던 것이다.
“남자도 있나요?”
희철의 물음에 그녀는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선생님께서 배우시는데 꼭 다른 남자가 있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그냥 혼자 배우시면 되지요. 네, 그래요, 배움은 혼자 하는 거예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자신의 뜻을 확신 시키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는 웃음이 지나치게 컸던 게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기도 했다. 가시지 않는 유쾌함을 어쩔 수 없다는 듯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털어내느라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기도 했다. 희철까지도 멍청했던 자신의 질문을 잊고 그녀의 유쾌함에 실려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의 언행은 꽤나 과장되어 있었지만 묘하게도 그런 모습이 희철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다른 남자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 희철 만은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들렸다.
“저도 배우면 이런 것을 만들 수 있을까요?”
희철은 헬렌이 가져온 꽃병을 종이가방에서 꺼냈다. 그녀는 꽃병을 받아들더니 눈을 둥굴게 뜨며 마치 감정이라도 하듯 한바퀴 빙글 돌려 보았다.
“네, 물론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댁의 손에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그녀는 좀전까지 띄었던 웃음기를 싹 지우며 목소리를 착 깔고 있었다. 동생에게 준 자신의 물건이 처음보는 남자의 가방에서 나온 게 영 이상하다는 얼굴이었다. 똑바로 건너다 보는 시선에 자기 동생과 희철의 관계를 헤아리려는 저의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 눈에는 실수 할 뻔했다는,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다짐까지 담고 있었다. 흥왕하던 분위기가 꽃병으로 인해 한 순간에 얼어 붙은 것이다. 희철은 당황 했다. 그로서는 생각지도 않은 일이었다. 희철은 얼른 종이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을 맞잡으며 아, 그건 말입니다, 하고 해명의 입을 열었다.
돌이켜 보면 그녀 유미도 팍팍한 한 때를 이겨내느라 물집난 발바닥을 쥐어뜯고 있던 시절이었다. 도박에 빠진 남자와 헤어지며 한껏 상처를 입은 한 마리 들토끼와 같은 처지였다. 남자가 차용해 쓴 잡다한 노름빚의 일부를 떠안기로 하고 이혼에 합의한 직후였던 것이다. 위자료는커녕 열살짜리 아이를 양육비도 없이 떠맡는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심히 부당한 거래였지만, 남자의 횡포와 거짓말에 지친 유미는 그렇게 해서라도 징그러운 남자에게서 놓여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오빠는 물론 유치원 교사인 동생 현미에게까지 빌려쓴 돈을 나몰라라 할 수는 없지 않으냐고 유미는 희철에게 털어 놓았다. 자신이 변제를 맡은 남자의 채무는 모두 자기쪽 사람들의 것이라고 유미는 덧붙이기도 했다.
희철이 유미와 전남자에 대해 한꺼번에 알게된 것은 공예학원에 나간지 육 개월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오후 클래스를 수강하는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후 희철이 평소처럼 불가마의 스윗치를 내리고 청소를 시작하려는 때 였다. 그 날은 희철이 제법 큰 꽃병 하나를 근사하게 구워 낸 날의 저녁이기도 했다.
“오희철 씨, 이리좀 오세요.”
유미가 간이 부엌에서 희철을 불렀다. 희철은 유미가 또 컵라면을 끓인 거 라고 생각 했다. 언제부터 인지 유미는 저녁이면 컵라면이나 사발면 따위를 전자렌지에 끓여놓고 그를 부르곤 했다. 물론 사무실에서 놀고 있는 헬렌과 쟈넷에게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킨이나 피자 시켜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 받으세요.”
유미는 붉은 액체가 가득 담긴 잔 하나를 희철앞으로 내밀었다. 포도주 였다. 희철이 눈웃음으로 무슨일이냐고 물으며 둘러보니, 테이블 위에서 김을 고실고실 피어올리는 컵라면이 그날은 보이질 않았다.
“대작을 완성하신 축하주예요, 이젠 더 배우실게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치얼스!”
