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 ( " )

2010.03.16 04:15

최문항 조회 수:957 추천:129




                                외할아버지



                                                                                                                                           최 문 항
  도시에서 자란 내게는 고향이 없다. 그래도 기억 속에서 고향 같은 시골 풍경을 그리라면 한남동 외인주택가에 있던 외할아버지 농장을 떠올리곤 한다. 지금은 한강을 굽어보며 고급 저택들이 들어섰지만 1950년대만 해도 외진 시골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이 학년 쯤 되었고 동생은 아직 학교에도 못 갈 나이였던 것 같다. 여름 방학이 되었고 딱히 갈 곳이 없었던 우리는 외할아버지 농장에 가 보고 싶었다. 후암동에서 한남동은 어린 나이의 우리에게는 걸어서 가기엔 너무나 먼 거리였다. 동생과 나는 무작정 외할아버지 농장을 찾아 나섰다. 남영동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삼각지를 지나 서빙고 쯤 오고 보니 제대로 길을 들어선 것 같아서 우리는 신이 났다. 한참을 걷다 보니 동생 놈은 더위에 지쳤는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저만치 큰 나무 그늘에 수박 참외 등을 놓고 파는 노점상이 있고 그 옆에 큰 플라스틱 통 안에 얼음 덩어리를 놓고 그 위에 설탕 탄 보리차를 부어 한잔에 십 원씩 팔고 있는 냉차장수가 앉아있었다.
  동생과 나는 냉차 수레 옆에 멈춰 섰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동전 한 닢을 내고 시원한 냉차를 한 컵씩 마시고 잠시 쉬었다가는 제 갈 길을 갔다. 주머니에 동전 한 닢 없던 동생과 나는 하염없이 수레 옆에 서서 침만 꼴깍꼴깍 넘기고 있었다. 한참 후 냉차 파는 아저씨가 우리를 가엾게 보았던지 그 달고 시원한 냉차를 반 잔 정도 주면서 '빨리 마시고 가라'고 하셨다. 우리 둘은 그 냉차를 아주 조금씩 아껴가며 마셨다. 그때 그 맛은 지금의 어느 소프트드링크 맛으로도 대신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활기를 찾은 우리는 발길을 재촉하여 한남동 외인주택가로 찾아들었다. 약간 언덕이 지고 왼쪽으로 휘어진 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깨끗이 손질된 길 양쪽으로 오이, 토마토, 옥수수,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언덕 밑으로 푸른 한강물이 흐르고 마침 기차가 긴 꼬리를 끌고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곳은 일본인들이 살던 전원주택이었는데 해방 후에 독립유공자인 외할아버지에게 국가에서 보상으로 주었다고 했다. 외진 곳이기는 하나 넓은 마당이 있는 일본식 건물이 산뜻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는 마당으로 뛰어들면서 “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소리쳤다. 그런데 집안에서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뒤뜰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헛간까지 돌아다녔지만 할아버지는 안 계셨다. 뜨거운 햇볕 아래 몇 시간을 걸어서 겨우 찾아왔는데 할아버지가 안 계시다니…….
  아무도 없는 조용한 마당에 우리 둘만이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 울타리를 따라 무궁화 나뭇잎이 무성하고 빨간 꽃들이 피어있었다. 그 밑에는 분꽃 채송화 백일홍 같은 꽃들이 각가지 색깔을 뽐내고 있었고 물이 잘 흐르도록 만든 수챗구멍 근처에는 내 동생 키보다 더 큰 따리아가 목이 무거운지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마당 한가운데 있는 펌프 물을 힘들게 퍼 올리기 시작했다. 있는 힘을 다해서 손잡이를 위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하고 동생은 바가지에 물을 퍼서 펌프 위에 부었다. 뻘겋게 녹슨 펌프는 한참을 헛구역질만 해대더니 주둥이로 물을 조금 토해냈다. 나는 신이 나서 더 빨리 펌프질을 해댔다. 드디어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목이 마르고 배도 고픈 김에 찬물을 실컷 마셨다. 우리는 웃옷을 벗어 던지고 물장난을 시작했다. 아예 머리를 펌프 밑에 디밀고 번갈아가면서 물을 퍼부었다. 어머니께서 검은색 헝겊을 대강 자르고 꿰맨 다음 투박한 고무줄을 넣어 만든 반바지는 수영복이 흔치 않았던 그 시절에는 훌륭한 운동복이자 외출복이며 잠옷이었다.
