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영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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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Chuck


[스크랩] 등 뒤의 사랑, 

그것은 뼈와 피가 시리도록 아픈 사랑

등 뒤의 사랑 !

(오인태)

 

 앞만 보며 걸어왔다. 

걷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하얀 등이 
보였다. 아, 그는 내 등 뒤에서 
얼마나 많은 날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그 수척한 등줄기에 
상수리나무였는지 혹은 자작나무였는지, 
잎들의 그림자가 눈물 자국처럼 얼룩졌다. 
내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랑을 좇아 
끝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앞만 보며 
걸어올 때, 이따금 머리 위를 서늘하게 
덮으며 내가 좇던 사랑의 환영으로 
어른거렸던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슬픔의 그늘이었을까. 때때로 
발목을 적시며 걸음을 무겁게 하던 
그것은 그의 눈물이었을까. 
그럴 때마다 모든 숲이 
파르르 떨며 흐느끼던 그것은 
무너지는 오열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등 뒤의 사랑
끝내 내가 좇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되지만 
나는 달려가 차마 그대의 
등을 돌려 세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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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에는 낮고 어둡고 쓸쓸한 곳의 사랑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진다. 12월이 그런 달이다.

1처럼 당당하게 서있는 절대자 등 뒤에서 2처럼 날개 접은 작은 한 마리 새가 되거나, 무릎 꿇는 사랑의 죄인이 되어 세상 그늘진 곳의,

모든 사랑의 십자가를 위해 기도하고 싶어진다. 숨 가쁘게 12월에 당도해서야 문득 ‘등 뒤의 사랑’을 뒤돌아본다.

사랑의 맹목에 눈멀어 앞만 보고 온몸으로 달려왔기에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등 뒤의 사랑에 대해 무심했다.

등 뒤에 누가 서있는지를 모른 채 살아왔다. 등 뒤에서 누가 울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어는 추위 속에서 문득, 그렇게 문득 등이 굽어지며 결락의 상처 아득히 시릴 때

그곳, 등 뒤를 돌아다본다. 

어느 시인은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고 했다. 산 뒤, 그리운 곳은 따뜻한 희망의 주머니 같은 곳이다.

늘 햇살이 머물고 꽃이 피고 새가 우는 그리운 남쪽 같은 곳이다.

그러나 오인태 시인의 등 뒤에는 슬픔과 눈물이 흰 목덜미로 서있다.

그곳은 겨우내 웅크린 채 녹지 않는 눈이 쌓인 응달진 북사면(北斜面) 같은 곳이다. 

당신은 누군가를 등 뒤만 바라보며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그 등이 자신을 향해 돌아서길 약속 없이 기다려본 적이 있는가? 등 뒤, 그곳은 사랑의 응달이다.

등 뒤의 사랑, 그것은 뼈와 피가 시리도록 아픈 사랑이다. 

12월에는 등 뒤에서 우는 흐느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많은 날을 혼자 숨죽여 울었던 누군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숲의 어두운 그늘에 숨어, 혀를 깨물며 울고 서있는 상수리나무 같은 자작나무 같은 그 영혼에 무릎 꿇고 경건해져야 한다. 

누구에게나 누군가의 등 뒤만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불 꺼진 가로등 뒤에 숨어서 한 소녀의 등만 지켜보던 첫사랑의 시간이 내게도 있었다.

이젠 중년이 되어버린, 그 소녀는 아직도 알지 못할 것이다.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신의 등 뒤에서 숨어 바라보았는지를.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던 그녀의 등, 어둡고 긴 골목길을 총총 달려가던 그녀의 등,

대문에서 초인종을 누르던 그녀의 등, 내 첫사랑의 팔 할은 그녀의 등을 보는 것이었지만,

어떤 인기척에도 한 번도 돌아보지 않던 고집스럽게 야멸쳤던 그녀의 등이 있었고 그 등 뒤에 내가 있었다.

그녀의 방에 불이 켜질 때까지 혹은 그 불이 꺼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던 내 영혼을 무엇 하나 위로한 적이 없었고 무엇에게도 위로받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가로등에 찬 이마를 대고 오열했던 날이 많았으니 우연히, 그 소녀를 다시 만난다면

그녀 등 뒤에 서있었던 그날의 나에게, 돌아서서 정중히 사과하라고 억지를 부리고 싶다.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랑하는 사람의 등 뒤는 그건 길이 아니라 끊어진 절벽이다.

길을 막고 선 아이거 북벽 같은 빙벽이다.

뛰어넘을 수도 없고 오를 수도 없는 깊이와 높이 속에서 지금도 누군가가 소리없이 울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 등 뒤의 사랑에게 던지는 그 한마디뿐이다. 그 한마디에도 겨울 숲이 흔들린다.

그건 그 말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냥 뒤돌아볼 뿐인데, 미안하다는 한마디뿐인데도 진실이기에 나무가 울고 숲이 운다.

그렇다. 그 한마디는 충분하다. 

12월에는 뒤돌아보자. 등 뒤의 사랑을 위해 한 번쯤은 미안하다고 용서를 청하자.

등 뒤의 사랑을 위해 미안하다고 기도하자. 등 뒤의 사랑을 위해 미안하다고 함께 울어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