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란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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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수필
2008.05.10 07:44

타인의 명절

조회 수 565 추천 수 7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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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명절



이월란 (06년 추수감사절)




어릴적 내 고향의 명절은 토끼그림이 새겨진 빨간 새 모직 원피스로 시작된다. 도톰한 토끼그림을 매만지며 토끼처럼 뛰어다니다 보면 대청마루에는 벌써 채반마다 가득 가득 엄마의 자존심들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돈적, 산적, 각종 생선전, 송편과 이름 모를 온갖 나물들까지....


일제히 셔트를 내린 소도시 거리의 낯선 적막감은 내게 묘한 경이감마저 느끼게 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행동으로 무언가를 보여주는 듯한....
모여든 식구들과의 거창한 식사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안방에 나란히 누우셔선 아이고 허리야... 자네 수고했네.. 가만 가만 속삭이시며 명절 대낮의 낮잠을 즐기시던, 내겐 연로하셨던 부모님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서 도란도란 묻어난다.


11월의 네 번째 목요일... 크리스마스 다음으로 큰 제 2의 국민명절인 추수감사절이다. 미국성인들은 선물을 주고 받아야만 하는 크리스마스의 쇼핑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가족들과의 여유롭고 단란한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땡스기빙을 무엇보다 선호하고 있단다. 큰도시에서는 각종 추수감사절 퍼레이드가 열리기도 한다.


송편 대신 스터핑으로 가득 채운 칠면조와 햄으로 땡스기빙 디너 상차림을 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정착한 유럽인들이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때 거위를 구워먹던 풍속을 좇아 거위 대신 미대륙에만 유일하게 서식하는 큰새인 칠면조를 구워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치킨과 거의 같은 맛이지만 기름기가 더 많은 듯 하며 보통 20파운드짜리는 5~6시간을 오븐에 구워야 한다.


버터로 구운 빵조각인 크러탕에 양파, 샐러리, 버섯, 육수와 쥬스로 맛을 낸 스터핑을 뱃속 가득 채워서 몇시간을 오븐에 구운 칠면조와 하니베이크트 햄을 메인 디쉬로 시작해서 그레이비(칠면조 소스), 호박파이, 크렌베리, 으깬감자, 각종 샐러드, 옘(흑설탕과 마쉬멜로를 얹어 오븐에 굽는 미국 고구마)까지... 한국음식에 비하면 단시간에 푸짐하게 차릴 수 있는 식단이기도 하다.


두 아이의 키가 나만한 지금, 역대 미국대통령들의  이름을 외우면서 자란 아이들은 명절이라고 새옷을 기다리지도 않으며 새옷을 입었다고 깡충깡충 뛰어다니지도 않는다.
400년전 청교도 필그림들의 감사제가 노스쿨로 이어졌다는 사실만이 신이 날 뿐이니까.


집집마다 타주에서 식구들이 몰려들었겠지만 골목들은 여전히 전쟁을 피해 피난이라도 떠난 마을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내일이면 연휴를 기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느라 지붕으로 올라가 있는 남자들이 간간이 보일 것이며, 이 연휴가 끝날 때쯤이면 온 동네를 불태워 버리겠다는 듯 정신없이 매어달린 꼬마전구들이 골목마다 불을 밝힐 것이다. 여자들은 본격적인 크리스마스 쇼핑을 시작하느라 빅 세일의 광고지를 돌린 몰로 몰려들 것이고...


한국에서 여름을 보내고 오신 후 김장김치를 해서 아들네 냉장고에 넣어 주시고, 크리스마스 장식을 지붕끝에 달아주시는 그런 일로 소일거리를 삼으시며 퇴직 후의 생활을 즐기시는, 한 블락 떨어진 곳에 사시는 시부모님을 모셔다가 땡스기빙 디너를 먹었다. 부지런한 남편은 풋볼게임을 보다가 식기세척기에서 접시들을 꺼내어 정리를 하는지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리고 있다.  


해피 할러데이!! 해피 땡스기빙!! 껴안아주던 직장 동료들의 가슴이 언제부터 따뜻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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