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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4 07:52

우리집 소(牛)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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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소(牛) 이야기
                         - 나의 어린 시절 회고

오정방

<註:이 산문은 고향의 울진문학회 연간집 “울진문학” 제18호에 수록된  것으로 나의 어린시절 회고담 한 토막을 써달라는 청탁으로 보낸 것임>
....................................................................


지금 울진군청 앞에 자리 잡은 울진경찰서가  6. 25 한국전쟁 발발후 3개월만에 완전히 소실되었다. 언젯적 일인데 어떻게 지금까지 기억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그날 우리 집도 전소되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이 일은 내 나이 9살 때 있었던 일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울진군 울진면 온양1리, 양정이란 곳인데 거기서 나는 9살까지 살았다. 푸른바다와 더불어 행복했다. 비록 대농은 아니었지만 전답이 적지 않아서 일손은 늘 넉넉하지 못했다. 어린 내가 할 수 있는 일중의 하나가 소를 몰고 산으로 들로 나가 여럿이와 어울려 꼴을 먹이는 일도 있었다. 그런 일을 내가 몇살부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으나 3년 정도는 되지 않겠나 싶다. 잘못하여, 주로 졸거나 동무들과 정신 없이 놀다가 미쳐 소가 남의 곡식 먹는 것을 보지 못하여 낭패를
만나면 저녁마다 모래 사장에서 열리는 약식재판  ‘소공사’에 나가 회초리로 종아리를 공개적으로 맞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왔다. 물론 나도 그런 꼴을 당한 적이 없지 않다. 그러나 때리는 사람은 재발을 방지하기 위함으로 훈계하는 것이고 맞는 사람은 정신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받기 때문에 불평불만 이란 것은 없었다.  공사에 나온 사람은 어린아이도 있지만 청년들도 있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학교는 울진초등학교를 걸어 다녔다. 약 10리 정도 되는 길이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등하교를 하였다.  그 해 1950년3월,  3학년에 올라가면서 우리 집은 양정에서 울진 읍내 1구 향교부근으로 이사를 했다. 부모님이 결정한 일이라 그저 따라갈 수 밖에 없었지만 우선 학교가 가까워졌고 집도 태어난 우리 남매들이 태어난 생가보다도 큰 대궐같은 집이라서 좋았다. 이사를 따라 가지 않겠다는 주장이나 선택이 나에게는 전혀 없었다. 더 좋은 데를 가는데 달리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이사를 했던 바로 그해 6월에, 다시 말해 이사하고 3개월만에 북의 남침으로  6. 25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우리 국군의 전세는 약해져서 인민군들이 우리집 앞 방죽을 따라 시내를  거쳐 남으로 남으로 내려갔고 나중에는 낙동강 어구까지 적들에게 내어주는 꼴이 되었다. 그러다가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 작전을 감행한데 힘입어 전세가 국군에게 유리해져서 실지를 조금씩 회복해 가는 과정에서 서울 탈환 전날에 인민군들이 울진을 경유 퇴각하면서 마침 우리집 뒷편 공터에 쌓아둔 탄약더미에 불을 지르는
씨지 못할 죄악을 범한 것이다.  그 바람에 그 쌓였던 총탄이 우리집을 치면서 그 밤에 우리집은 화염에 싸였다. 나는 어머니와 누나, 동생하고 방공호에 들어갔고 아버지는 등기소 張 소장님, 1구 張 구장님과 함께 우리집 긴 마루 밑에 몸을 숨겼다가 집에 불이 붙고서야 어디론가 피신하셨다.  우리도 방공호로 파고드는 연기에 질식할듯 하여 어두운 밤길을 더듬어 새마실 어느 집 방공호에 들어 갔는데 거기엔 총자루도 있고 이부자리도 깔려져 있었다. 눈을 붙이는둥 마는둥 하며 날이 새길 기다렸다가 동이 트서 밖으로 나오니 신작로에 인민군들이 여럿 죽어 넘어진 시신을 볼 수가 있었다.  한 달음에 집에 와보니 밤새 집은 모두 타버리고 마지막 연기만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형제중 맏이였는지라 보관하던 족보랑 제기랑 모두 다 타버렸고 입은 옷 밖에는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전쟁중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보다 더한 피해가 왜 없었으랴.
그런데 그 새벽에 양정 작은 집에서 형님들이 달려왔는데 아무도 기별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알고 달려 왔을까? 그 때 들려준 얘기는 대충 이러했다.
새벽에 어두컴컴한데 호랑이가 집으로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호랑이가 아니고 불에 털이 홀랑 탄 소였는데 그 소가 큰집 소라는 것을 알고 큰집에 무슨 변고가 있나보다 하고 급히 달려왔다는 것이다. 그 변고는 눈에 보는바와 같았다. 우리집에는 별채에 외양간이 있었다. 잘 때에는 소 고삐를 매어 두는데 그 단단한 고삐가 다 타서 끊어진 뒤에서야 달아났을터이니 그 몸엔 얼마나 중한 화상을 입었겠는가? 여기서 한가지 더 이상한 것은 우리집 소가 한 번도 작은 집에 가본 적이 없다는데 옛날 전에 살던 우리집에 갔다면 이해가 되지만 작은 집을 어떻게 알고 거기까지 갔단 말인가?  영물이 아닐 수 없었다.  읍내에서 양정까지는  6개월 전 이사할 적에 이 암소가 14번이나 가재를 운반 했으니 길이 눈에 익었다 하더라도 여러 많은 집 가운데서도 우리 작은 집에 찾아 간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화상을 입은 이 소는 소생할 가망이 전혀 없어서 동네사람들이 죽기 전에 잡아 먹자고 하여 결국 도살하여 조금씩 쇠고기 맛을 보여줬지만 아버지께서는 한점도 드시지 않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집에 애지중지 길렀던 가축이었는데 어떻게’ 하시면서…
소는 성실하면서 우직하고 힘도 세고 끈질기고 사납지 않고 주인에게 순종을 잘하는 속성이 있다. 인간에게 도움만 주고 해를 기치지 않는다.
나는 해마다 9. 28을 지날 때마다 언제나 처럼 짧게나마 정이들었던 이 암소가 기억 속에 늘 떠오르는 것이다. 실로 62년 전의 일로 인하여…

<20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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