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 십자가 (문법 검사기 통과)

2010.03.10 05:09

최문항 조회 수:787 추천:105

단편소설

                                 황동 십자가


                                                                                                                                                                                                                     최 문 항
  뉴욕에서 이곳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온 지도 벌써 팔 개월이 지나갔다. 마땅한 직장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안토니오 영감이 찾아와서 자기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 일자리가 났으니 한번 서류를 넣어 보자고 권했다. 오십 중반을 훨씬 넘긴 남미 출신 안토니오를 집 근처 주유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 언뜻 보기에 옆모습이 꼭 한국 사람처럼 보였다.
  "혹시 한국분이신가요?”
  내가 말을 걸었더니 그는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Excuse me, May I help you?"
  이 짧은 대화가 안토니오를 나의 든든한 후견인으로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는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길 건너편에 살고 있었다. 내가 스왓밑 장사를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 그는 먼 곳에 가서 천막을 사다 주고 자기가 쓰던 벤까지 내 주면서 나를 도와주었다. 겨우 3주 나가보고 리스가 만료된 자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가 같은 한국 사람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것을 알고는 마치 자신이 당한 것처럼 안타까워  했었다.
  그 후 밤청소도 해보고 페인트일 하는 사람들을 쫓아다녀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일거리를 못 찾고 있는 나를 위로해 주려고 가끔 자기 집 뒷마당에서 바비큐 그릴에 불을 지펴 핫덕을 굽고 시원한 버드와이저를 준비해 놓고 부르곤 했다.
  “뉴욕은 날씨가 어떤가? 지금쯤은 비가 많이 내리고 있겠지? 나는 동부 쪽은 한 번도 못 가 봤으니 말이야.”
  넓은 뒷마당 한구석 큰 테이블 위에 맥주와 옥수수로 만든 또디아, 살사, 칩 등으로 한 상을 잘 차려놓았다.  
  “네, 여름에는 하리케인이 거세게 불고 겨울에는 눈도 많이 오고 추위가 대단하지요.”
  “설마 날씨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은 아니겠지?”
  “날씨야 뭐 참아 넘기면 되지요, 작년 이맘때 기억나세요? 왜 뉴욕 전체가 정전이 되고 폭동이 일어나고 난리였잖아요!”
  “그런 일이 있었지, 기억나고말고!”
  손바닥 넓이의 또디아에 금방 구워낸 핫덕과 살사를 올려놓고 돌돌 말아서 내 앞으로 내밀어주었다.
  “그때 갖고 있던 조그만 가게가 불타 버렸어요, 그냥 물건만 털어 갔어도 어떻게 좀 버텨 보았을 텐데 불이 나고 나니까 모든 게 끝이더라고요.”
  “고생 많았겠군 그래!”
  “6개월을 버티다가 포기하고 친구가 살고 있는 L, A로 이사와 버렸죠.”
  안토니오는 90살이 넘은 어머니와 대학에 다니는 아들까지 삼대가 함께 살고 있었다. 키가 작은 어머니는 지금도 집안일을 거의 다 거들만큼 건강하셨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내 접시에 음식을 올려놓고 손짓으로 많이 먹으라고 재촉했다.
  안토니오가 내 잔에 맥주를 잔뜩 부어주면서 미국 오기 전에는 뭘 했었느냐고 물었다.
  “월남에 있었어요. 맹호 부대 사령부에 소속된 태권도 교관이었습니다. 그때 미군 사령부에 근무하던 Ken Smith 중령이 저를 미국까지 올 수 있도록 도와 줬어요, 제가 그에게 태권도를 가르쳤거든요.”
   “응 그래서 미국까지 오게 됐다……. 그거 참 잘 된 일이군 그래.”
   “미스터 스미스 가족이 뉴욕에 살아서 저도 뉴욕으로 갔었는데 석 달도 안 돼 켄 중령은 독일로 나가 버렸어요.”