희철의 잔에 쨍, 소리가 나게 자기 것을 부딪힌 유미는 적포도주가 가득담긴 잔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물을 마시듯 꿀럭꿀럭 넘기기 시작했다. 희철은 유미가 술 마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유미는 잔의 바닥을 보고야 말겠다는 듯 숨을 쉴 때는 술을 입 속에 머금고 잔도 입술에 그대로 붙인체 가쁜숨을 섹섹 쉬어가며 마셨다. 유미의 그런 모습은 그녀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것을 금시 알게 했다. 희철은 우정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며 자신도 포도주 한 모금을 꿀꺽 마셨다.
“이제 그만 오라는 말 인가요, 그 소리는?”
희철은 유미의 입술에서 잔이 떨어지기를 바라며 그렇게 물었다. 유미는 그러나 끝까지 다 마시고 나서야 후 하며 입에서 술잔을 떼었다.
“아니요, 그만 오라는 말이 아니라, 그만 배우라는 말이예요.”
“배우지 말면...?”
“오기만 하는 거지요.”
희철은 새삼스럽게 유미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결의에 차 입술을 꼭 닫은 유미의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피어나고 있었다. 유미 스스로 자신의 체질을 잘 알고 마신 것이겠지만 포도주는 그녀의 몸을 통해 놀랍도록 빠른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술 취하는 것도 전이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유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희철 자신도 머리가 어지러워 지는 것 같았다. 방금 유미가 한 말이 무슨뜻 인지 얼른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었다. 이 공예학원에서 배우는 것 말고 자신이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희철은 그 생각을 해 보았다. 불가마의 스위치나 점검 하고 하루 두 차래 수강생들이 어질러놓은 실습장을 청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희철은 슬그머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내의 꽃집에서 장미를 다듬고 꽃배달을 하던 자신의 모습이 불쑥 떠오른 때문이었다. 혼자 생각으로 멋적은 미소를 흘리고 있는 희철의 발앞으로 유미의 실내화 끝이 다가섰다. 희철이 눈을 들었을 때 유미는 술잔을 들지 않은 그의 다른 손 하나를 찾아 쥐고 있었다.
“제 말을 들어 주실래요? 당신께 무엇이든 다 말하고 싶어요. 오희철 씨, 내가 얼마나 심심 한지 모르시지요? 무섭도록, 난 정말 무섭도록 심심 하다구요.
유미는 어느새 눈물방울을 매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오히려 생경스럽도록 빠르고 낭낭 하게 쏟아 내었다. 기왕에 작정한 것 단숨에 말해버리고 말겠다는 표정이었다.
“난 그 사람을 대학 졸업하고 취직한 첫 직장에서 만났어요, 사귄지 일 년만에 결혼 했습니다. 그 게 십 년전이었어요. 연방정부 산하기관 이었는데 괜찮은 직장이었어요. 그 사람은 재원 이었지요.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항상 수석과 정상의 자리에만 있던 사람이랍니다. 결혼 일 년만에 쟈넷을 낳고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할 때까지 우린 행복 했어요. 지옥의 문이 열린 건 자신이 확보하고 있던 정상의 자리에서 그 사람이 밀려나기 시작한 순간부터 였어요. 어리석게도 그 사람이 자신의 좌절감을 도박의 그림자에 감추려 한다는 것을 알기까지
두 해가 더 지나갔습니다. 그 때까지도 견딜만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 끼리 속고 속이는 시절이었으니까요. 정말 지옥이 시작된 것은 직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절친햇던 친구들이 찌푸린 얼굴로 찾아오고, 급기야 해결사 라는 자들이 협박 전화를 걸어오기 시작한 거였어요. 외박을 밥먹듯 하던 그사람이 아예 잠적을 해버린 것이 그쯤에서 였습니다.
자신과 이혼 한 남자의 이야기를 섞어 한달음에 거기까지 털어놓은 유미는 희철의 손에 들려 있는 포도주를 양해도 없이 뽑아 마셨다. 희철은 이야기를 모두 들어줄터이니 진정 하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유미의 손을 끌어 의자에 앉혔다.
