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선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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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꽃 피는 시절/이성복

2008.03.30 07:01

정문선 조회 수:318 추천:15

꽃 피는 시절 - 이성복 - 멀리 있어도 나는 당신을 압니다.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 속을 헤매다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부르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생각지 않아도,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면 내 목은 갈라지고 실핏줄 터지고 내 눈, 내 귀, 거덜 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나는 울고 싶고, 토하고 싶고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부서지고 무너지며 당신을 보낼 일이 아득합니다.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날 일 꿈같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 시집 <그 여름의 끝>(1990)-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감각적, 비유적 ◆ 표현 : 경어체를 사용한 고백적 어투 청자(당신)을 상대로 하는 대화체의 말하기 나와 당신의 관계를 '봄과 꽃'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로도 이해할 수도 있음.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나' → '당신'을 안에 품고 있는 존재, '당신'을 잎잎이 뱉아 낼 존재, 꽃잎을 감싸고 있는 외피임을 알 수 있다. 이 외피가 꽃이 피는 과정에서 부서지고 찢긴다는 점에서 시인의 상상력이 놀랍다. * 귀먹고 눈먼 당신은 추운 땅 속을 헤매다 → '당신'이 식물과 관련됨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구절 * 누군가의 입가에서 잔잔한 웃음이 되려 하셨지요 → 기쁨과 희망을 주는 존재로서의 당신 * 부르지 않아도 ~ 꿈꾸지 않아도 당신은 옵니다. → 자연의 섭리(생명 탄생)의 당위성 * 당신이 올 때면 먼발치 마른 흙더미도 고개를 듭니다. → 당신의 강한 생명력과 당신이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임을 나타낸 표현 *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 내가 당신(꽃)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임을 알게 해줌. *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고 / 나를 벗고 싶어 몸부림하지만 → 꽃이 피는 것을 의지적 행위로 묘사함. * 내게서 당신이 떠날갈 때면 ~ 거덜 난 몸뚱이 갈가리 찢어지고 → 꽃이 피기 위해서는 고통과 희생이 필요함을 나타낸 표현 * 나는 울고 싶고, 토하고 싶고 / 벌컥벌컥 물사발 들이키고 싶고 길길이 날뛰며 → 꽃을 피우기 위해 내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 희생의 모습 *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테지만 → 하얀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묘사 * 굳은 살가죽에 불 댕길 일 막막합니다. → 꽃을 피우기 위해 내가 겪어야 할 고통과 희생이 두렵다는 뜻 *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 → 꽃이 피어나려는 순간을 열정적인 행동으로 표현함. ◆ 제재 : 꽃 피는 시절(봄의 생명력) ◆ 주제 : 생명 탄생(개화)을 위한 고통과 환희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기쁨과 희망을 주는 존재 = 당신 ◆ 2연 : 강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 = 당신 ◆ 3연 : 강한 의지를 지닌 존재 = 당신 ◆ 4연 : 생명 탄생을 위한 고통 = 나 ◆ 5연 : 고통과 희생의 결실 = 당신 ◆ 6연 : 생명 탄생을 위한 희생에 대한 두려움 = 나 ◆ 7연 : 생명 탄생의 의지와 열망 = 당신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적 화자인 '나'가 '당신'이라는 대상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이 어떤 존재인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둘의 관계에 대한 서술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시적 의미와 함께 그것이 상징하는 바가 드러난다. 먼저 당신은 추운 땅속을 헤맸던 적이 있고, 흙더미와 관련된다는 내용을 통해 그것의 속성이 식물과 관련됨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3연의 '당신은 지금 내 안에 있습니다.', 5연의 '절편보다 희고 고운 당신을 잎잎이 뱉아낼' 것이라는 표현은 당신과 '나'의 속성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준다. 즉 '당신'은 꽃(꽃잎)이고, '나'는 피어날 꽃을 품고 있는 껍질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나'와 '당신'의 속성을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 시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몫을 한다. 당신(꽃)이 피어날 때 '나'는 몸뚱이가 갈가리 찢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당신이 오는 게 두렵고, 당신을 보낼 일이 아득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반드시 올 것을 알고 있다. 계절 변화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따라 꽃이 피어나는 것이다. 생명이 탄생하는 것은 경이로운 사실이지만, '나'가 당신을 위해 부서지고 무너지듯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생명의 탄생과 그를 위한 희생의 필요성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전해 준다. ● 감상을 위한 더 읽을거리 이 시는 이성복의 세 번째 시집「그 여름의 끝」(문학과 지성, 1999)에 수록되어 있다. 이성복의 시적 성취는, 개인적인 고통과 치욕을 사회적 의미로 확대시키고, 그 고통과 치욕의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천착에서 온다. 이성복은 그의 첫 번째 시집의 시작 메모에서 '아픔'은 '살아있음'의 징조이며, '살아야겠음'의 경보라고 말한다. 얼마나 아플까. '불탄 살가죽 뚫고 다시 태어나'는 꽃망울들. 이 시에서의 직접적인 갈등은 '당신'의 부재이다. '꽃 피는 시절', 세상의 온갖 것들이 새로운 것으로 다시 태어날 때 시적 화자는 '당신'의 계절에 머물러 있다. 그것은 '내게서 당신이 떠나갈 때'의 계절이다. 고통, 목이 갈라지고, 실핏줄이 터지고, 눈, 귀, 거덜난 몸뚱이가 갈가리 찢어지는 고통의 계절이다. 오랜 겨울을 견뎌낸 시간, 부르지 않아도 오는 당신처럼 봄은 온다. 추운 땅 속을 헤매다, 잔잔한 웃음이 되어 온다. 이 시의 직접적인 갈등은 부르지 않아도 오는 당신으로 객관화되는 봄, 즉 꽃피는 시절이다. 받아들일 수 없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의 시절. 아직 당신을 보내지 못하고 있는 시적 화자에게 (그래서 당신을 안에 품고 있는) 또 다른 계절이 온다는 것은 단순한 계절의 바뀜이라는 의미를 넘어 어떤 '고통'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저 한용운의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의 빼어난 변주이기도 하다. '지금 당신은 내 안에 있지만 / 나는 당신을 어떻게 보내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의 마지막연 첫 행의 언술은 꽃 피는 시절의 아득하고 환몽적인 분위기와 어울려 이 시에서 드러나는 고통의 모습을 폭발적으로 확장시킨다. '조막만한 손으로 뻣센 내 가슴 쥐어 뜯으며 발 구르는 당신'과도 같은, 개나리, 목련, 철쭉…. 꽃이 핀 봄나무 아래 않아서 이 시를 오래오래 바라본다. 여기저기 막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봄나무'의 고통에 귀 기울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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