  “어이구 자리도 못 잡은 자네를 그 험한 뉴욕에 남겨두고 독일로 가 버렸어? “
  “네, 처음에는 아주 막막했었는데 잘 찾아보니 여기저기에서 야채 가게, 생선 가게, 조그마한 마켓 등을 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자네도 마켓을 시작했나?”
  “처음에야 어림도 없었지요. 도무지 영어가 통해야 뭘 해먹지요. 선배가 하는 가게를 도와주다가 나중에 맡아서 했는데 그것도 얼마 못해 보고 폭동에 다 날려 버렸어요.”
  나는 잔에 남은 맥주를 한숨에 다 비워 버렸다.  
  “참 힘들었겠군, 어쨌든 캘리포니아로 잘 왔네, 날씨가 따뜻하니 좀 여유가 있을 거야”
  “여기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같네요. 벌써 반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요 모양 아니에요”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말이 아니었지, 열두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어느 집 좁은 차고에서 살았으니 자네는 상상도 못할 걸세”
  “하기야 수십 년 전에는 더 했겠네요!”
  안토니오가 잠시 지나온 수십 년 전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금세 표정을 바꾸면서 말했다.  
  “그래도 나는 미국 생활에 만족일세, 불만 없어! 아니 내가 이거 젊은 사람한테 쓸데없는 소리만 했군 그래.”
  안토니오 영감 추천으로 무난히 취직은 됐으나 기계 공장은 난생처음인 내게는 모든 것이 서툴고 힘들었다. 특히 쇠를 깎을 때 뿜어내는 열과 소음 그리고 기름 타는 냄새는 정말 참아 내기 어려웠다. 주변을 둘러보니 건장한 청년들이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고 그들에게는 매연과 소음 같은 것은 별로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난 후 안토니오가 내 아파트로 찾아왔다. 마침 선반공 조수 자리가 났으니 이 기회에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시간당 3불 50전을 받을 수 있으니 지금의 허드렛일보다는 힘도 덜 들고 전망도 훨씬 좋다는 것이었다. 그는 30분도 안 되는 사이에 기계도면 읽는 법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평면도, 측면도, 그리고 입면도까지 단숨에 설명해 주고 mm를 inch로 환산하는 법까지 알려주었다.
  -그래! 이제는 한 가지 기술을 익혀서 기능인이 되어보는 거야.-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마음에 다짐을 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안토니오가 일하고 있는 정밀 선반기계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P. S. I.는 보병이 휴대할 수 있는 견착식 미사일과 인공위성에 장착하는 군사용 카메라를 만드는 공장으로 800 여명의 종업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휴즈 항공사로부터 받은 6백20만 불어치의 주문을 4개월 내로 끝내기 위해 3교대로 전체 회사를 가동하고 있었으며 우리 부서의 55명 전원이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면 재료 담당 마이크가 한 사람 당 재료 100개씩을 나눠주고 일이 다 끝나는 시간이 되면 완성된 물건의 숫자를 장부에 기록했다. 생산 성적이 좋은 사람은 월말에 상여금을 받게 되어 있었다. 나는 좀 지루하기는 해도 반복되는 일이어서 다른 기술자들에게 뒤질 것 없이 잘해냈다. 며칠 동안 계속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제법 요령이 생겨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매일 발표되는 목표 달성자 명단에 내 이름도 올라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일어났다. 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에 만들어 놓은 물건 열 개가량이 없어지고 그 대신에 깍지 않은 재료가 같은 숫자만큼 옆에 놓여 있었다.
    나는 즉시 안토니오에게 가서 누군가 내가 만든 것을 훔쳐 갔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를 의논 했다.
  “Forget it Moon!"
  안토니오는 그냥 넘어가라고 하면서 자기가 만든 물건 대여섯 개를 내게 집어 주었다. 옆자리에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죠지 영감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말문을 열었다.
  “루이와 라울은 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놈들이니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니지만 쟌은 정말 조심해야 해! 그놈은 돈만 생기면 마리화나나 사 피우고 간간이 코케인도 흡입하거든 또 오토바이를 난폭하게 몰고 다니고 성격이 너무 거칠어서 사람들이 슬슬 피하고 있다고, 바로 그놈들이 너한테 시비를 건 거야, 그저 모른 체하고 상대하지 않는 게 상책이지!”
