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가을의 환(幻)

2006.11.03 00:26

이윤홍 조회 수:556 추천:19

         나비, 가을의 환(幻)


         나비를 보셨는지요. 성하(盛夏)의 계절, 만개(滿開)한 꽃들 사이에서 윤무(輪舞)를
        추고있는 나비가아니라 계절이 지나가는 구월과 시월의 경계에서 문득 눈에 띈 저
        횐 나비. 너무도 희어 아스라이 분홍빛이 감도는 날개를 팔랑이며 나타나 산길 내내
        앞서 날라가던 바로 그 나비를 보셨는지요.
          생각컨대,아마도 강원도 삼척의 어느 깊은 산속이라 생각되는군요. 그 때 나는
        산길을 걷고 있었지요. 하사관 인솔하에 소대원들을 모두 먼저 돌려 보내고 혼자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났을 땐 정수리에 걸려있던 하루 해가 조금은 기울어진
        오후의 어느 한 때였지요. 비록 귀대길이 였지만 모처럼 혼자서 산길을 걸어가노
        라니 그동안 바쁜 군 생활에서 마음속 깊숙히 가두어두었던 정감(情感)이 저절로
        흘러나와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갈라진 흙틈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기로 촉촉히
        젖어있는 바위와 그 위를 뒤덮고있는 푸른 이끼를 만져보기도하고 산속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산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하며 산길을 따라 걸어 올라 갔지요. 산길을
        따라 오를 수록 산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었는데, 그 때 나는 산을 휘감고 있는
        공기가 속이 다 비치도록 엷디엷은 푸른 빛을 띄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던 것 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옐로우스톤의 뜨거운 간헐천 바닥의 푸른 비색(翡色)이 맨 처음
        바로 강원도 산속의 저 공기빛이 아니였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직도 당신은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구월 말이였는지 아니면 시월의 어느
        초순이 였는지 분명치는 않았지만 분명 가을을 지나가는 때여서 조락(凋落)하는 낙엽
        하나를 들고와 그 위에 써보냈던 내 젊은 날의 고백을. 휴가를 받아 먼 길을 달려와
        늦 가을 날 주룩 주룩 쏱아지는 찬비처럼 당신의 문 앞에 밤새도록 서서 낙엽위에 써논
        두 글자가 지워질까 조바심치며 가슴에 품었다가 내어드린 그 낙엽을.
          산길을 다 올라 산등성이에 섰을 때 어디에서 왔는지 흰나비 한 마리가 팔랑 팔랑
        거리며 내 앞을 어른 거리더니 저만치 앞서서 날라가는 것이였습니다.  그 때 나는
        가을의 나비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또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산속의 만추(晩秋)에 만난 나비가 너무나 놀랍고 반가워 나는 나도 모르게 나비를
        따라 무작정 산등성이를 내달렸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한 짓이였
        지요. 그러나 그 무모함 때문에 또다시 당신을 만날 수 만 있다면 나는 열번이라도
        아니 천번만번이라도 그 무모함을 되풀이할 것입니다.
          나비가 그 마을로 들어가며 내 눈 앞에서 살아졌을 때 나는 적잖히 당황 했습니다.
        처음오는 낮선 마을을 기웃거리며 나비를 찾고있을 때 당신은 저 멀리 비포장 도로를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글쎄요, 지금 이렇게 말한다면, 석양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는
        당신의 등뒤에서 나플거리는 날개를 보았다고, 너무도 희어 아스라이 분홍빛이 감도는
        날개, 나를 당신에게로 데리고 온 바로 그 날개를 보았다고 한다면 당신이 믿어주실
        련지, 아마도 당신은 내가 처음 말을 건 그 때 처럼 미소를 머금으시곘지요.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흐른 지금 이 나이에 뭘 그러느냐고 당신은 말씀하시겠지만
        구월과 시월의 이 때쯤이면 아직도 나는 심한 몸살을 앓으며 가을속을 방황하곤
        합니다. 심하게 병이 도질 때면 나의 나비를 찾아 석양 무렵의 거리를 헤매기도
        하지요. 도시, 그것도 L.A. 한 복판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 정말 믿을 수 있겠어요? 어제, 그러니까 정확히 어제 아침, 내가
        그렇게 찾고 찾던 나비, 바로 그 나비를 보았다는 것을. 나비를 보는 순간 나는 너무도
        흥분해서 내가 내가 아니였던것을
           평소보다 더 일찍 집을 나선 나는 곧바로 마켓으로 향했습니다. 마켓문을 연 뒤
          나는 천천히 옆건물의 커피샾으로 걸어갔습니다. 가을을 지나가는 가로수들은
          꽃과 낙엽을 마구 떨구며 포도(鋪道)를 덮고 있었습니다. 커피를 사들고 나온
          나는 무슨 충동 때문이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에도 쉴새없이 붉은 꽃을
          날리고있는 마켓 바로 앞 가로수 아래로 들어가 섰습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꽃과 잎들사이로 뚫고 들어와 어른거렸습니다. 그 때 나는 어디선가 온 흰
          나비가 낮게 낮게 날면서 내 마켓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다가 손에 들고있던 커피잔이 떨어지는것도 모르고
          마켓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나비는 카운터앞을 돌아서 청과물이 쌓여있는
          곳에서 날개를 접었습니다. 나는 가까이 다가 갔습니다. 아,아, 그 곳에는
         이제는 색이 다 바랜 바싹 마른 붉은 꽃잎 하나가 자몽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꽃잎을 들고 밖으로 나와 허공으로 날렸습니다. 꽃잎이 바람을 타고  
         흰 나비가 되어 길을 따라 날라갔습니다.
           나는 눈을 들어 나비가 날라간 길을 멀리 멀리 한참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길이 점점 작아져 마침내 한 점으로 소실되는 지평선위로 문득 가을의 환(幻)인양
         눈부시게 환한 당신이 걸어오고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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