  반나절이 다 지나서야 밀짚모자를 쓰고 한쪽 어깨에 빈 지게를 걸치신 할아버지 모습이 저만치에 나타났다.
“할아버지!!”
  우리는 소리를 지르면서 달려갔다. 의외의 손님을 맞은 외할아버지는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아이고 이 녀석들 언제 왔니? 버스도 안 들어오는 여길 어떻게 찾아왔노? 엄마한테는 여기 온다고 말하고 왔지?”
  우리는 그저 머리만 좌우로 흔들었다. 외할아버지는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바구니에 하나 가득 따 오셨다. 시원한 펌프 물에 와르르 쏟아놓고 잘 씻은 다음 먹음직하게 썰었다. 그리고 그 위에 하얀 설탕을 잔뜩 뿌려서 평상 위에 올려놓으셨다. 온종일 냉차 반 잔과 펌프 물만 마셨던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
  만주에서 외할머니를 병으로 먼저 보내신 외할아버지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혼자 외롭게 살고 계셨다. 어쩌다가 한번씩 우리집을 찾아오시면 저녁상을 물린 후에 독립운동 하시던 일을 마치 동화처럼 밤이 깊을 때까지 재미있게 들려주곤 하셨다.
  비바람 치는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 수색대에 쫓기어 삼일 밤낮을 행군하던 이야기, ‘요동 반도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로 시작되는 군가도 불러 주시고, 마적 떼들이 쳐들어온 이야기, 팔로 군들이 말을 옆으로 타고 달리면서 재주 부리던 일, 들판에서 야영할 때 조그마한 쌀 주머니를 갖고 다니다가 물에 잘 적신 다음 모닥불 옆 흙 속에 묻어두면 밥이 된다는 이야기, 듣고 또 들어도 흥미진진한 독립군 시절 이야기들이었다.
  할아버지는 능숙한 솜씨로 저녁을 준비하셨다.
  “할아버지 이거 신발주머니에 넣고 만든 거야?”
  쌀밥을 보자 동생이 옛날이야기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아니, 밥솥에다 했지, 여기는 일본 놈들이 없잖아. 그 대신 더 맛있는 게 있지.”
  할아버지는 마당 한구석으로 가더니 땅속에 깊숙이 묻어놓은 작은 독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오셨다. 돼지고기를 큼직큼직하게 썰어서 비계와 함께 간장에 절여놓은 비상식량이었다. 여러 가지 채소들을 곁들여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마당 한구석에 말린 쑥을 태우면서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한 할아버지의 만주 이야기를 또 들었다. 캄캄한 밤하늘에는 뿌연 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동생의 코 고는 소리가 새록새록 들려 왔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고 힘들었던 가 보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얇고 반투명한 종이 사이에 먹지를 깔고 골 필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시고 난 후 잘 접어서 누런 봉투에 넣고는 검은 두루마기 차림으로 경무대 비서실을 다녀오시는 것이 외출의 전부였다.
  자존심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시고 새로운 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일, 권력의 암투와 음모, 사선을 수도 없이 함께 넘나들었던 옛 동지를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도 없이 배반하고, 인간의 욕심과 고집으로 암살까지도 서슴지 않는 몰인정, 남의 공적을 가로채어 저명인사로 둔갑한 모리배들 사이에서 외할아버지는 너무 힘들어하셨다.
  함께 살자고 성화 부리는 어머니의 간청에 외할아버지 늘 조용한 미소로 답하시곤 하셨다.
  “그래도 땅은 정직하지!” 하시면서 한적한 이곳에서 농사일로 여생을 마치셨다.
밤새 그 옛날 외할아버지의 농장에 내렸던 봄비가 우리 집 뒤뜰에도 촉촉이 내렸다. 하늘의 은총은 30배 60배 100배라고 하셨는데 올가을에는 심어놓은 많은 것과 함께 나의 삶 속에도 풍성한 수확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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