  그는 무엇이 두려운지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라울, 쟌, 루이 셋은 일은 안 하고 담배를 피우면서 잡담이나 하고 늘 자리를 비우곤 했으니 착실하게 일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정해진 양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인스팩터 스캇이 나를 불렀다.
  “네가 만든 물건 중에 불량품이 32개나 생겼으니 빨리 수리해 가지고 오전 중에 내방으로 가져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가 던지듯이 내려놓고 간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만든 물건이 아닌 것 같았지만 어떻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점심시간도 15분 만사용하고 부지런히 불량품들을 수리했다.
  수리를 끝낸 물건을 스캇에게 가져다주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오늘 내가 만든 물건이 몽땅 없어지고 깍지 않은 재료가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흠! 이놈들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나를 골탕 먹이려 하고 있군! ―
  이번에는 안토니오에게 가는 대신에 이 층 매니저 방으로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이야?”
  책상 위에 잔뜩 널려 있는 서류를 정리하고 있던 매니저 제리가 언짢은 눈길로 나를 올려다봤다.
  “제가 만든 물건을 누군가 훔쳐 갔습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은 아예 몽땅 가져갔습니다. 또 불량품을 내 박스에 갖다 놓고 좋은 것으로 바꿔치기 해서 32개나 수리를 했습니다. “
  “누가 그랬는지 알고 있나? 한동안 조용하더니 또 그런 짓을 한단 말이지, 알았으니 내려가서 일이나 열심히 하고 있게!”
   얼마가 지난 후 매니저와 우리 부서실장 그리고 조장까지 내 기계를 둘러보면서 한참 동안 여러 가지 의논을 하고 사라졌다. 잠시 후에 라울과 쟌이 다가오더니 내 기계의 전원 스위치를 덜컥 꺼 버리는 것이었다.
  “야! 이제 겨우 기계 돌리는 거 배운 놈이 만들면 몇 개나 더 만든다고 설쳐 대냐? 물건이나 정확하게 만들어 봐 인마, 괜히 서둘러서 불량품이나 만들지 말고.”
  그들은 내 기계주변을 맴돌면서 빈정댔다.
  -아하! 안토니오와 죠지 영감이 조심하라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이제는 이들과 한판 붙던가 아니면 직장을 그만두든지 해야겠군.―
  나는 즉시 뉴욕에 처음 왔을 때 흑인들에게 배운 영어인지 욕인지 분간할 수 없는 말을 사이사이에 ‘F’자까지 섞어 가면서 내뱉기 시작했다. 그동안 참고 억눌러왔던 울분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너 인마 나를 잘못 건드렸어, 너 같은 놈들은 인간 쓰레기야 이 새끼들아! 일은 안 하고 남 물건이나 훔쳐 가고,..... 오늘은 내가 너희들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겠어. 두 놈 다 덤벼.”
  라울이 앞으로 나서면서 뭐라고 지껄이는데  뒤쪽에 서 있던 쟌이 잔뜩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면서 내게로 다가섰다. 녀석은 큰 키를 꾸부려 내 얼굴에 코가 닿을 정도로 바짝 들이대고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요 쪼그만 쨉이 겁도 없이 덤벼들었어, 키스 마이 애스, 개새끼야, 너 내일부터 나오지 마, 내 눈에 다시 보이면 오토바이로 콱~ 깔아뭉개 버리겠어! “
  고성이 오가는 사이에 누가 정문에 연락을 했는지 씨큐리티 가드 두 명이 뛰어왔다. 그들은 마치 경찰이나 된 듯이 나와 쟌 그리고 라울까지 옆에 있는 빈방으로 끌고 들어가서 사건 내용을 조목조목 기록하고는 세 사람 모두에게 싸인 을 하라고했다. 그들은 씨큐리티 가드의 위세에 눌려서 그런지 아니면 전에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지 아무 말 없이 지시하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그 후에도 쟌은 기회만 있으면 나를 괴롭혔다. 내가 알아듣지 못할 빠른 속도로 말해 놓고는 내가 다시 묻거나 엉뚱한 대답을 하면 입을 삐죽 내밀고 콧소리를 섞어 가며 내가 한말을 고대로 흉내 내서 주변 사람들을 웃겨 댔다. 가끔 씩은 통로에 내려서서 내 이름을 크게 불러 놓고는 내가 머리를 내밀고 뒤돌아보면 가운뎃손가락을 쳐들고 앞으로 쑥 내밀어 보이기도 했다. 어린애들 장난도 아니고 매일같이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서 더 이상은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헤이 쟌! 할 말이 있으니 일 끝나고 나 좀 보자, H 파킹 장에서 기다릴게!”