“몸을 숨긴 그 사람은 목소리로 괴롭혔어요, 돈을 만들어 오라는 거예요. 때로 전화 받기가 두려워 쟈넷에게 수화기를 들려주면 아이에게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미친 개처럼 말이예요, 자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시달리는 집사람은 안중에도 없이 통화만 되면 돈 달라는 소리가 전부였어요. 전화번호를 바꾸면 어떻게 알아냈는지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징그러운 목소리가 또 들려오는 거구요, 결국 경찰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어요. 이혼 하기까지 그 사람은 두 번이나 형무소를 들락거렸는데, 아직도 도박에서 손을 끊지 못하고 있다는 소릴 들었어요. 도박장 근처를 배회하며 거지처럼 생활 한다는...”
이제 유미의 얼굴은 짙은 선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동생 현미가 하던 이 공예학원을 생계를 위해 넘겨 받았다는 말을 할 때는 그 낯색이 더 빨게 지는 것 같았다. 고백 같은 자기의 말에 취해 그녀 자신은 잘 모를테지만, 그때 유미는 말의 행간마다 희철의 손을 힘껏 그러쥐곤 해서 두 사람의 손은 벌써부터 미끈한 땀으로 젖어 있었다. 유미가 땀으로 뜨겁게 데워진 희철의 손을 또다시 감싸쥐며 말을 이었다.
“오희철씨, 지금처럼 불가마 봐주고, 사람들 돌아가면 청소하고, 헬렌과 쟈넷 학교 데려다주고, 그렇게 살면 않될까요? 제가 매일 컵라면 끓여주고 가끔 이렇게 포도주도 한 잔씩 드릴께요... 싫어요?”
유미가 술이 취했다지만 그런 말을 하리라곤 생각 못했던 희철이 안그런척 놀라며 그녀의 손을 털었다. 희철의 손을 놓친 유미는 어깨를 으쓱 들더니 미안 해요, 내가 취했나 봐요, 하며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유미가 술을 먹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기 위해 술 마셨다는 것을 희철은 너무도 선연히 느끼고 있었다. 유미가 말하는 따위들이야 희철에게는 정말 일도 아니었다. 이 땅에 건너와서부터 지금까지 한 일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던가, 희철이 놀란 것은 기실 자신의 희망사항을 유미가 말해버린 바로 그 것 이었다. 희철은 놓았던 유미의 손을 슬그머니 찾아 쥐었다.
“좋아요, 그런데... 아침에도 컵라면 인가요?”

오랜만에 찾아온 산타모니카는 상쾌한 바람아래 물빛이 맑았다. 잠시 비가 그친 하늘 한 편에 햇살이 반짝 드러나 있다. 갈매기들은 여전히 무리를 지어 다니고 조그만 물새들 역시 바쁘게 먹이를 찾는 게 보인다. 파도가 밀려갈 때는 졸졸졸 내려가며 무언가를 콕콕 집어 먹고, 물살이 올라올 때는 되돌아 종종종 달려 나왔다. 물에 살면서도 물이 싫은지 앙징스런 발끝 한번 물에 적시지 않는다. 파도가 미처 오르지 못한 마른 모래위에 조개 군락처럼 한 무더기의 갈매기발자국이 찍혀 있다. 우기의 산타모니카를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말이다. 캘리포니아의 햇살이 뜨거워 지고 사람들이 찾아들면 모래사장 위의 갈매기발자국은 남아나지를 않는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바닷가로 몰려들면 갈매기들은 사람을 피해 산으로 날아가기 때문이었다. 희철은 쪼그리고 앉아 갈매기발자국을 손으로 쓸어 본다. 대여섯 개의 갈매기발자국이 희철의 손짓 한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앉은 걸음을 한 발짝 옮겨 또 한 차래 손짓을 한다. 