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29 08:33

이윤홍 조회 수:424 추천:20

          삽


          콜로라도로 떠난다고 하니까 모두들 "그 징글징글한 눈"한다. 그러면서 L.A.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백이면 백 모두 다시 돌아 온다고, 그러니 떠나기전에 다시 한 번
        고려해 보란다. 그곳이 정말 그렇게 춥고 눈이 많이 오느냐고 물었더니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정색을 한다. 일년의 절반은 겨울인데다 눈이 한 번 내렸다
        하면 허리춤까지 빠지는 것은 보통인지라 보름치 비상식량 비축은  필수이며 차 안
        에도 조난시 필요한 것들을 갖고다녀야 한다고 열을 올린다.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
        보니 콜로라도에 한 번도 가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더 박사다. 그러면서 갈 때는 꼭
        이것은 챙겨가고 저것도 챙겨가고 조것은 갖어가봐야 짐만 되니까 나나 주고가라
        하며 이삿짐 꾸리는데 고주알매주알 참견이다.
          콜로라도에 먼저 와 있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껄껄 웃으면서 그 곳에서 살아 본 사람
       이나 안 살아본 사람들이나 모두 남의 이사 앞에서는 그런 것이야. 자네 군대 몰라.
       갔다 온 사람의 뻥도 뻥이지만 안 갖다온 사람 뻥이 더 쎄잖아.
       무엇이 꼭 필요한지를 물었더니 거침없이 무엇무엇은 꼭 갖어와야 한다고 한다.
          차 두 대에 이삿짐을 싣고 1160마일의 이틀에 걸친 대 장정 끝에 콜로라도에 도착
       했다. 떠나기전 미리 얻어논 아파트 3층에다 짐을 풀고 이것저것 필요한 일들을
       보느라 이틀이 훌쩍 지나가고 레지나는 남아있는 일을 마무리하러 다시 L.A.로 돌아
       갔다.  보름 혼자 있기가 뭐 그리 어려운가.
       레지나가 떠나자, 고개들어 쳐다보면 하! 깊고깊고 너무도 깊어 눈 빠지고 대신 들어
       차는 저 맑고 푸른 하늘에 한 점 먹구름이 떠오더니 아, 글쎄 밤이 깊어지면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미국에와서 20년 넘게 살았어도 대 도시 한 가운데서 맞이하는 눈은 처음인지라 커튼
       이란 커튼은 모두 활짝 열어놓고는 레지나에게 전화를 걸어 눈이 오고 있으니까 들뜨지
       말라고, 눈맞이하고 싶다고  L.A.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고는 나 혼자 싱글
       벙글 웃으며 밖으로 나섰다. 안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찬 바람이 몰아치며 아기 주먹
       만한 눈송이가 정면으로 얼굴을 후려치자 나는 몆 발자욱도 걷지 못하고 그만 쫒기듯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커피를 들고 다시 창가로 다가 갔을 때는 벌써 온 세상이
       하얗게 덮혀버리고 그 쌓인 눈위로도 밤새도록 그리고 그 다음날도 하루종일 밤새도록
       눈이내렸다.
          차가 보이지 않았다. 집집마다 사람들이 나와 눈을 치우느라고, 차를 꺼내느라고
       야단법석들이다. 나도 눈속에 파묻힌 차를 꺼내려고 중무장을 하고 문 앞에서니 손에
       든 것이 없다. 어쩐다?
       창 앞에 서서 남들이 눈 치우는 것을 한참 바라보다가 삽 빌릴 생각으로 내려갔더니
       그 많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가고 한 사람도 보이질 않는다. 아파트 오피스로 갔더니
       거기도 문이 굳게 잠겨있다. 이제나 저제나 누구라도 눈 치우러 다시 나오지 않을가
       싶어 추운 밖에서 아무리 서성거려도  단 한사람의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계단을 올라오며 바라보니 우리 집앞 쪽으로는 내 차 두 대만 눈속에 폭 파묻혀있다.
       빨리 눈을 치워야 하는데, 괜히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른다.
       삽만 있다면! 삽. 삽을 달라!
          왜 사람들은 "오우, 저 징글징글한 눈."하면서도 한 겨울에 콜로라도로 떠나는 내가  
       당장 필요로 하는것은 아무도 언급을 안했을까. 그들은 그저 눈과 추위에 대해서만
       쉴새없이 떠들었을 뿐, 정말로 산더미처럼 쌓인 눈을 신속하게 처리할 삽에 대해
       서는 한마디도, 아니, 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이, 수다가, 떠들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살다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이미 오래전에 겪었을 삽에 대해서는 까마득하게 잊어 버리고  오로지
       눈, 눈만이 기억속에 각인되어 있었을 것이다.
       먼저 와 있던 친구도 삽이 없어 집에만 갇혀있다고 전화가 왔다. 하긴 그도 이번
       여름에 왔으니 삽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틀동안 눈속에 파묻혀 있는 차를 바라만보다가 나는 플라스틱 김치박스 뚜껑을
       들고 내려와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한 나절을, 그리고도 눈을 다 못 치우고 겨우
       차 한 대만 눈 속에서 빼냈다. 허리는 꼬부라지고 손목은 경련이 일고 땀은 뻘뻘
       흐르고 눈은 따갑고,허리춤은 풀리고 똥오줌은 마렵고(장사익의 노래가사에서)
       안간힘을 다 쓰며 눈을 치우고 있는데 곰 같이 생긴 백인이 보더니 도와줄 생각은
       안하고 " Have Fun? " 하며 지나간다. 내가 눈 치우는 모습이 재미있게 보인 모양이다.
       어제야 겨우 나머지 차 한 대를 눈 속에서 찾았는데 내일 부터 또 연 이틀 눈이 온다고
       일기예보마다 야단이다.
       L.A.에 있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도 이리로 오고 싶는데 뭘 어떻게 준비하면
       되겠느냐고 묻는다. "뭘, 준비는, 다른건 모르고, 삽만 갖고오게나, 삽."
       삽? 삽은 왜?
       내가 눈과 추위를 생략하고 삽만 이야기하니까 이 친구가 잘 못알아듣는 모양이다.
       그래도 어쪄랴. 지금으로서는 삽뿐이 이야기해줄 것이 없는것을.
       전화를 내려놓고 허리춤 동여매고 서둘러 삽을 사러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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