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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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Chuck

             Ode to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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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을 위한 동화한명희


 

아주아주 옛날에는 사람들이 몸으로 글을 썼어요 고호가 귀를 잘라 그림을 그린 것처럼요 사마천이란 사람은 자기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잘라 글을 썼답니다

세월이 흘러흘러 사람들은 도구를 이용하게 되었어요 예세닌은 손목의 동맥을 절단했어요 그리고 거기서 나온 피를 펜에 찍었답니다 그가 쓴 시들은 비린내가 났지요

또 시간이 흘러 글쟁이들은 작업실을 갖게 되었답니다 보들레르는 창녀이자 애인의 방에서 트라클은 여동생이자 애인의 방에서 포는 사촌 여동생이자 아내의 방에서 작업을 했어요 아주 격정적인 작업이었지요

그리고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전쟁과 내전불신과 검문폭력과 폭식기상이변에 광주민중항쟁 힌두쿠시 산맥 남쪽에서는 테러가 일어났고 애플은 아이패드를 내놓았지요 두바이유는 자주 백 달러에 육박했어요

요즘은 멀티태스킹이 대세입니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하면서 글을 써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영화를 보면서 글을 써요 짜깁기를 하면서 모자이크를 하면서 글을 써요 사람들이 점점 만능이 되어갑니다

 

계간 시인시각》 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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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가 변하면 사람도 변한다강산도 변하고 무쇠도 변하는데 사람인들 변하지 않으랴시인의 글 쓰는 방식도 바뀌지 않을 도리가 없다사람의 온몸이 도구였을 때와 멀티태스킹이 대세인 시대가 같을 수는 없겠지귀를 잘라 매춘부 라셀에게 선물했다는 반 고흐양심과 정의를 변호하다가 남근이 잘린 사마천이사도라 덩컨과의 달콤했으나 불행했던 짧은 결혼생활 뒤에 결국 신경쇄약에 걸려 손목을 그은 예세닌그리고 보들레르트라클에드거 앨런 포가 각자의 연인에게 푹 빠져 있는 동안에도 문학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세상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이 변화들은 문학에도 영향을 끼쳤다요즘은 하나의 컴퓨터 모니터에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구동되는 멀티태스킹이 대세다사람들은 인터넷을 하면서 글을 쓰고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영화를 보면서 글을 쓴다나도 TV를 켜둔 채 화면을 몇 개나 띄우고 글을 끼적인다다른 일체의 환경을 차단한 채 오로지 원고지 메우는 일에만 전념하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사람들은 점점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보다 제너럴리스트가 되어간다하지만 어떤 이는 스페셜리스트이면서 제너럴리스트다.


  시 말고 하는 일이 많으면서도 시를 잘 쓰는 사람이 있다여러 종류의 일을 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의 일에 주의력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에너지가 넘친다많은 일을 감당하면서도 건성건성 하는 법이 없다보통은 생산성이 떨어지고 실수할 가능성도 높지만 복수의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면서도 업무의 완성도 또한 높다능란한 멀티태스킹은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이지만 누구나 가능한 것은 아니다반면에 시를 삶의 전부로 삼는다고 해서 좋은 시가 쓰지는 것은 아니며시를 위해 순교한다고 만족할만한 시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시를 정열적으로 쓰면서 문학 외적인 일에서도 충분히 능력 발휘하는 시인을 여럿 보았다어제와 그저께 시를 소개한 이정록 맹문재 시인도 내보기엔 그런 사람이다과문하여 일일이 거명하지 못해 그렇지 문단에는 그런 분들이 꽤 많은 것 같다문인은 아니지만 얼마 전 언급한 옛 직장 상사 박 대리의 경우도 그렇다당시 그는 일이 많기로 소문난 총괄예산을 담당하고 있었고 유학을 준비 중에 있었으며대학총동창회의 총무였고 취미로 동전을 수집하고 있었고 주식을 했다그리고 술도 좋아했고 직장 동료들의 경조사를 알뜰히 챙겼다.


  그밖에도 하는 일이 많았다그런데 신기하게도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는 그였는데 늘 여유로워 보였다점심시간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잠시 낮잠을 즐기면서 이어폰으로는 AFKN을 들었다마침내 그의 미국유학이 결정되고 부서에서는 송별연을 위해 날을 받으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출국 하루 전날 밤 한 일식집에서 회식을 가졌다그날도 지금처럼 장마철이었고 비가 내렸다나는 박대리 뒤에서 이층으로 향하는 나무계단을 밟아 올라갔다그의 양말이 비에 푹 젖어 선명한 족적을 남기고 있지 않은가.


  구두가 터진 걸 몰랐냐고 물었다그는 전혀 몰랐고 그걸 신고 비행기를 탈 생각이었다멀티태스킹의 원조라 할 그에게도 구멍은 있었다마치 아인스타인이 세수비누와 세탁비누를 귀찮아서 분별하지 않고 사용했듯이나는 그전까지 하나를 깊게 파고들어 빛나는 성취를 일궈내는 사람을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박 대리를 알고부터 여러 가지 일을 하는데도 각각의 일에 전혀 소홀함이 없는 사람을 그렇게 고쳐 인식했다나는 업무에 트래픽 잼이 걸리면 허둥지둥 종래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빠지면서 만능과는 거리가 멀고 가끔 짜깁기도 하고 구멍도 많은 사람인데 더러 오해하는 사람이 있다시를 쓴다고 시에만 온통 매달려 지내는 사람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다.( 해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