역시 이번에도 그만큼의 갈매기발자국이 스러져 갔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갈매기발자국 같을 수 없을까, 희철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모든 인간 관계가 그 효력을 상실하는 순간, 없던 것처럼 사라질 수는 없는 걸까. 어린딸을 두고 간 아내를 생각해도 가슴 아프지 않고, 제 아이를 기다리느라 학교 뒷문에 고물자동차를 세워두고 있을 남자도 없는, 그렇게 지나간 삶의 발자국도 모래처럼 스러질 수는 없는 것인가, 지금 자신이 쓸어버린 갈매기발자국 같이 흔적도 없이. 희철은 허리를 펴고 일어나 멀리 물끝을 바라본다. 오후의 겨울 바다는 물과 하늘의 경계가 뚜렷한 금을 긋고 맏닿아 있었다. 유미와 동거를 시작한 후로는 한번도 찾지 않았던 바다 였다. 2 년 남짓, 바다는 그 세월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갈매기는 피어 위를 날고 작은 물새는 졸졸졸 물살을 따라 내려가고 올라 온다.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밭에 물끝을 향해 선 희철도 그대로 이다. 2 년 이라는 시간만 지나갔을 뿐이었다. 희철은 만세를 부르듯 주먹쥔 두 팔을 하늘로 치켜 올렸다. 전의를 불태우려 찾은 바닷가에서 되려 나약해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희철은 아-아- 하고 비명 같은 주문을 허공에 쏟았다.

“말해봐, 아빠하고 몇번 만났는지, 어서 말해!
화장실엘 가려고 방을 나서던 희철은 아이들의 방에서 흘러 나오는 유미의 격한 음성에 발을 멈추었다.
“한번 이라구? 거짓말 하지마, 엄마가 다 알고 있어, 그래 어떻게 만났어? 아빠가 너에게 전화 해서 언제 만나자 그렇게 했지?
헬렌이 말했구나, 하는 생각을 희철은 얼른 했다. 아줌마, 아줌마 하면서도 헬렌은 유미를 곧잘 따랐다. 어느 때는 삐치기 잘하는 쟈넷 보다 더 싹싹하게 유미를 감고 돌았다. 꽁 하고 자기 속을 틀어쥔 쟈넷에 비해 헬렌은 속없이 활달했다. 학교가 끝나면 같이 만나 아빠 차가 있는 길 건너로 함께오라는 말도 헬렌이 쟈넷의손을 끌지 않으면 되지않는 일이었다. 둘의 수업이 거의 비슷한 시간에 끝나는데, 헬렌은 자기가 먼저 마치면 쟈넷의 교실로 뛰어가지만 쟈넷은 헬렌에게로 오는 일이 없다고 했다. 쟈넷은 음료수 자판기 앞에 서 있던가 아니면 카페테리아 입구에서 헬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들도 활달한 헬렌이 재미난 이야기처럼 희철에게 깔깔거리며 말해서 아는 사실이었다. 쟈넷이 제 아빠 만난 일도 그 남자가 언니의 아빠라는 것도 잘 모른체, 공놀이 하는 얘기라도 하듯 아무 생각없이 불쑥 말했을 것이었다.
“아빠하고 만나서 무슨말 했어, 아빠가 너에게 한 말이 뭐지?
유미의 그 말을 끝으로 한 동안 방안은 고요에 빠졌다. 분명 유미는 대답을 재촉하며 아이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테고, 쟈넷은 입을 딱 닫은체 제 발등이나 노려보고 있을 것이었다. 희철은 그만 자리를 뜨려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꽤나 신경을 썼는지 깊은 숨이 절로 쉬어졌다.
“쟈넷, 엄마 눈 똑바로 보고 솔직히 말해, 그것 말고 아빠가 또 무슨 말 했어?
쟈넷이 뭐라고 말했는지 유미는 좀전 보다 더욱 강한 음성으로 아이를 다그쳤다. 아마도 쟈넷이 유미가 짐작하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먼 답변을 한 모양이었다.
“엄마 결혼 이야기? 그리고 또 뭐? 괜찮아, 엄마에겐 말해도 돼, 어서.
