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에 대하여

2005.07.08 01:11

나마스테 조회 수:190 추천:13

첫 삽질은 순조로웠다.
시작 느낌이 좋았다.
좋은 징조야, 베리굿-  이 끗발을 놓치지 말고 와장창 파버리자. 까짓 단숨에 뚫어 버리자.
손가락 사이에서 두두두 할리데이비슨 모터 엔진 소음이 들리 기 시작했고, 달리기 시작하니 휙-휙-하고 손가락 사이 지풍도 불었다.

가끔 밥 먹을 때도, 술 때도 놓쳐야 했다. 전화를 받지 않을 때도 있었고 방광이 꽉 차도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왜, 어째서?
끗발 좋을 때 왕창 파 놓아야 했으니까.
한참 끗발 날리는데 자리뜨는 노름꾼 봤나.
증세가 심각해지니 하루 종일 스물네시간 터널 생각만 하게 되었다.
땀흘리며 삽질한다고 위문 공연 온 사람을 만 난다거나 먹고사는 문제로 신경을 나누면 꼭 후유증이 있었다.

어디까지 팠더라? 파던 땅 속 위치가 어디더라? 거기에 무슨 장비와 장치를 놔두었더라?
이 따위 생각으로도 놓친 막장 생각에 한 참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다.
머리 한쪽에서 떠돌던 불길한 내 예감이 맞았다. 그토록 조신하게 삽질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터널 공사가 그 자리에서 멈추는 순간이 왔다.
이건 내 탓이 아니다. 정말 이건 내 탓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암벽이 나타나 내 삽을 튕겨 낸 탓이고, 물길을 잘못 건드려 물벼락을 맞은 탓이며, 빈 공간에 산소라도 없는 듯, 잘 나가 던 모터 싸이클 엔진 꺼지는 허망한 일 때문이었다.

공사를 멈추니 다시 시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파도, 파내도 끝없는 캄캄한 땅 속은 언제 끝날 건지, 얼마나 시간이 지나 야 터널이 산을 관통하여
맞은편 빛이 보일지 가늠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자주 나타나 내 삽질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암반이 얼마나 더 있으며, 얼마나 더 물벼락을 맞아야 하는지 두려웠다.

누구에게 물어 볼 수도 누가 가까이 다가와, 한 수 속삭여 주지도 않았던 속상함.
여태 파 놓은 터널 깜깜한 구석에서 느끼는 무력함과 외로움 혹은 좌절감.

니미럴! 휙- 삽을 집어 던졌다.
누가 나에게 이런 걸 시켰어?! 시킨다고 할 사람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는 화가 났고 너무 억을 했다.
"나쁜... 나쁜...."
애꿎은 남 욕을 한바탕 하고 나면 그나마 시원했다. 그러지 않고는 도저히 여태 떠 낸 삽질이 억울해 참을 수 없었으니까.

단테가 쓴 신곡 중 지옥편이라는 게 있다.
거기서 묘사 된 것처럼 땅 속은 나쁘며 음험한 곳이다. 나는 진즉 주제를 알아야 했다. 이 산 땅속이 이렇게 캄캄하고 고통스럽고 나쁜 곳인 줄 몰랐다.
터널 뚫기에 능력이 없다는 걸 안 이상 바보짓 그만 두자.

땅 밖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동안 밀린 술 엄청 퍼먹고 못 보았던 사람들 열심히 만났고 신나게 놀았지만, 이게 왠 일? 열심히 진도 나갈 때처럼 시도 때도 없이 포기한 땅굴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드는 것이었다. 마음 속에 꼭꼭 숨겨 놓은 것이 아니라 아예 포기한 것인데도 그랬다.

결론은 다시 삽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그 터널을 뚫어냈다. 처음해 보는 노동이기에 정말 징그러운 시간이었다.
오늘, 이천 오 년 칠월 이일 새벽 두 시 삽 십분 드디어 '끝'자를 두들겨 넣었다.
해냈다는 성취감에 포만감까지 행복했다.
스스로 자축의 의미에서 홀로 축배를 들었다.

그 약발이 딱! 일주일 갔다.
다시 내가 뚫어 놓은 터널로 들어가 살펴보니까 말 만 터널이지, 이건 북한군 남침 땅 굴보다도 더 조잡한 말 그대로 굴 일 뿐이었다.
도대체 어디부터 삐뚤빼뚤 튀어나온 날카로운 암각을 다듬고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게끔 바닥을 골라야 하며, 천장에 조명을 언제 달고, 퀴퀴한 냄새 몰아 내는 환기는 어제 시키고, 배수로를 만들어 줄줄 새는 물줄기를 제거하는가 이 말이다.

그래도 그간 투자한 내 노동이 아까워 해보려고 시도는 했지.
그런데 말이다. 첫 입구에서 전등을 하나 달고 끝 출구까지 왔더니 첫 번째 전구를 내가 달긴 달았나? 하는 의심이 드는 거였다.
밝은 전구 하나 다는 게 그러하다면 수많은 장치 작업도 매사 그런 식 일 것이었다.
터널 전문가에게는 귀여운 투정일 수도 있겠지만, 첫 경험으로 파 놓은 땅 굴은 하도 길어
한 번 왕복하는데도 나는 서서히 지쳐 갔다.

땅 굴을 파긴 팠다. 하지만 그곳을 다듬어 터널로 격상시킨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사람이 소통하는 터널로 완성시키기에는 정말 역부족이었다.
전문가들이 파 놓은 근사한 터널도 한번 지날 때는 그 규모와 설비와 장치에 감동 받지만 두 번, 세 번, 지나다 보면 그 감동의 진폭이 엷어지는 것 아닌가.

하물며 조명도 없는 땅 굴을 오간다는 그 지루함 혹은 짜증.
나는 터널 공사 마무리를 끝 낼 수가 없다.  
도대체 고치고 고쳐도 끝이 없는 이 조악한 땅 굴에 얼마나 많은 시간 지루한 왕복을 하며 수리를 하여야 할까.
내가 파 놓은 땅 굴 고치려 네 번 왕복하고는 나는 또 삽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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