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라파

2003.06.17 23:48

미미박 조회 수:863 추천:76

여호와 라파
미미 박

커-억, 크-윽…… 어디서 들려오는 동물의 울음소리인가? 엎드려 얼굴을 묻고 있는 이는 분명 남편이었다. 살면서 한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의 모습의 어깨위에는 우리 둘만이 해독할 수 있는 언어로 쓰인 이야기책이 한권 얹어있었다. 웅크린 채 오열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적막강산에 혼자 남겨져 백년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 같았다. 또한 그 모습은 날 만드신 이가 언제든 날 데려가실 수도 있는 것이므로 이생의 삶에 대해 담담했던 나의 무심함을 뿌리째 흔들어 놨다. 이 사람은 만 21살에 의과대학원을 포기하고 대신 선택한 주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었던가! 결혼 후에 철들어가며 치열하게 살아온 내 삶은 내가 자각하던 그것보다 훨씬 소중한 것이었음을 폐부깊이 느꼈다. 채바다는 <그래도 그대는 행복하다>중에서 천생연분을 {사랑 하는 자/사랑 한다면/천 번 고백하고/천 번 기도하라}로 노래하고 있다. 그렇다, 사랑 하는 것과 아픈 것은 어떤 모양이든 다 소리를 낸다...

어디 남편뿐인가 날 외며느리로서가 아니라 딸로 사랑하시는 시어머님은 시아버님께서 암으로 투병하시다 돌아가실 때도 이렇게 하늘이 노랗진 않았다고 하시며 야베스의 기도를 외우셨으며, 눈물로 지켜보시던 친정 부모님의 애절함, 유진과 태진이는 아들들이라 그런지 놀란 가슴들을 채 내보이지도 못했다. 난 이 사랑 안에서, 급성백혈병으로 진단받은 것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알았다. 사고같이 들이닥친 병인지만 죽어도 침대에서 죽는다는 것이 감사했고, 전능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날 잠잠히 사랑하사 선하신 쪽으로 역사하시리라 믿으니(습3:17) 또 감사했다. 그리고 20년 전 주님 앞에서 한 우리의 결혼언약식이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었음을 기억하고 더 많이 감사했다. 나는 피조물로서 내 병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와 교만함을 회개했는데 아마 병이 발병한지 몇 주 만이었던 것 같다. 그후부턴 쉬지 않고 기도했다. 내가 기운이 없어도 주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빌어주시는 것을 느끼며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롬8:26). 게다가 식물인간이 되고 싶을 정도로 혹독한 치료과정을 보내며 너무 힘들땐,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니라>(시46:10)는 말씀 속에 날 뉘이고 날 긍휼히 여겨주십사 하는 외마디만 모기소리로 겨우 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글리백이란 약을 쓸 수 있는 만성 백혈병도 아니고 형제들 골수도 맞지 않으니까 촌각을 다투는 병 앞에서 담당 의사 팀은 나에게는 물론이고 가족들을 모아놓고 희망의 언어를 단 한마디도 사용하지 않았다. 입원하자마자 치료 과정에 필요한 수술을 하러 거니에 실렸었는데 수술실문이 천국 문으로 보이는 경험을 했다. 그 문까지의 10여 미터의 거리가 얼마나 길게 느껴지던지… 세상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는 너무나 모진 느낌이었다. 남편과 두 아들 녀석들과 사랑하는 여러 사람들을 뒤로하는 느낌이 형언할 수 없이 외롭게 아팠다. 죽기 전 마지막 오 분은 이렇게 고독한 것이로구나!
정말 잊혀질 것 같지 않은 천국가기 5분전 체험이었다.

첫 번 항암화학요법 후에 루키미아(이상 백혈)세포들이 없어져 의료진들에게서 축하를 받았다. 자가 골수이식을 할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셈이었다. 면역문제로 면회를 사절할 수밖에 없고 꽃도 병실에 둘 수 없는 고독한 병과 싸우는 6개월 동안 많은 화학요법과 10회 이상의 양팔 벌리고 줄에 매달려 전신방사선 요법을 받았다. 왜냐면 <자가 골수이식>은 나의 스템 세포를 냉동했다 수술을 해야 하므로 보통 암보다 강하고 위험부담이 큰 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미 주님께서 내 생명을 소생시키신다는 확신이 있었으므로(왕하20:5) 고통의 기간을 견딜 수 있도록 주님께 조용히 치유의 증거를 달라고 강청 드리기 시작했다. 히스기아왕한테 주신 여호와의 증거의 징조를 내게도 달라는 기도였다(사 38:8). 나는 그 징조로 속눈썹은 한 올도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그 후 골수이식수술후의 혹독한 후유증 가운데서도 내 속눈썹은 제자릴 지켜주고 있었다.

여호와 라파! 나의 백혈병을 고쳐주신 치료자 하나님!
이 치유의 역사는 자신의 몸보다 날 더 아껴주던 남편의 그 신성한 사랑과 가족들의 사랑, 금식기도 하던 성도들의 사랑, 수백 통의 격려카드와 편지의 사랑 없이는 불가능했음을 안다. 어디 그뿐인가! 토요일 새벽마다 어김없이 느껴지던 중보기도가 하늘 보좌를 움직인 것임을 확신한다. 그래서 여러분은 나에겐 사람이 아니라 사람모습을 가진 천사들이다. 퇴원해서도 낮은 면역 때문에 고립된 생활을 하다시피 했고 앞으로도 몇 년간은 조심조심 살아야하지만 올해 11월5일이면 골수이식을 받은 지 두 살 생일이 된다. 앞으로 어떻게 내 삶이 전개될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난 하나님께로부터 병을 치유 받고 생명을 연장 받았다는 것이며, 이 엄청난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고 싶은 열정으로 가슴이 벅차다는 것이다.
이 설렘을 사랑하는 여러분과 나누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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