희철은 폈던 허리를 다시 내렸다. 아무리 귀를 바짝 세워도 쟈넷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유미의 아이 다그치는 말속에서 심각성의 경중을 대략은 짐작 할 수 있었다. 쟈넷이 유미의 추궁에 옳은 답을 한다면 희철이 궁금히 여기고 있는 것을 얻어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쟈넷이 아무리 영악 해도 제 엄마에게 붙들린 이상 아빠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터이다. 어쩌면 사내는 쟈넷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유미에게 전달시키려는 생각으로 아이를 불러내는 것 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정도야 사내처럼 수재가 아닌 사람들도 얼마든지 생각 할 수 있는 일이였다. 허지만 희철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쟈넷이 무슨 말을 했는지 유미의 목소리도 한층 낮아져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아니, 응... 그래그래, 하는 쪽말이 착 깔아붙인 음성으로 흘러 나왔다. 희철은 조용히 화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궂이 유미의 입을 통하지 않고도 아이를 불러내는 사내의 의도는 짐작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도박 중독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돈이다. 도박을 할 수 있는 밑돈 마련이 끼니 보다 절박한 인간들에게 그것 말고 달리 무엇이 있을 건가 말이다.

유미가 여느날과 달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불가마의 스위치를 올리고 작업대 위의 기구들을 정열하더니 깨끗한 바닥에 공연한 빗질을 했다. 급할 것도 없는 그 일들이야 언제나 희철이 하던 것들이었다. 커피물이나 올리고 사무실 소파에 앉아 아침에 배달된 조간신문 이나 뒤적거리는 것이 유미의 평상적인 그림이었다. 조금전 아이들을 학교에 대려다 준 희철이 다시 아파트로 돌아가 유미를 태우고 나오던 차속에서도 그랬다. 다른 날 같았으면 등받이에 상체를 느긋이 눕힌체 비오는 거리풍경에 취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커피를 홀짝거렸을 유미 였다. 별나게 비를 좋아 하는 유미는 여느때라면 틀림없이 오, 그레잇 데이! 하고 찬사를 쏟았을 것이었다. 헌데 유미는 출동을 기다리는 군인처럼 꼿꼿하게 앉아 빗방울이 분분하는 앞쪽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스치면 펑 하고 터질 풍선처럼 유미의 긴장은 한껏 팽창 되어 있었다. 분명 유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었지만 희철은 그런 유미의 생경한 모습이 불편해서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유미가 작업장에 있으면 희철은 사무실로 가고, 반대로 그녀가 사무실로 오면 그는 작업장으로 건너갔다. 희철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면서도 오히려 유미가 쟤먼저 나 이런 일이 생겼어, 하고 소름 돋는 이야기 라도 불쑥 쏟아 놓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희철은 자신의 나약한 심성을 혐오하면서도 언제나 그것의 지배에 충실 할 따름이었다. 안타까운 것과 벗어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희철씨...”
불가마의 계기를 들여다 보고 있는 희철을 유미가 불렀다. 희철이 돌아 보니 유미는 고개짓을 까딱하여 사무실로 오라는 눈짓을 했다. 희철은 가슴이 덜렁 거렸다. 담담함이 지나친 유미의 표정이 이제는 무슨 말 인가를 하려는 얼굴 이었다.
“희철씨, 나좀 다녀올 곳이 있어, 오전반 수강생들에게는 과제물을 주었으니까 됐고 오후반은 내가 한 시 안에는 올테니까 걱정 말아요.”
“무슨 일 인데 그래요?”
희철은 그제서야 겨우 그렇게 물었다. 허지만 유미는 이마에 주름을 모으며 대답을 피했다.
“나중에 말해 줄게요, 지금은 하기 싫어, 갔다 올께요.”
유미는 데려다 주겠다는 희철의 제의를 거절하며 사무실 문을 밀고 나갔다. 희철은 우산도 없이 빗속으로 들어서는 유미의 뒤를 몇발짝 따라섰다. 유미는 이미 택시를 불러놓은 모양이었다. 가끔 수강생들이 이용 하는 한국택시 한 대가 학원 문앞에 서 있었다. 사무실을 나선 유미가 곧바로 주차장에 기다리고 있던 택시의 뒷자리로 올라타자 차는 떠나갔다.
