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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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거산호 11/김관식

2008.03.28 00:44

정문선 조회 수:269 추천:20

거산호(居山好) Ⅱ - 김관식 - 오늘, 북창을 열어 장거릴 등지고 산을 향하여 앉은 뜻은, 사람은 맨날 변해 쌓지만 태고로부터 푸르러 온 산이 아니냐. 고요하고 너그러워 수(壽)하는 데다가 보옥을 갖고도 자랑 않는 겸허한 산. 마음이 본시 산을 사랑해 평생 산을 보고 산을 배우네. 그 품안에서 자라나 거기에 가 또 묻히리니 내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에 아아(峨峨)라히 뻗쳐 있어 다리 놓는 산. 네 품이 고향인 그리운 산아 미역취 한 이파리 상긋한 산 내음새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꿈 같은 산 정기를 그리며 산다. - <창작과 비평>(1970) -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탈세속적, 자연 친화적, 동양적 ◆ 표현 : 인간과 자연의 대조 반문명적, 반세속적인 소박한 생활관 안빈낙도, 유유자적하는 삶의 모습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장거리 → 장이 서는 거리, 세속적인 삶의 공간 * 사람은 맨날 변해 쌓지만 / 태고로부터 푸르러 온 산이 아니냐 → 유한한 인간사와 변함없는 자연을 대조 * 고요하고 너그러워 ~ 겸허한 산 → 동양 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산'의 속성 * 이승의 낮과 저승의 밤 → 사는 동안과 죽어서까지 * 아아(峨峨)라히 → 산이나 큰 바위가 우뚝 솟은 위엄 있는 모양 * 미역취 한 이파리 상긋한 산 내음새 → 미역취에 취한 화자의 모습을 통해, 자연에 동화된 모습을 감각적(후각적)으로 표현함. *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 역설법, 자연에 심취된 모습 ◆ 화자의 자세 : 반문명적이고 반세속적인 무욕의 삶의 자세 ◆ 주제 : 자연과 동화된 삶(자연 귀의) [시상의 흐름(짜임)] ◆ 1~4행 : 산을 향하여 앉은 뜻 ◆ 5~8행 : 산을 보고 배우는 삶 ◆ 9~11행 : 영원한 안식처로서의 산 ◆ 12~15행 : 산 정기를 그리며 사는 삶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의 제목인 '거산호'는 '산에 사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다. 동양적 시 세계를 독자적으로 추구해 온 김관식은 한문 문장과 고풍적인 문체로 익살 넘치는 비판의 시를 많이 남겼다. 이 시는 그의 말년의 대표작으로 그의 고풍스러운 시풍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시는 영원한 자연과 유한한 인간사를 대조함으로써 안빈낙도, 유유자적하는 생활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산을 보고 겸허함을 배우고, 산을 그리워하며 자연과 동화되는 동양적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물질과 권위에 가득찬 세속을 벗어나 노장의 무위에 가까운 경지를 추구하는 시인의 자세가 잘 드러나 있다. 일찍이 한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시인은 초기시에서 어려운 한자어를 많이 구사하여 유학자적 풍취를 짙게 드러내는 한시풍의 시를 주로 창작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는 지조 높은 선비의 자세를 동양적 달관으로까지 승화시켜 표현한 작품을 썼다. 이 작품은 시인이 요절하기 몇 달 전에 발표한 작품으로, 시인이 평생 동안 추구한 동양 정신이 작품 속에 용해되어 높은 서정성을 획득하고 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연은 동화와 순응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다. 즉, 그의 시의 자연은 동양 정신 그 자체인 셈이다. 