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

2004.02.27 22:18

미미박 조회 수:1341 추천:129

밥 심(心)

드라마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 종종 내려지는 백혈병이란
진단이 나의 것이 될 줄이야! 극 중에서의 하나같이 착하고
하얀 살결의 가냘픈 캐릭터인 주인공과는 사뭇 달리
씩씩한 내게 내려진 급성 백혈병이란 진단...
나는 멍멍할 뿐이었다.

“한 파운드 라도 줄면 안돼요” 의사의 말이다.
매일 두 번씩 디지털 체중계가 병실로 들어왔다.
체중에 따라 약물의 양이 결정되고 그 양에 차질이 생기면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방사선 치료는 양팔 벌리고 끈에 묶여서 받았는데 메스 꺼림의
정도가 기절 수준이라 아예 토사물을 받을 그릇이 옆에
걸려있을 정도였다.

병원 측에서는 폐에는 물이 많아 치료 받다가 터질 수
있기 때문에 폐 보호 흉패를 제작해야 했는데 그 과정이
무시무시했다.
온몸에 그림 그리듯 싸인펜으로 줄긋고 치수를 재서
맞춤흉패를 만들었다. 갈비뼈속의 피에는 방사선이 100%
통과해야 하지만 폐에는 50%만 통과하게 하는 주먹막한
흉패의 두께는 2인치?
하루건너 한번씩 20일을 방사선실에 가야 하는데
도살장이 따로 없었다.

나의 모습은 영락없는 외계인의 모습으로 점차 변해갔다.
식사대신 약물과 영양기름을 수혈 받으며 생명을
유지하던 시간들…
사람이 식욕이 있다는 것과 음식을 씹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며 행복인가!
빨리 퇴원하고 싶었지만 면역 문제 때문에 병원 복도를
나 다닐 수도 없었고 힘도 너무 없었다.

의사는 빨리 퇴원하는 길은 보통음식을 먹고 소화 기관을
튼튼히 하는 길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방문자는
물론이고 꽃도 병실에 들여 놓지 못하는 격리생활을 하게했다.
게다가 음식에 제약이 많아 아무것이나 먹을 수도 없고
하루에 한 끼, 한식을 의사가 지시하는 조건(소독하고
익히고 등등)에 맞춰 먹기는 꽤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는 많이 노력했지만 병원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Duarte 도시에 있는 City of Hope까지 남편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들렸었는데 하루는 엄마가 지어주신 흰밥과
장조림 국물(김치는 먹을 수가 없었다)을 싸가지고 왔다.

골수이식 후 처음 대하는 흰밥!
그 흰밥과 건더기 없는 장조림 국물!
어느새인가, 밥위로 눈물 한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나는 죽이 아닌 밥이었는데도 한 그릇을 다 먹었다.
그날 이후 나는 저녁 식사는 남편과 바꿔 먹었다.
남편은 병원 음식을 행여나 냄새 때문에 내가 괴로워 할까봐
병원 구석으로 들고가서 해결했고 나는 남편이 날라다준
하얀 밥과 깻잎이나 호박같은 것을 데쳐 무친 나물들과 먹었다.

원래 나는 한국음식만 밝히던 사람이 아니었다...
1977년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와 나와 동생만
동양인이고 모두가 백인이 전부인 코로나 델 마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점심시간이 얼마나 신났는지 모른다. 햄버거부터
시작해서 아이스크림까지 학교 음식이 너무너무 맛있었다.
그 후 대학 기숙사에 들어가서도 나한테는 애들이 그토록
지겨워하던 카페테리아 음식도 입에 달기만 했다.

결혼해서는 또 어떤가?
아이들 입맛에 맞춰 한국음식도 퓨전음식으로 만들어
먹었고 여러나라 음식에 이미 길들여진 입맛 아니던가?
특히 캘리포니아에선 어느나라 음식이든지 손쉽게
대할 수 있었으니...
그런데 왠일인가? 입덧 할 때도 이렇진 않았는데,
내 뱃속에선 토속적인 진짜 한국음식만 간절하게 찾았다.

그때 나는 비장한(?)결심을 했다.
집에 가서 건강을 되찾으면
매일 따끈따끈하고 윤기가
흐르는 흰밥과, 새콤달콤한 나물과, 감칠맛 나는
된장찌개를 식탁에 올리겠다고 말이다.
이제 나는 기적적으로 백혈병으로부터 치유를 받고
그 귀한 밥을 매일 먹을 수 있다.
병실에서의 눈물섞인 골수이식후의 그 첫 번째 밥을 기억하면
밥을 짓든지 설거지를 하든지 신이 날 뿐이다.

Mi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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