  “뭐라고? 나를 좀 보시 자구…. 하하하 웃기고 있네.”
  파킹장 H는 공장 뒤쪽 으슥한 곳에 있었으며 쟌이 자기 오토바이를 늘 주차해 놓는 곳이었다. 두 시 반을 알리는 벨 소리가 길게 울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파킹장에 있던 차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2부에 일하는 사람들 차만 띄엄띄엄 흩어져 있었다. 저쪽 끝에는 쟌이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쟌 일행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이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궁리하면서 월남으로 출발하기 전 강원도 산골 관대리 산악 훈련장에서 만났던 강영식 대위를 생각했다. 그는 생존법 훈련 중에 무성 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단검이나 교살구(가는 줄을 사용하여 사람 뒤에서 목을 공격하는 도구) 사용법 외에 손바닥이나 엄지로 단 일격에 상대방을 제압하는 방법과 몸과 발을 써서 상대를 완전히 때려눕히는 훈련이었다.
  오늘은 생과 사를 가름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놈들은 세 명씩이나 되고 분명히 무기를 가졌을 테니 단숨에 제압하지 못한다면 엄청난 위험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차를 돌려세우고 트렁크를 열어 놓았다. 그 안에는 실탄을 모두 뺀 빈 권총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잠시 후 공장 뒷문이 열리고 쟌과 루이 그리고 라울이 나타났다. 그들은 거들먹거리면서 아주 느린 걸음으로 다가 와서 나를 에워싸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둘러섰다.
  “할 말이 있으시다고? 그래 무슨 말인데.”
  라울이 양팔을 앞뒤로 흔들면서 앞으로 나섰다.
  “너는 가만있어 인마, 쟌한테 할 말이 있다고!”
  그때 쟌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큰 일 났다는 듯이 겁먹은 표정을 지으면서 엄지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남자 새끼가 무슨 말씀이 이리도 많으신가? 자 앞으로 나오시죠!”
  쟌이 빈정거리면서 내 앞으로 다가섰다.
  “네가 월남전 베터란이란 것도 알고 마샬아트 블랙 벨트라며, 어디 한번 덤벼 보시지 이 쪼고만 일본 놈아.”
  그들은 이상하게도 동양사람은 모두 쨉이라고 부르면서 멸시했다.
  나도 쟌의 기세에 눌릴세라 그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잠깐!...... 이렇게 무조건 싸울 것이 아니고 우리 사나이답게 거래를 하면 어떻겠나? 쟌! 자네가 깨지면 오늘 이후 나를 깨끗이 인정해주고 더 이상은 괴롭히지 마라! 만일 내가 너한테 얻어터지면 내일부터 회사 그만둘게, 그리고 총이나 칼은 꺼내 들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알아듣겠지!!!”
  그들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신경도 안 쓰고 그저 히죽거리면서 내 앞으로 다가섰다.
  “무슨 사내새끼가 이렇게 말이 많아? 이 새끼야!”
  쟌이 큰소리를 지르면서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서른 살도 안 된 나이지만 오랫동안 머리와 수염을 깍지 않았고 배가 툭 불거져 나온 것이 중늙은이처럼 보였다.