유미는 약속한 한 시가 지나 두 시가 가까워도 오지를 않았다. 이제 곧 오후반 수강생들이 몰려 오고, 아이들의 하교 시간에 맞춰 희철이 학교로 가야 하는데 유미는 셀폰을 꺼놓고 아예 받지도 않았다. 그런 걸 모를리 없는 유미의 속이 지금 얼마나 타고 있을까 생각하자 희철은 가슴이 콱 막혀왔다. 말은 안했지만 유미의 외출이 무슨 일 때문인지 희철은 확연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쟈넷의 아빠, 도박중독자가 된 사내의 일이 아니고서는 유미에게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유미가 떠나고 난 후 희철의 망막에 그 말간 이마의 사내가 수 십번도 더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희철의 남성을 무력화 시킨 사내의 이마였다. 그것은 결코 유미의 일 만이 아니었다. 아니, 유미가 아니라 그에게 더 절실 하게 다가오는, 누구 보다도 희철이 넘고 극복 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좌절과 방황 끝에 낯선땅에서의 재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튼 둥지였다. 그 둥지에 지금 안팎으로 빨간불이 켜져 있는 것이다.
희철은 양팔을 힘껏 뒤로 젖혀 심호흡을 하며 발을 탁탁 굴렀다. 헛기침을 컥컥, 하고 음음, 목청을 가다듬었다. 희철은 거칠게 사무실 문을 밀고 나왔다. 한낮의 주차장엔 아침에 불지 않던 바람까지 거세게 불고 있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팜츄리가 비바람에 쓸려 허리를 꺾고 있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잎사귀들이 차량의 지붕에, 주차장의 시멘트블럭 위에 그리고 더러는 희철의 얼굴에도 날아와 붙었다. 희철은 개의치 않고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희철은 이제부터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기로 한 자신의 결심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차를 출발 시켰다. 수강생들이야 왔다가 그냥 돌아가던지 아니면 전날의 과제물을 실기 하던지 알아서 할 것이다. 아이들도 늦으면 늦는 대로 희철이 늘 주차하는 학교정문 앞에서 기다려 줄 것이었다. 아내의 꽃집 판 돈을 모두 인출 한다는 것이 희철의 결단을 주춤거리게 한 마지막 걸림돌이었지만 그것도 이제는 더 이상 애착을 두지 않기로 한 마당이다. 지하의 아내도 자신과 헬렌이 행복해지는 일이라면 기쁘게 허락할 것이라고 희철은 믿기로 했던 것이다. 희철은 이 아침 유미가 했던 것처럼 비바람이 몰아치는 전방을 응시하며 꼿꼿이 허리를 세웠다. 택시회사에서 일러준 타운 외곽의 샤핑몰을 찾아가려면 라브레아 길에서 우회전 하고, 멜로스를 만나면 좌회전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 할 뿐이었다. 사내를 찾아 은행에서 인출한 아내의 꽃집 판 돈을 면전에 던져주고 유미를 대려오면 그 뿐인 것이다.
