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기억

2003.08.07 12:50

미미박 조회 수:662 추천:66

시작노트 II
비의 기억


투병생활동안 제일 먹고 싶었던 것은 바깥공기 였다.
면역문제로 병원 복도도 돌아 다닐 수 없어서 물리치료사가
하루에 한 번씩 들어와 다리와 팔을 움직이는 쎄라피를 했다.
하루는 물리치료사가 내가 다리를 세 번 움직였다고
칭찬해주던 말이 생각난다.
골수이식 병동 환자만이 꿈꿀 수 있는 소망인
화장실만이라도 기계들과 함께 가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던 시간들...
골수이식 후 상태가 좋지 않아 위험한 고비
고비를 곡예 하듯 넘겼다.
나는 드디어 성탄절 며칠 전에 퇴원했다.
그때 태어난 시가 ‘비의 기억(Rainy Memory)’이란 시다.

Is it really OK to have a flood on Christmas?

2001년 12월 22일, 나는 성탄절과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홍수에 떠내려가는 성탄절의 추억이라도 껴안을 수 있는
내구력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Rainy Memory

Is it OK to have a rainy Christmas?
Is it really OK to have a flood on Christmas?
Her drowned paper doll still smiles at her
How can she smile back?
Gingerly stomach rainy days little by little
Then
It is OK to have a rainy Christmas


나의 2001년도의 성탄절은 다분히 역설적이지만
그 어느 해보다도 행복한 절기였다

Gingerly stomach rainy days little by little

비에 젖은 기억들을 조금씩 꺼내어 바라볼 수 있는
조그마한 여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나의 속사람,
Inner Self를 똑바로 보기 시작했다.

Her drowned paper doll still smiles at her

어릴 적, 아버지께서는 일본에서 공부하시고 계셨는데
자주 선물을 보내 주셨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야마하 피아노도 선편으로
받았지만 내가 제일 아끼던 선물은 그림책과 인형들이었다.
일일이 한글로 문장문장마다 토를 단 두꺼운 일본 그림책들은
아버지의 부재를 매꾸어 주는 귀한 매개체였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순정만화 속의 주인공 같이 생긴
종이인형과 점선으로 그려진 여러 장의 종이 옷 책을 보내
주셨다. 문득 소꿉장난 하듯 옷을 갈아 입히며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의 종이인형에 어린 미미를 대입하며
아스라한 유년의 여행을 하며 예기치 않던 위로를 받았다.

Then
It is OK to have a rainy Christmas

비록 동화책 속의 아프지도 않고 늙지도 않던 공주와의
삶과는 사뭇 다른 것이 세상살이지만 그래도 삶을 많이
많이 사랑하기로 했다.
더구나 내 자신을 사랑해주기 시작하니까
얼룩진 종이인형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나는 주저 없이 다섯 살쯤 된 미미로
돌아가 그녀의 젖은 옷을 갈아 입혔다.
그리고 그녀를 안아주었다.
정말이지 비가 내려 질척이는 인생도 살만한 것이니까 말이다.

이제 미미는,
하이쿠(Haiku), 아니 미미스타일로 변형된 세상에서
제일 짧은 시들을 쓰고 싶다.
무조건 짧다고 다 좋은 시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단 몇 줄에 우주와 같은 얘기를 어떻게 담을 수 있나 가
관건이겠지만.
5,7,5 운율에서 자유로우면서도 극도로 절제된 그런 시들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희망사항).

뱃속의 꿈틀거리는 알파벳들을 가끔씩은 달래주겠지만
모국어를 더욱더 사랑해서 그려진
진실한 시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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