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아파트

2008.12.06 14:57

이용우 조회 수:758 추천:61

맞닥뜨릴 각오는 하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부딧치기가 십상이려니 했다. 그런데 아파트 3층에 있는 세탁장에서 딱 마주쳤다. 민구가 빨래 바구니를 안고 세탁장 문을 들어서는데 팔장을 껴붙인 쎄시(세실리아)가 너 올줄 알았다는 얼굴로 베시시 웃고 있다. 세탁기 네 대와 드라이기 두 대가 고작인 미니 세탁장은 ‘외나무 다리’의 조건을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민, 왓이즈 컬레?”
남미계 여성의 활달함을 익히 알고 있지만 쎄시가 곧바로 ‘걸레’를 들고 나오자 민구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어떻게 이 위기를 뚫을까 하는 궁리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마흔이 꽉찬 늙다리 총각으로 싱글 아파트에 사는 것이나, 문 열고 나서다 마주치는 이웃과 자연스레 영어로 일상을 나누는 것이나, 이제 그는 어엿이 ‘아메리카나이즈’가 된 신사였다. 술만 마시지 안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 밤엔 결코 술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쎄시에게 실수는 했지만 가당찮은 죠지녀석의 짓거리를 생각하면 멕시코 독주라는 ‘데낄라’를 한 병인들 못마실까 하는 오기가 당장에도 뻗쳐 올라왔다.  

