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주기

2003.07.31 02:42

미미박 조회 수:621 추천:84

시작노트 I
자신에게 주기


2001년 급성 백혈병으로 투병 생활을 시작하고 2003년
1월부터 외부와의 접촉이 가능해지면서 나는 조금씩
시를 쓸 수가 있었다.
너무 아플 땐 글을 읽을 수도 없었고 내 이름 조차
싸인하기도 힘들었으니까.
한 줄의 글을 쓰는 시도자체가 내겐 예전의
‘미미’를 찾아가는 어려운 여정이었다.

퇴원 후 격리된 삶을 끌어안으며 나는
내 어린 속사람,
미미를 달래주었다.
그 일년은 그야말로 수행의 기간이었다.
그 땐 정말이지 극도로 단순한 삶을 살았다.
단순한 삶의 결과로 마음의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자연스런 일상이 되었다.

그때 나는 자연스럽지 못한 이 세상의 모든 작업들이
싫어지는 기이한 알레르기 현상도 함께 동반하는
삶을 꾸려나가고 있었는데,
그런데 웬일인가?
내 뱃속에서 꿈틀거리며 밀치고 올라오는
이상한 외침이 있었다.
영어 알파벳 같은 것들도 함께 말이다.
"Give Yourself, Give Yourself!"

미국음식물의 냄새가 역겹고 음식대신 약물과 하얀 영양
기름과 수혈받은 피로 생명을 유지하면서 그나마
가끔씩 어릴 적 먹던 음식만 그리워지던 기간이었는데…
게다가 누가 네 뱃속의 언어는 한국어란다 하고 확실히
꼬집어 일러주던 나날이었는데, 웬 알파벳?

수많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의 피를 수혈 받아서
뱃속과 피의 언어가 혼선을 빚고 있나?
급기야 나는 내가 부인할 수 없는 코리안-아메리칸의
피의 외침을 달래주기로 했다.
이것도 나를 사랑해주는데 한 부분이 될 수 있으므로.
그래서 모국어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쓴 시가 ‘자신에게 주기(Give Yourself)'이다.

Give Yourself

Beautiful as she is
Because she is mortal
Stirs her hibernated memory
Emancipates her hot tears

Beautiful as she is
Because she is finite
Anticipating a new era
Outshines her baby steps

머리가 빠지면서 놀란 것은 어쩜 그렇게 양심도 없는지
머리카락 한 가닥도 남겨놓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까까머리 중학생처럼 파르스름한 머리면 좀 나으련만
백도 복숭아 머리가 된다는 것이다. 모근까지 없어지니까
피부색보다 더 하얀 색의 머리가 영락없이 복숭아였다.
나는 내 머릴 쓰다듬으며 ‘안녕’ 했다.
그리고 내 몸을 사랑하고 싶어졌다.

Duarte 도시에 있는City of Hope에 입원 했을 때는 병실이
일층에 있었는데 가끔 조용히 병원을 떠나는 녹색 시트를
바라볼 수가 있었다. 시트색이 하얀 천이 아닌 것에 새삼 내가
외국병원에 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얼굴까지 녹색으로 덮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의 마지막 길이
마치 한가롭게 오수를 즐기는 노란 데이지와 묘한 조화를
만들며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지금 막 세상을 떠나는 이 사람도 최선을 다해 투병했겠지?
갑자기 나는 이 아름다운 삶을 온전히 미미한테 주고 싶어졌다.

Beautiful as she is
Because she is mortal

그렇다!
사람이란 언젠가 한 번 죽는 것만으로도 안타깝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은 병원에서 죽어나가고, 미미는 살려고
치료를 받고 있고...
녹색시트면 뭐 어떻단 말인가.
그때 난, 나의 하얀 복숭아 머리가 참 예쁘다고 생각됐다.

Anticipating a new era
Outshines her baby steps

나는 비록 병실 안이었지만 누워서라도 9/11 참사를
텔레비전을 통해 보고 있지 않은가!
녹색시트 한 장 못 덮고 순식간에 재로 사라지는 수많은
영혼을 보며 오열했다.
나는 새삼 환자라는 ‘정거장’을 지날 수 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고마웠다.

Beautiful as she is
Because she is finite

진정 내게 주고 싶은 것은 ‘자유함’이었다.
남의 손에 내 몸을 맡기지 않고 몸에 붙어있는 약물 튜브들을
던져 버리고 걸어 나가 뛰어 다닐 수 있는 그 자유함,
아직은 지구에서 살고 싶다고 외칠 수 있는 그 자유함,
나의 허물과 나쁜 기억들에서 벗어나는 그 자유함말이다.

Stirs her hibernated memory
Emancipates her hot tears

성서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지니...> 라는 말씀은
그 얼마나 고마운 진리인가.
또, 그 진리를 만나는 길에는 눈물의 강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어쩌면 ‘눈물’과 ‘해방’은 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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