택시회사가 알려준 주소지는 십여개의 업소들이 단층의 기역자건물에 늘어서 있는 조그마한 샤핑몰이었다. 유미의 공예학원처럼 정사각형 주차장의 가장자리 두 면에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 몰이었다. 희철은 조심스럽게 주차장으로 들어서며 먼저 사내의 네이비웨건을 눈으로 찾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날씨여서 주차된 차들의 모습이 쉽게 판별되지 않았다. 작은 샤핑몰들이 대게 그렇듯이 차들이 너무 빼곡이 주차되어 있는 것도 식별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희철은 혹시 유미가 창가에라도 앉아 있다가 자신의 차를 먼저 보아버리는 것이나 아닐까 싶어 그럴만한 업소를 훑어보느라 시선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희철이 긴 나무간판에 쓰인 ‘Coffee'라는 영문과 사내의 낡은 차를 동시에 발견한 것은 주차장의 두 번째 열을 막 돌아선 순간이었다. 네이비웨건의 후미를 발견하고 놀라 머리를 들었는데 그 차의 지붕 위로 커피샵의 간판이 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사내의 차는 바로 커피샵의 출입구 앞에 주차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희철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네이비웨건의 뒤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어쩌면 유미가 그 속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차는 비어 있었다. 낡은 차에 빗물이 마구 흘러내려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사내의 차속에는 사람의 윤곽이 보이지 않았다. 유미와 사내는 커피샵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커피샵의 다른 편에 치킨가게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을 닭고기집에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았다. 빈자리를 찾아 자신의 차를 주차시킨 희철은 전의를 가다듬 듯 한차래 길게 심호흡을 했다. 이제 커피샵으로 뛰어들어가 유미의 놀람을 외면하고 도박꾼 사내의 면전에 돈뭉치를 던져주면 되는 것이었다. 희철은 쟈켓 속주머니에 든 돈봉투를 다시 한 번 더듬어 본 후 비바람이 분분 하는 주차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차거운 빗방울이 얼굴로 후두둑 달려 들었다. 비를 피하느라 한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린 희철이 커피샵을 향해 잰걸음을 몇발짝 옮겨놓았을 때였다. 커피샵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두 사람의 남녀가 뛰어나오고 있었다. 여자가 앞이었고 남자가 뒤였는데 그들은 바로 다름아닌 유미와 사내였다.
“몇번 말해도 내 대답은 노예요, 절대, 절대 않돼요!”
사내가 자신의 팔을 잡기라도 하듯 유미는 격하게 손을 내저으며 단호하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있었다.
“글쎄, 알아, 그렇지만 내 심정도 좀 헤아려줘야 하는 것 아니냐구?”
사내는 자신의 요구가 무리 하다는 것을 인정이라도 하는 것인지 비굴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사정하듯 유미의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희철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과 희철의 거리는 불과 사 오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허지만 비바람이 몰아치고 또 자신들의 문제에 골몰해서 인지 유미나 사내 모두 희철의 등장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어쩌면 희철이 나타날 것을 전혀 생각지 않음으로 해서 낯선 이들로부터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피하려고 더욱 시선을 비낀 탓인지도 몰랐다.
“심정 이라니, 무슨 심정? 세상 일은 심정 따위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구요, 앞으로는 절대 쟈넷 학교에 나타나지 말고, 아이에게 전화도 하지 말아요! 그리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길 바래요, 부탁이예요!”
유미는 자기 할 말을 빠르게 쏟아 놓고는 주차장 밖으로 몸을 돌렸다. 아침에 떠날 때처럼 택시 부를 여유도 없었을 유미는 무작정 사내로부터 벗어나고 보자는 듯 행길쪽을 향해 마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렇게는 못해, 나는 쟈넷의 아빠야, 나에게도 그만한 권리는 있다구!”
사내는 따라가기를 포기한 듯 유미의 등에대고 그렇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희철은 사내가 유미를 따라가지 않는 것이 어쩌면 잘된 일이라고 여겨졌다. 유미에게 산뜻한 꼴을 보여주지 못할바에야 차라리 험한 일을 겪더라도 희철 혼자 당하는 것이 났다는 생각이었다. 희철은 유미가 사라진 곳을 향해 비를 맞고 서 있는 사내의 등뒤로 다가섰다.
“저...좀, 봅시다.”
조금 떨려나온 희철의 목소리에 사내는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다. 사내는 당신이 누구냐는 얼굴로 희철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희철이 처음으로 맞부딪쳐 보는 사내의 눈은 몹시 날카로웠다. 사내의 넓은 이마에 비에 젖은 머리칼이 제멋대로 엉겨붙어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희철의 망막을 어지럽히던 말간 이마는 어디로 가고, 땀과 빗물에 후줄근히 저려진 중년 사내의 거친 살갖이 사나운 눈매를 덮고 있었다. 주춤했던 희철은 슬며시 자신감을 얻으며 한층 안정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돈 필요 하시지요? 여기 있습니다, 받으세요, 그리고 유미씨 말대로 우리 앞으로는 두번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얼떨결에 희철이 내미는 돈봉투를 받아 들었던 사내는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금시 알아차렸는지 풀석 실소를 날렸다. 사내는 느릿느릿 몸을 세우며 입을 꽉 다물더니 고개를 천천히 숙였다. 그 모습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스스로가 고민에 빠진 몸짓이 분명해 보였다. 희철은 사내가 돈과 자존심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갈등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희철은 아예 오금을 박자는 뜻으로 한마디를 더 보탰다.