  내가 재빨리 몸을 뒤로 젖히면서 비켜서자 쟌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면서 머리를 내 앞으로 숙여왔다. 나는 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공중으로 솟구치면서 쟌의 가슴팍에 오른발을 정확하게 꽂았다. 발끝에 둔중한 무게를 느끼면서 몸의 중심을 잡고 내려서는 순간 쟌이 머리를 건물 벽에 “꽝”하고 부딪치면서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번에는 옆에 섰던 라울이 내게 덤벼들었다. 나는 슬쩍 비켜서면서 왼쪽 주먹으로 그의 귀밑을 힘껏 후려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격을 받은 녀석들이 잠시움찔 하더니 쟌이 허리 뒤에 숨겼던 길이 30센티 정도 되는 큰 칼을 뽑아들고 내게로 돌진해 왔다. 나는 재빨리 세워놓은 내 차로 뛰어가서 열어 놓은 트렁크 속에 있는 권총을 꺼내 들었다.
  “쟌! 무기는 쓰지 말자고 했지! 조용히 그 칼 내려놔 이 새끼야, 무릎 꿇어!”
  쟌이 입만 조금 벌리면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면서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슬쩍 옆으로 던져버렸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서너 명이 우리 쪽을 쳐다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저녁에 안토니오가 걱정되는지 우리 집으로 건너왔다.
  “내가 그렇게 참으라고 했는데 그 거친 놈들을 건드려 놨으니 이제 어쩔 셈인가?”
  “걱정 마세요, 괜찮을 겁니다,”
  “참 태평이군, 자네가 오기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문제를 일으킨 쟌은 멀쩡하게 출근하고 상대편은 결국 회사를 그만뒀지, 항공 카메라부의 슈퍼바이저가 쟌 친척이거든 그래서 두 사람 다 해고 시켜 버리고는 2주후에 쟌 만 다시 부른 거야.”
  “그렇게는 못할 겁니다. 다투기 전에 신사협정을 했거든요, 쟌도 팔씨름 한번 했다고 생각 할 겁니다.”
  “그놈들이 약속을 지키리라고 믿고 있나?”
  안토니오는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쟌은 사내다운 놈이니 한번 믿어 봐야죠!”  
  월요일 아침에 씨큐리티 디파트 책임자인 미스터 가너가 찾아와서 나를 옆에 있는 빈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조금 있으니 쟌과 라울 그리고 루이까지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지난 금요일 퇴근 직후에 회사 파킹 장에서 너희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는데 사실이냐?”
  미스터 가너가 무슨 큰 죄나 지은 사람 다루듯이 엄숙한 목소리로 취조했다. 잠시 후 쟌이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큰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요, 장난 좀 친 걸요 뭐”
  “너희가 싸우는 것을 봤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도 두 사람씩이나 돼,”
  “미스터 가너, 이 친구 태권도 매스텁니다, 블랙 벨트 아시죠, 하도 자랑해서 시범 한번 보여 달라고 했거든요. 와! 하늘로 날라 오르더라고요.”
  미스터 가너가 나를 돌아다보면서 물었다.
  “자네가 태권도 시범을 보여줬다고, 정말인가?”
  나는 쟌이 엉뚱하게 둘러대는 것을 보고 내심 놀라웠다.
  “네, 하도 졸라대기에 ......”
  “무기도 꺼내 들었다던데?”
  미스터 가너가 우리들의 거짓진술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기분 나쁜 어조로 나를 노려보면서 물었다.
  “네! 호신술 시범도 보여 줬습니다,”
  “네, 그때 루이와 라울도 같이 봤어요.”
  쟌은 이제 완전히 내 편이 되어 둘러대고 있었다. 만약에 쟌이 내가 권총까지 꺼내들고 우리 셋을 죽이려고 위협했다고 진술했다면 나는 틀림없이 살인미수죄로 즉각 구속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투기 직전에 내가 더듬거리면서 제시했던 신사협정을 철저하게 지켜주었다.
   “흠! 그게 사실이라면 뭐 별 일도 아니었구먼 그래, 태권도 시범을 보여줬다……. 호신술 시범 까지! 네 사람 모두 아무런 문제  없는 거지?”
  “네”
  “네”
  “그렇다면 됐어, 돌아가서 일해도 좋아!”
