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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전)문학성과 영성이 탁월하신 명설교자/김석규 목사편<상>

  오정방
  

   성결교회인물전

                        김   석   규
                       __________

                        (金  碩  圭)


            문학성과 영성이 탁월하신 명설교자

                                               오 정 방
                                


주님!
괴로우나 즐거우나
우리는 언제고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주님의 가슴은 우리의 따뜻한 요람
언제나 돌아가야 할 우리의 고향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풍기는 향수를 맡고
눈물이 자욱자욱 떨어지는 외로운 길을
우리는 걷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주시는 희망을 안고
거칠고 좁은 삶의 오솔길을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묵묵히 걷습니다.

주님!
비록 황혼이 짙어가는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랑의 애가를 부르다가도
깃들일 곳을 찾아 날아가는 비둘기처럼
아프고 고달픈 심령들이
당신의 품속으로 찾아 드옵니다.
주여, 지금 우리를 당신의 품에 맞아 주시고
참된 안식과 평화를 고루고루 주시옵소서.

우리의 참된 친구시며,
힘이 되시고 소망이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하나이다.
아멘

     -  김석규 목사 작 ‘괴로우나 즐거우나’ 전문


신학적인 영성은 물론, 남다른 문학성을 가지고 감동적인 설교를
통하여 성공적이고 아름다운 목회를 할 수 있었던 김석규 목사는
교단을 초월하여 자타가 인정하는 성결교단의 훌륭한 지도자의
한 분이다. 두 권의 설교집과 다수의 문집, 그리고 수많은 수필과
기도시를 발표하므로서 전업 문인을 능가하는 필력을 소유하였고
이것을 목회현장에 적절히 적용하는 것으로 인하여 명설교자의
명성과 위치를 굳건히 한 참다운 목회자요 또 해박한 신학자이다.
김석규 목사 자신이 생전에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과의 만남은
나의 삶을 부정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면으로, 소극적인 면에서
적극적인 면으로 바꾸어 놓았다. 나는 주님안에서 삶의 의의를
발견했고 어두움이  닥쳐와도 믿음으로 극복하여 보람있게 살아
오려고 애를 썼다”는 그의 80평생을 재조명 해보고 그 인품을
새삼 기려본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요 또 후진들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기도 하다.


1. 출생과 성장, 그리고 결혼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예이츠(1865-1939)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해, 도꾜와 요코하마에 일어난 소위 관동대
지진으로14만명이 사망했던 1923년, 계해癸亥년 3월 2일, 충청남도
대전시 대흥동 자택에서 부친 김형태, 모친 하흥부 씨와의 사이에서
김목사는 2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막내동이라 누구보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금산보통학교를 졸업
하게 되고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5년제 중학교를 고학으로 마친 뒤
8.15해방 전 해인 1944년 5월에 김석규 청년은 그리던 고국으로 귀국
하게 된다. 그가 일본에서 돌아와서 신흥국민학교 교사로 있을 때에
일찌기 하나님이 예비하신 규수가 있었으니 이 여성이 바로 오늘의
김영자 사모였다. 꿈많고 자신 만만했던 김석규 교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처음으로 전한 이 규수의 모친은 호남순 전도사였는데 당시는
일본의 탄압으로 성결교회가 폐쇄되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교회출석을
못하다가 이듬해 8.15해방을 맞아 광복이 되면서 불신자 김석규 청년은
예수를 믿기로 마음을 굳게하고 대전성결교회를 첫 출석하게 되는데
그가 나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존경받는 목회자가 될줄이야 그
때 그 무렵에 상상인들 하였으랴.
일생 반려가 된 김영자 사모와는 당시 출석하던 대전성결교회에서 결혼
하여  50여년 동안 해로하면서 동역의 길을 걸었으며 부부의 금슬은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2. 교육자에서 목회자로의 변신

후진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되는 것은 그의 꿈이었고  그 꿈은 이루어
져서  국민학교 교사로서 그 출발은 순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를 택하여 목회자로 세워서 구령사업을 맞길
계획을 일찍부터 세우고 계셨다. 그래서  믿음이 없던 그의 앞에
복음을 전하게 된 한 여성을 만나게 하셔서 처음으로 교회를 출석하게 하셨고 마음 속으로부터 교사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하도록 서서히 그리고 철저하게 계획하고 계셨다.
그는 1944년부터 4년 3개월 동안 대전 신흥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이어서 1년간 대전사범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앞날이 크게 보장되었다. 김교사 자신의 말처럼 이 무렵에 교사라는 직종은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므로 그가 교사직을 희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고기를 잡는 어부 베드로를 불러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든 하나님께서
그를 교사에서 선택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커다란 사명을 부여하기위해 그의 마음을 뒤바꾸는 부흥집회를 그 무렵에 준비하신다.  당시 서울신학교의 교장이었고 6. 25 때 피납 당한 이건 목사가 강사로 초청된 부흥집회를 그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가지게 된다. 이 날의 부흥집회는 바로 김석규 청년교사를 위한 부흥회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
었다. 강사목사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바로 그의 마음에 박히기 시작하였고 집회가 끝난 뒤 강사 목사를 찾아가 진지하게 상담한 것이 계기가 되어 확고히 헌신을 결심하게 되고 드디어 1949년  9월에 서울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런 일이 있기에 앞서 1948년 8월 30일 저녁식사 도중에, 주님이 그에게 빛으로 나타나시어서 자신만만하고 야심에 찬,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을 일일이 지적하시면서 무섭게 질책하시므로 그는 마루바닥에 엎드려 한없이 통곡하며 하나님의 거울에 비친 모든 자범죄를 고백하므로 용서를 받았는데 그날 저녁 이후로 김석규 청년교사의 삶은 완전히 변화를 받게되었다. 바로 중생의 체험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3.일본과 선진 미국에의 유학