민구가 죠지를 본 것은 그 밤이 처음은 아니었다. 한 달여전 아파트 입구의 팜츄리 아래서 쎄시의 볼에 진한 키스를 먹이고 사라지던 녀석의 부리부리한 눈망울을 민구의 기억은 선명한 영상으로 잡아두고 있던 터였다.
그런 녀석이 쎄시의 생일에 초대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쎄시가 참석한 사람들을 소개 할 때 민구는 녀석의 이름이 죠지 라는 것을 알았다. 민구를 비롯한 몇몇 참석자들이 쎄시와 가벼운 춤을 춘 것에 비해 죠지는 서너 번도 넘게 거친 스텝으로 나약한 여자의 허리를 감아 돌린 것이 눈꼴 사나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술에 취하고 흥에 취한 죠지녀석이 자신에게 다가와 뱉어낸 한 마디에 민구는 그만 꼭지가 돌아버린 것이다.
“헤이, 꼬레아노. 하우아 유? 쌔끼야!”
기가 콱 막힌 민구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쳐다보니 죠지 녀석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녀석의 표정을 뚫어져라 살펴보니 악의가 깔려 있지는 않았다. 너 이 욕 알지, 하는 농기로 도배 된 얼굴일 뿐이었다. 민구는 그때까지 들고만 있던 위스키 잔을 단숨에 목구멍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물었다.
“이봐 죠지, 당신 직업이 뭐요?”
“내 직업?... 풀맨이요, 수영장 청소 합니다. 왜 그러시오?”
민구의 독기어린 질문에 멈칫 하던 죠지는 그러나 자신의 직업을 선선히 말했다.  
“청소회사 사장이... 한국 사람? 맞지요?”
간단없이 퍼부어지는 민구의 추궁에 죠지는 속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렇지, 민구는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은 것에 씁쓸해져 또 위스키 한 잔을 재꼈다. 남가주에 사는 이민족들이 한국말 한 두마디 하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 한국 사람들과 뒤섞여 사는 남미계 중에는 제법 긴 문장까지 능란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허지만 하필 죠지녀석의 입에서 내 나라 말을 듣게 될줄은 상상도 않은 일이었다. 고운 말이기나 하다면 또 모르지만 거친 쌍말을 미운녀석의 입으로 듣게 되다니 정말 재수 옴붙은 날이 아닐 수 없었다. 민구는 위스키를 물 마시듯 후루룩 목구멍에 털어 부었다.    
-망할놈의 작자들 뭐 배워줄 것이 없어 욕을 가르치나... 자기 언어로 욕을 가르치면 제나라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왜 모를까, 새대가리 같은 인간들.-            
민구의 서슬에 머쓱해진 죠지가 옆 사람에게로 자리를 옮겨갔다. 그러나 이미 기분을 잡친 민구는 거푸 술잔을 기우렸다. 이제 할 일은 오직 이것 뿐이라는 듯 찌푸린 얼굴로 술을 마셔댔다. 그런데 술을 마실수록 가슴의 분노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뱃속에 들어간 술의 양만큼 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이 죠지에게서 한국인 청소회사 사장에게로, 다시 죠지에게로, 그러다 종내에는 쎄시에게로 옮겨 갔다. 자신에게 호감 갖은 남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생일 파티를 하는 쎄시가 자꾸 미워졌다. 뮤직박스의 쿵쾅거리는 음악 속에 선심이라도 쓰듯 이 남자 저 남자와 번갈아가며 춤을 추는 쎄시의 모습이 얄밉기 짝없었다. 마치 자기 여자라도 되는양 거들먹거리는 죠지녀석의 행동이, 한국말 욕설이, 그녀 쎄시의 방조 아래 행해지는 것이라고 생각되자 점점 심사가 뒤틀려 갔다.
종내 벌떡 일어난 민구가 죠지녀석보다 더 거친 몸짓으로 쎄시의 팔 한짝을 나꿔챈 것은 파티의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자정 무렵이었다. 팔뚝에 나비문신을 한 아파트 메니져와 재잘거리던 쎄시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민구의 코 앞으로 끌려왔다. 민구는 남은 한 손의 약지를 쎄시의 코앞에 흔들며 소리쳤다.
“쎄시, 유, 걸레! 유어, 걸레!”
쎄시 아파트의 현관문을 미어져라 쾅, 닫고 나오는 민구의 가슴은 정말 미어지도록 쓰리고 아팠다. 야들야들 한 쎄시의 볼에 죠지 녀석만 키스를 한 것이 아니다. 죠지처럼 훤한 대낮 팜츄리 밑은 아니지만 민구도 이미 다섯 손가락을 쥐었다 펼만큼 쎄시의 볼을 훔쳐 먹었다. ‘세실리아 마르티네즈’ 그 긴 이름을 ‘쎄시’ 라는 애칭으로 부를 수 있는 것도 야들야들한 볼에 키스 하는 것 만큼이나 특별하게 묵인 되는 민구와 쎄시 사이의 통어(通語) 이다. 그 밤, 민구는 위층 쎄시방으로부터 들려오는 잡다한 파티의 소음을 아스라히 들으며,
- 쎄시, 너 걸레! -
- 너, 걸레야... 쎄시. 걸레... 걸레... -
그렇게 끝없이 ‘걸레’를 외치다가 잠이 들었다.

“민, 왓이즈 컬레?”
민구가 얼른 대답을 못하자 쎄시는 재우쳐 물었다. 머뭇거릴 일이 아니다. 걸레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심한 악취를 풍길 뿐이다. 민구는 얼른 어깨를 세웠다.
“아모르, 걸레 이즈 아모르!”
민구는 쎄시의 눈을 똑바로 건너다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쎄시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 하며 눈살을 모은다.
“아모르, 아모르도 모르니? 스페니쉬야, 너희 나라 말 인걸, 걸레는 아모르 라니까.”
민우의 설명에 쎄시는 못믿겠다는 얼굴로 오, 캄온, 하며 두 손바닥을 펴올렸다. 민우는 쎄시의 두 손을 덥석 움켜 쥐었다. 그리고 술취했던 그 밤처럼 거칠게 쎄시를 끌어 당겼다.
“믿어, 걸레는 아모르야, 러브라구! 러브란 말이야.”
민구는 야들야들한 쎄시의 볼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도장을 찍으며 그렇게 소리쳤다.

           약력 : 1999, 미주한국일보 / 미주소설가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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