  미스터 가너가 나간 후 내가 손을 내밀어 쟌에게 악수를 청했다. 쟌은 나에게 눈길도 안 주고 횅하니 방을 나가 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쟌은 의식적으로 나를 피했다. 그렇다고 사람이 변한 것은 아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사납게 굴었다. 쟌은 쉬는 시간만 되면 쏜살같이 파킹 장에 세워 놓은 벤 속으로 사라지 곤했다. 한 사람당 2불씩 거둬서 새끼손가락만 한 크기의 마리화나를 사 가지고는 여러 명이 들어앉아 돌려가며 피워댔다.

  남미 사람 대부분은 성당에 다니는데 안토니오는  남 침례 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지난여름에 안토니오가 나가는 교회에 특별 집회가 있었다. 한국에서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닥터 김을 강사로 모셔온다고 하면서 꼭 한번 집회에 와 달라고 했다. 집회 장소에는 수천 명이 모였고 김 목사님은 특유의 경상도 억양이 섞인 영어로 설교하셨다.
  집회가 끝난 후에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안수 기도를 받기 위해 강단 앞으로 나갔다. 나도 안토니오를 따라나가서 김 목사님을 기다렸다. 내게 다가오신 목사님께 “안녕 하세요”하고 인사를 하자 “아이고 한국분이 다 오셨군요!”라고 하면서 반가워하셨다. 그날 이후 안토니오는 나를 자기와 같은 남 침례교 계통의 교회에 다니는 교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런치룸 테이블에 추수감사절 장식이 내 걸린 것을 보니 벌써 한해가 저물어 가는 듯했다. 안토니오가 내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요즈음은 쟌하고 잘 지나고 있나?”
  “예, 서로 방해는 안 하고 있어요, 나 대신에 ‘부이’를 못살게 하는가 봐요, 왜 키 조그만 월남 친구 있잖아요.”
  나는 안토니오 영감을 건너다보면서 조금 전 런치카에서 산 투나 샌드위치를 한입 비어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가 쟌을 좀 도와주지 않겠나?”
  “어떻게요?”
  안토니오는 무슨 중요한 비밀이나 말하듯이 주위를 슬쩍 둘러보면서 의자를 내 앞쪽으로 당겨 앉았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니까 쟌을 사랑으로 대해 주자는 것이지, 이를테면 조금 더 부지런히 물건을 만들어서 그 친구 모르게 숫자를 채워 주는 거야, 오죽 했으면 남의 것을 훔쳐 갔겠어, 매니저가  여러 번 경고를 줬데, 쟌도 딸린 식구가 있는데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는 친구거든, 벌써 여섯 군데를 거쳐서 여기까지 왔는데 저렇게 마리화나나 피우고 마음을 못 잡고 있으니 말이야, 자네와 다툴 때도 그래서 말렸던 거야.”
  “그렇게 하면 버릇만 나빠지지 쟌이 바뀌겠어요?”
  나는 쟌에 대해서만은 마치 경기에서 승리한 자의 교만함 같은 것이 있어서 그 녀석이 밥을 먹는지 죽을 먹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죠지하고 나는 다섯 개씩 도와주기로 했으니 이 물건 끝날 때까지만 자네도 다섯 개 정도만 도와 줬으면 하네!”
  안토니오는 나도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는 교인으로 단정하고 사랑을 운운하고 있는데 사실 나는 그동안  쟌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녀석이 아직도 내 주변을 맴돌고 있으면서도 단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 쟌을 도와준다, 야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원수를 사랑하라’이건데 -  
  미국에 와서 힘든 일을 수도 없이 당해는 봤어도 내 스스로가 누구를 도와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누구를 도와준다, 그놈이 미워서 발길질까지 해 놓고 이제는 자진해서 물건을 해서 바쳐? 물건 다섯 개쯤 더 만드는 것이야 일도 아니지! 이번 물건 끝날 때까지만이라니 거절할 수도 없지 않은가?―
   나도 물건을 더 만들어서 쟌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안토니오는 학교공부는 그리 많이 못 했겠지만 교회를 통해 성경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내게 보여준 사랑을 문제투성이 쟌 에게도 똑같이 베풀고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 부서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쟌이 이 기계 저 기계 기웃거리면서 셋업이 잘 못 되었다든지 코발트 드릴을 써야 더 능률적이라고 하면서 자기 딴에는 좋은 의견이라고 지껄이고 다녔다. 매사에 언성을 높이고 싸움하자고 덤빌 때보다는 훨씬 평안했다.
