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시대-1920년대

2017.12.10 03:33

백남규 조회 수:53

 사랑만큼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에너지도 없다. 기존의 금지선을 벗어나 전혀 새롭고 낯선 매트릭스로 진입하게 하는 힘, 그것이 사랑의 본래 면목인 까닭에 우리 삶을 어떻게 하면 에로스로 가득 채울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된다.

 

  1920년부터 1940년까지의 동아일보 기사를 찾아보면 ‘자살, 정사’로 분류되는 기사만 8000건이 넘을 정도로 당시 정사는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신여성과 모던보이들은 사랑에 미쳐 죽는 것을 ‘절대미의 극치’로 칭송했다. 비련의 사건은 상업적 관심으로도 이어졌다. 김우진과 투신자살 직전에 남겼던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음반은 최초로 10만 장을 돌파할 만큼 전례 없는 판매액을 올렸다.

  

 자유연애를 부르짖은 신여성들은 대담한 선언으로 연일 신문에 오르내렸다. 정조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있다는 ‘신정조론’을 외친 시인 김원주를 비롯해 정조란 오직 취미에 불과한 것이라는 ‘정조취미론’을 내세운 나혜석, 성적 만족을 위해서라면 정신적인 사랑 없이 육체적 결합이 가능하다는 ‘연애 유희론’을 주장한 허정숙이 그 주인공이다.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사람 모두가 독립운동 아니면 친일을 했던 게 결코 아닐진대, 그 무수한 갑남을녀의 일상적인 삶과 생활감정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공부하고, 여행하고, 먹고 마시고 입었는지 등을 되짚어보려는 노력은 최근 들어 주로 국문학계의 근현대문학사 연구자 사이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권보드래의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는 연애를 중심 개념으로 1920년대 초 신문과 잡지 기사, 연재 소설, 삽화, 광고 등의 자료를 살핀다. 1920년대 들어 여성이 거리에 나오는 게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거리로 나선 청춘남녀의 오고가는 눈길 사이에 불꽃이 튀는 일도 잦아졌지만, 열정을 곧바로 발산하기보다는 편지를 주고받는 게 일반적이었다. 1920년대에 서간체 소설이 유례없이 유행했던 건 바로 그 시대가 자유연애의 기풍이 확산되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대의 자유연애가 지닌 한계도 분명해서 봉건적인 인습과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새로운 자유와 전통적 억압이 공존하는 이중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고루한 조선시대의 도덕률과 너무나 급진적인 서구의 연애 사상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그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사랑에 생명을 던졌다. 비록 그들은 희생양이 되어 사라졌지만 그 사랑만큼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도 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 책《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 사건》은 독자들에게 경성 시대의 생생한 공기와 함께 100년 전에도 펄떡거리는 심장을 지닌 인간이 살고 있었다는 진실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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