8.15조국 광복을 아직도 2년 반이나 앞둔 1943년에 일본 사이타마고등
학교를 졸업하였던 동경유학파였고 그 12년 뒤인 1954년 4월 25일에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9회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서대전성결교회를
시무하던중 동양선교회(OMS)의 전액장학금으로 1956년 9월에 청운의
꿈을 안고 김목사는선진국인 미국 유학의 길에 오른다. 도착  1년만에
서북미 오레곤 주에 소재한 Warner Pacific College를 졸업(BA)한 뒤
계속해서 같은 주에 있는 Western Evangelical Seminary를 졸업(M.DIV)
하므로서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완전히 무장할 수 있었으며  유학 4년만에 귀국하여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교인 서울신학교(현 서울신학대학 전신)의 교수가 된다.
그는 1960년 9월부터 1969년 8월까지 9년간 후학을 양성하고 모교를
위해 마음껏 봉사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1969년 9월부터 1973년 5월
까지 대한신학교에서 후진을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하게도 된다.
일본과 미국을 유학한 결과로 일어와 영어에 능통하여 많은 서적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이 훗날 목회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선진국의 신지식 습득과 앞서가는 그의  안목은 훗날 1994년
5월 World Mission University에서 명예박사(D.D)학위까지 취득할 수
있는 계기를 삼게된다.


4. 신학교 강단에서의 명강의

서울신학대학이 대학인가를 정식으로 받고 첫번 째로 졸업한 기수가
바로 50기 인데 이들은 모교가 성실한 목회자를 양성하는 성서학원 수준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의 수준으로 탈바꿈한 과도기에 수학한 학생들이다.
그 가운데 월간 활천사 사장을 수년간 지냈고 성결교회역사와문학
연구회 상임대표인 백수복 목사는 그 시절 김석규 교수를 이렇게 회고
하고 있다.

[이 때 우리 교단의 신학적인 입장은 근본주의도 아니고 자유주의도
아닌 보수주의임을 김목사님께서 활천을 통해 1962년 12월호부터 발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근본주의 측 선교사  M씨가 반론을 제기하였으나
김목사님은 다시 <근본주의와 보수주의의 재론>이라는 논설로 교단신학의 방향을 재천명하는 등  8회나 신학논단을 발표하여 교단신학의 방향을 제시해 주신 분이셨습니다]라고.

이 무렵 김석규 교수는 ‘구약학’, ‘실천신학’ 등을 강의하였는데
차분하고 정적이면서도 불의에는 과감하게 대시하는 외유내강의 성격을 가지신 분이었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김목사님의 후임으로 충무교회를 맡은 최건호목사는 학생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신학교 교수로서 김목사님은 학문적인 연구와 강의에 열정이 있으셨고
교실에서 학생들을 대하시는 모습에서도 신앙적 감화가 크셨음을 기억합
니다.
잘못을 꾸짖고 책망도 하셨지만 어루만지시며 사랑으로 부드럽게 쓰다
듬고 타이르시는 스승의 모습에 학생들은 더욱 큰 감동과 함께 특별히 잊지 못하는 기억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랬다. 김교수는 교수이기에 앞서 목사이다. 학생들을 아끼고 사랑
하는 마음은 두 말할 것도 없지만 올바른 제자를 기르고자 함은 무엇
보다 그의 큰 사명이기도 했다.  그의 강의는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는 당시 신학생들의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었다. 구약성서 이해에 관한
충격적인 해법은 특별히 명강의로 손꼽혔다.
목사고시 출제위원으로 출제하였던 구약성서 신학의 문제는 저 유명한
벨하우젠의 구약성서 해석원리에 관한 것으로 지금도 강의를 들었던
제자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김목사의 인기는 그래서 대단했다.

                                                 <2005. 11. 1>

< 계속>


  
*출판기념회
         2005. 11. 17(목) 11시
         샌프란시스코성결교회에서




    ⊙ 발표일자 : 2005년11월   ⊙ 작품장르 :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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