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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제2시집
2008.09.01 12:57

자해

조회 수 188 추천 수 1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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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해(自害)


                                                                                                                이 월란



높은 곳에 서면, 절벽 위에 서면 난 무의식 중에 내 몸을 떠밀어 본다. 사금파리처럼 섬뜩하게 부서져 내리는 시간의 낭떠러지를 층층이 내려 앉는다. 무심코 발길에 채인 돌멩이처럼, 돌출해 있는 바위와 나뭇가지에 몸이 부딪치고 긁히면서 생의 말석을 향해 하강하는 길은 그리 길지 않다. 꽃같은 문신 붉게 새기며 뛰어내린 세월 속에서 사람들이 우우 몰려 왔다 우우 사라진다.

  
자살은 나의 취향이 아니다. 순간의 취헐(就歇)은 난해한 시험문제를 포기해 버린 몽당연필처럼 추궁받을 가치조차 없겠다. 비명(非命)의 꿈을 그리는 것 조차 기울어져가는 나의 빈몸에겐 아직은 아름다운 재앙이겠다. 마흔을 넘기고나선 누구에게 버림 받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누구를 버린다는 것이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소슬한 길목들마다 슬쩍 돌아가보면 버린 눈물마저 파도를 짓고 있어 한번씩 목이 잠긴다. 이 잔인한 득도의 길은 내가 애초부터 무엇인가를 버릴 수 있을 만큼 철저히 소유할 수 없는, 그저 침몰하는 야거리 돛배였음을 스스로 익혀 가는 항로였겠다.


깊이가 1.6km 라는 그랜드캐년의 난간 없는 뷰포인트에서 유명시인과 함께 사진을 박겠다고 앉았다 섰다 그렇게 한 세상 찝쩍거려 보다가 나를 한번 더 떠밀어 보고서야 알겠다. 세상은 미움과 질투만을 가르쳤어도 배운 것은 사랑과 애착 뿐이었다. 주머니 속에서 매끌매끌 닳아가는 잔돌만한 죽음이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 난 하루에도 몇 십번씩 죽었다 깨어난다. 얼핏 설핏 고개내민 절애의 우듬지엔 혈색 좋은 야생화들이 아직 붉다. 등진 난간을 붙들었다. 다시 生이다.

                                                                                                               200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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