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

2007.12.27 10:32

이윤홍 조회 수:734 추천:64

        책의 향기


          무릎까지 쌓인 눈을 치우느라 고단한 몸이 잠을 잃어버린 새벽 두 시. 누운채로
        머리맡 작은불을 켜고 책을 읽는다. 고등학교때 처음 읽었고 대학교때도 한 번은
        읽었을 책. 며칠전 이사하면서 다시 찾은 그 책을 삼사십년이 지난 오늘 밤 꺼내
        읽는다.
          너무 오래된 책인지라 책장 한 장 한 장마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색이 바래있다.
        읽기전에 잠시 책을들어 어루만져본다.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책을 찾아내 읽는
        것도 흐믓한 일이지만 잠시 그 책에 배어있는 세월의 냄새를 맡는것도 즐거운
        일이다.
        때로는 밝은 서재속에서 때로는 이사하거나 멀리 집을 떠나와 있는동안 골방 지함
        (紙函)속에서 한번도 누구의 눈에 뜨이는 일 없이 스스로 삭아 가고있던 책의
        조금은 군내나는 쌉싸롬한 내음이 코끝을 감돌다 사라진다. 그것은 책의 냄새일까
        아니면 책의 향기일까. 책을 껴안고 잠시 생각하는동안 먼 옛날 청계천 중고서점들이
        보이고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안나는 어느 서점에서 집어든 이 작은 문고판이 떠오른
        다.
        그 날 오후 내내 나는 학교 도서관에 앉아 얼나마 열심히 이 책을 읽었던가.
        그것은 막 시의 세계에 눈뜨는 감수성이 강한 한 젊은이의 가슴속을 맑게 그리고 한
        없이 적셔주는 고귀한 정신의 시냇물이였고 감로수였고 폭포였고 천둥번개였다.
        그러나 시인이 전해주는 말의 의미도 잘 모르면서 정신없이 읽고 또 읽기만 했던 책,
        그 책을 오늘 다시 펼친다.

           " 누구라도 충고를 해 주거나 당신을 도와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단 한가지의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당신 자신속으로 침잠(沈潛)
             하십시요. 그리하여 당신께 쓰라고 명령하는 그 근거를 캐어 보십시요. 그리고
             그 쓰고 싶다는 욕구가 당신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뿌리를 뻗어 나오고 있는
             지를 알아 보시고, 만일에 쓰는일을 그만 둘 경우에는 차라리 죽기라도 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요.  이런 의문을 우선 조용한 밤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요. "
          
            " 비록 당신의 시들은 개성(個性)에 도달하려는 은밀하게 숨겨진 씨앗은 보이나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특히 제일 마지막의 (나의 영혼 속에서)라는
              시에서 그 점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읍니다. 거기에서는 무언가 독자적인 것이
              언어와 운율로 나타내려고는 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들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취할게 없으며 독자적인게 없습니다. --- 당신은 당신의
              시가 좋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제게 말입니다."

            " 나는 지금처럼 고독하게 있어야만하오. 우선 나의 고독은 다시금 확고하고
              안전한 것이 되어야만하오. 천인미답의 숲처럼,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두려워
              할 필요조차 없는 숲처럼 되야만 하오. "  

          한 때는 단숨에 읽어 버렸던 책속의 모든 편지를 오늘밤 나는 1903년 2월 17일 파리
        에서 써보낸 대 시인 R.M. 릴케의 첫번째 편지도 다 읽지못할 것같다. 한 귀절 한 귀절
        마다 나를 사로잡고는 요즈음 방만해진 나의 시정신을 흔들어 깨운다. 시의 본질은
        잊어버리고 난삽(難澁)한 시, 공허한 울림의 시에 빼앗긴 혼탁한 정신에 새로운 신선한
        수액을 수혈해 준다. 편지의 한 귀절 한 문장이 그대로 내게는 잠언(箴言)이요 사색록
         (思索錄)이다.

           " 당신의 편지는 정말로 아름다웠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심정 그대로였습니다.
             당신은 심정을 있는 그대로 썼습니다. 그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쓰는 것만을 일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가도
             그것을 배우지 못합니다."

        책의 향기란 바로 이런 것이다. 책이 빛바래고 삭아서 나는 것은 어느 책이나 지닐
        수있는 것으로 그것은 향기라기 보다는 냄새다. 냄새와 향기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오래된 좋은 책이 풍기는 쾨쾨하고 씁쓰름한 게피향 냄새는 전혀 싫지않은
        냄새요, 그 냄새마저 향기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책의 내용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더더구나 읽을 때마다 나의 쇠락해가는 시정신을 일깨워주고 고양(高揚)시켜주는
        책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시 릴케의 편지를 읽는다. 릴케가 "젊은 詩人에게 보내는 便紙"는 프란즈 크사버
        카프스. 베를린 출신의 여류문인 에미 히르베르크.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 클라라
        베스트호프. 그리고 그의 아내 클라라 릴케에게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이것은 역자(譯者)의 말처럼 마음 속에서 시를 쓰는 모든 고독한 젊은이들에게 들려
        주는 릴케의 영혼의 목소리인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영혼의 목소리인 것이다.
        오늘 밤 나는 오랫만에 찾아낸 한 위대한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밤 새도록 묵은 책의 책향(冊香)에 흠뻑 젖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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