  오늘도 마미스 도낫샾에 들려 슈거 트위스트와 따끈한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 안토니오 말대로 쟌에게 사랑을 보여줘라? 그놈들의 완력에 눌려서 비굴하게 꼬리를 내리는 것은 분명히 아닌데 왜 선뜻이 그에게 손을 못 내미는 걸까?  혹시 아직도 조금 남아 있는 다 구겨진 내 자존심 때문일까? 어떤 방법으로 쟌에게 접근해야 한단 말인가? -
  쉬는 시간마다 런치 카에서 음식을 사는 대신에 마리화나를 피우기 위해 파킹장 구석에 세워 놓은 시커먼 벤 속으로 들어가곤 하던 쟌이 머리에 떠올랐다. 슈거 트위스트 한 개를 더 사들고 나왔다. 쟌의 기계 옆을 지나치면서 흰 봉지에 든 도넛을 테이블 위로 슬쩍 던져 주었다. 잠시 후 쟌이 봉지를 열어 보고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허겁지겁 입에 쳐넣었다.
  처음에는 내가 무슨 좋은 일이라도 하는 것 같았었는데 이제는 마미스 도넛에 들려 따듯한 커피를 마시고 나면 으레 버릇처럼 도넛 한 개를 하얀 봉지에 넣어 가지고 나왔다. 지난 수개월 동안 이런 일을 반복하면서 쟌을 미워하던 나의 감정이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고 그를 측은하게 생각하던 마음이 어느덧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쟌의 책상에 놓아주기 위해서 언제나 10분쯤은 일찍 출근하곤 했다.
  어느덧 봄이 오고 마켓에는 토끼 장식과 색칠한 계란들로 부활절 연휴를 준비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풍성한 이스터 점심을 런치 룸에 준비해 주었다.
  쟌이 내게 다가와서 그 큰손을 내밀었다.
  “해피 이스터 문!”
  나는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았다.
  “해피 이스터 쟌!”
  쟌이 악수한 손을 놓고 멋쩍은 듯이 피식 웃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가만히 손을 펴 보니 거기에는 놀랍게도 황동으로 만든 조그만 십자가가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나의 눈에는 눈물이 왈칵 솟아올랐다.
  -그동안 나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않던 쟌이 나를 위해 이런 귀중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한참동안 구석자리에 앉아있었다. 쟌과 루이 라울도 저쪽에 자리를 잡고 제 세상 만난 듯이 떠들면서 점심을 즐기고 있었다. 내가 그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하이! 쟌 너한테 물어 볼 말이 있다!”
  쟌 대신 라울이 벌떡 일어서면서 팔을 구부려 얼굴을 가리고 익살을 부렸다.
  “Okay! Okay! Please don't hit me Master!"
  내가 라울의 어깨를 툭 치면서 쟌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쟌! 네가 준 선물 참 고맙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를 만들어서 내게 줄 생각을 했냐?"
  “응,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십자가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을 것 같았어, 너도 안토니오처럼 열심히 교회 다니지, 점심 식사 할 때마다 늘 기도하는 것도 봤고, 그래서 시간 나는 대로 황동 판을 조금씩 갈아서 십자가를 만든 거야, 사실은 나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부모님 쫓아서 교회에 다녔었거든......"
  쟌이 큰손을 들어 얼굴을 비비면서 멋쩍은 듯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갔다.  
  “그랬었구나,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다시 교회에 나아가도록 해, 쟌! 이 선물 평생 동안 잘 간직할게, 해피 이스터 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피폐해진 쟌의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사랑하는 쟌의 마음속에 부활의 기쁨을 허락하옵소서!.....”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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