거산호 Ⅰ 산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도 심구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祿)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괴짜 시인 김관식 '대한민국 김관식' 명함에 그렇게 새기고 다니던 시인 김관식(1934~1970)이 4 · 19 직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는 소문이 문단에 파다하게 퍼졌다. 어떤 사람은 껄껄 웃으며 김관식답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무슨 돼먹지 못한 망발이냐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쨌든 하늘을 찌르는 자만심과 호방한 기개에 넘쳐있던 26세의 김관식은 서울 용산구에 출마했다. 상재는 민주당 신파의 거물인 장면이었다. 결과는 자명했다. 김관식은 떨어졌고, 선거를 치르느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남김없이 털어먹고 말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기와 술과 기행(奇行)뿐이었다. 그는 세검정 밖 홍은동의 산비탈 국유지 일대를 무단점거하고 거기에 집을 짓고 살았다. 지금은 연립주택이 빽빽하게 들어선 주택지이지만 당시에는 그 일대가 능금이며 자두나무가 심어져 있던 과수원과 잡목들이 우거진 채 방치된 주인없는 땅이었다. 시인의 눈에 저 귀한 땅을 쓸데없이 놀리는 것은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어느 날 시인은 그 국유지에 목수와 인부들을 동원해 여러 채의 집을 한꺼번에 짓기 시작했다. 판잣집은 한나절에 한 채씩 생겨났다. 무허가 불법가옥이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구청 직원들에 의해 그 판잣집들은 철거되었다. 김관식은 이튿날 다시 목수와 인부를 동원해 집을 지었다. 한 채 두 채가 아니고 십여 채의 집을 지었다. "보옥을 갖고도 자랑하지 않는 겸허한 산"에 시인들만 사는 마을을 건설하고, "산에서도 오히려 산을 그리며" 살려 했던 것이다. 한때 황명걸, 조태일 같은 시인들이 실제로 시인이 지은 집에 살기도 했다. "산에 가 살래 / 팥밭을 일궈 곡식도 심구고 /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 작록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거산호 1) 시인의 삶은 고달팠다. "가난! 가난! 가난 아니면 / 고생! 고생! 고생이랫다." 낮거미가 집을 짓는 홍은동 산비탈의 누옥 바람벽에는 썩은 새끼에 시래기 두어 타래가 내걸린 채 바람에 흔들렸다. 끼니마다 감자를 삶아 먹고, 호랑이표 시멘트 종이로 도배를 한 방에서 한미간의 우정과 신뢰의 악수 문양이 새겨진 밀가루 포대로 호청을 한 이불을 덮는 누추한 삶이었지만, "화옥(華屋)에 고차(高車), 금의(錦衣), 옥식(玉食)을 꿈에도 기루어 하지를 않았다."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게으르게 일어나 조로에 물을 담뿍 퍼 들고 텃밭에 심은 상치 쑥갓 아욱들에 물을 주었다. 그가 꿈꾼 것은 여름 저녁때 생모시 옷고름 고의적삼 바람에 합죽선으로 해를 가리고 산책할 수 있는 여유가 허락되는 청빈낙도의 삶이다. 그런 청심과욕으로 하루 세끼의 끼니에 자족하는 삶을 두고 "왕후장상이 부럽지 않고 백악관 청와대 주어도 싫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는 호구지책으로 서울상고(지금의 경기상고)에서 잠시 교편생활을 하기도 하고 세계일보의 논설위원직에도 있었으나, 그의 파천황적인 기행과 면모를 오래 참고 받아줄 직장은 이 세상에 없었다.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인 장기영이 축사를 하고 있었다. 술에취해 뒤늦게 출판기념회에 모습을 나타낸 김관식은 씩씩하게 장기영 앞으로 나서며 그를 밀쳐냈다. "자네는 그만 하게. 내가 할 말이 좀 있으니까."라고 말문을 연 그는 직정적인 육두문자를 펼쳐냈다. 그는 낭인이 되어 문단의 이러저러한 술자리나 출판기념회 따위를 누비고 다니며 도발과 공격을 일삼과 종횡무진으로 오연한 자긍심과 호방한 기개를 뽐냈다. 그는 가난했으나 거기에 주눅들어 비굴한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