“우리 긴얘기 하지맙시다, 다 이해 합니다, 어서 돌아 가십시오.”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겠다는 것이 아니라 희철이 단지 자신의 말에 익은 몸짓에 따라 오른손을 들어올린 것 뿐이었다. 그렇게 든 손이 공교롭게도 사내의 어깨 근처에 우연히 이르렀던 것이다. 사내가 숙였던 머리를 번쩍 들며 그의 손을 탁, 친 것은 그런점에서 희철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내의 눈은 증오와 경멸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러는 거야, 돈으로 내 아이를 사겠다는 건가? 어림없는 일이지, 썩 꺼져, 어서 썩 꺼져 버리라구!
사내는 돈봉투를 희철의 발등에 내던지며 소리쳤다. 희철의 발등을 맞히고 빗물이 흥건한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돈봉투는 옆구리를 터뜨리며 내용물을 쏟아 놓았다. 희철은 당황스러웠다. 사내가 그렇게 나오리라곤 생각지 않았던 일이었다. 자존심을 감추기 위해 짐짓 부리는 오기가 아니었다. 사내의 불붙은 눈이 그걸 증명 하고 있었다. 주먹을 그러쥐고 허리를 구부린 사내는 당장이라도 받아버릴 것처럼 머리칼이 엉겨붙은 이마를 희철을 향해 내밀고 있었다.
희철은 슬며시 허리를 굽혀 바닥에 나뒹구는 지폐들을 주섬주섬 집어들기 시작했다. 희철이 비에 젖은 그것들을 줏어 올리는 일은 꼭 사내의 분노를 피하기 위한 방편에서 만은 아니었다. 희철은 지금 사내가 자신에게 보이고 있는 분노의 정체를 짐작해 보려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희철은 바닥에 흩어져 빗물에 달라붙은 지폐들을 느린 몸짓으로 주워 들었다. 금방이라도 주먹을 뻗을 것 같던 사내는 희철의 하는 양을 내려다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동도 없었다. 오래지 않아 희철은 빗물이 줄줄 흐르는 지폐덩이를 모아쥐고 허리를 일으켰다.
“이봐, 정말 나좀 도와 주겠어?”
희철은 잘못 들었나 했다. 몹시 혼란스러웠다. 방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한 거지, 하고 희철은 자신에게 되물을 지경이었다. 할 수 있다면 사내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희철이 막 떠올린 직후여서 더욱 난감 했다. 희철은 웃지 못한체 급변한 사내의 표정을 분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돈이 필요해, 똥물에 빠진 내 몸을 건져내려면 돈이 필요 하다구, 그러나 돈 보다 더 필요한 게 있어, 뭔지 알아? 아이야, 내 아이 쟈넷이라구! 내 아이와 힘을 합치면 그 더러운 곳으로부터 나를 탈출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이봐, 도와줄 수 있겠나?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구!”
사내는 울고 있었다. 빗물이려니 했는데 아니였다. 사내의 접힌 눈꼬리에서 찔꺽찔꺽 눈물이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눈물과 빗물이 다른 것을 희철은 처음 알았다. 빗물은 편편한 살을 타고 흘렀지만 눈물은 꾸역꾸역 몰려나와 패이고 구부러진 길로만 흐르는 것이었다. 희철은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꺼져버리라는 수모 보다 사내의 눈물을 보는 것이 더욱 불편했다. 미처 줍지못한 지폐 한 장이 비바람에 밀리며 사내의 다리 사이로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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